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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혜 Mar 01. 2019

우아하고 동양적인 SF를 읽고싶다면

<종이 동물원>을 읽고

간혹 사람들이 왜 좋아하는지는 알겠는데 도저히 취향이 아닌 것들이 있다. 뭐,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음식을 비롯해서 영화같이 취향을 많이 타는 것에는 허다하다. 작품성이 좋은 것도 납득하고, 인기 있는 이유도 알겠고, 개인적으로도 뛰어나다고는 생각하는데 도저히 재미를 느끼기 어려운 것들.

내게 있어 켄 리우의 <종이 동물원>이 그랬다. 워낙 호평을 받아서 읽어보았는데, 으음..... 물론 사람들이 왜 좋아하는지는 이해한다! 좋아할 만하다! 다만 코드적으로 도저히 나와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중국계 미국인인 켄 리우는 중국에서 태어나 열한 살 때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했다. 이후 하버드 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잘 나가는 기업에서 프로그래머로 일하다가 하버드 로스쿨을 나와 변호사로 일했다고. 여기까지의 스펙만으로도 허덜덜한데 거기에 소설까지 쓰는 것이다. 워..... 간혹 신이 재능을 몰빵한 것 같은 사람들을 보는데 이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 중 하나가 아닌가 싶다. 여전히 낮에는 법무자문 같은 일을 하고 글은 밤에 쓰는데 본업이 있는 사람이 취미로 끼적거리는 수준이 아니다. 그야말로 ‘소설가’다. 문학적으로도 대중적으로도 훌륭. 미국에서 상도 여럿 받았다. 취향이 아니라고 위에 적긴 했지만.

그렇다면 취향이 아닌 이유는.... 그렇다. SF이기 때문이다. 책에 실린 모든 작품에 해당되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이 SF이며, 지금으로부터 50-200여 년 이후의 미래를 상정하고 있는 이야기들이다. 그러한 시대에서 배경은 주로 미국, 중국, 일본 등. SF지만 각 국가에 얽힌 역사적 배경과 결합되어 첨단 미래 세계라기보다는 시대극스러운 느낌도 물씬 풍기기도 한다. 그래서 더욱 좋은 사람들도 있겠지만 시대극이나 역사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에게는 더욱 힘든 이유였기도 하고. 달리 말하면 그런 요소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아주 재미있게 볼 수 있다는 뜻이다. 거기에 중국계라는 것이 강하게 작용하여 매우 오리엔탈스러운 느낌이 가미되어 있다. 말하자면 동양적인 SF.

소재는 독특하며, 이야기는 훌륭하고, 문장은 매끄럽다. 결정적으로 내 취향이 아니라서 그렇지. 일단 우주선을 싫어한다. 읽다 보니 이걸 무척 재미있어할 만한 사람들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




이렇게 쓴 책을 읽기 위해 알레시아인은 자기 주둥이를 그 홈에 대고 죽 훑어 나간다. 예민한 주둥이는 물결 모양 홈을 따라 진동을 일으키고, 알레시아인의 두개골 속에 있는 빈 공간이 그 소리를 증폭시킨다. 이렇게 하여 글쓴이의 목소리가 재현된다. -p.196, 고급 지적 생물종의 책 만들기 습성



사실은요, 전 아버지를 용서할 준비가 돼 있었어요. 아버지는 늙어 보였어요. 그건 다른 누구보다 자식이 제일 늦게 알아차리는 특징이죠. -p.219, 시뮬라크럼


사람들이 인터넷에서 생판 모르는 낯선 이에게 정보를 넘겨주려고 얼마나 안달 하는지 생각해 보면 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사람들은 답을 먼저 알려 주려고 앞다퉈 덤빈다. 자기가 얼마나 박식한지 모어 주려고. 워처는 그런 소소한 허영심을 즐겁게 착취한다. -p.252, 레귤러



사람들은 자기가 알려 하지 않는 것을 알지 못하는 법이다. -p.266, 레귤러



시간의 화살은 그 압축의 정확성을 앗아간단다. 스케치가 되는 거야, 사진이 아니라. 기억은 곧 재현이란다. 그것이 소중한 까닭은 원본보다 나은 동시에 원본보다 못하기 때문이지. -p.312, 상급 독자를 위한 비교 인지 그림책



“선택의 여지는 있어. 우리가 죽어서 아이들이 자라도록 하든가.....” 주앙이 말했다. “아니면 우리는 영원히 지금 이 나이로 살고, 아이들은 영원히 아이로 남게 하든가.” -p.338, 파



주거 모듈에는 창문이 하나도 없어서 흘러가는 별을 볼 수가 없다. 사람들은 대부분 별 관심도 없다. 별 구경은 이미 오래전에 질렸으니까. 하지만 나는 우주선 바닥에 장착된 카메라를 들여다보는 게 좋다. 그러면 볼 수 있으니까. 저 뒤로 멀어져 가는 태양의 불그스름한 빛을. 우리의 과거를. -p.375, 모노노아와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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