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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혜 Feb 28. 2019

황정은의 압도적인 세계

<아무도 아닌>, <디디의 우산>을 읽고

넷플릭스를 이리저리 뒤져보던 남편이 말했다.
“오,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도 있네? 이게 1960년대에 만들어진 영화였구나, 진짜 대박이다.”
“어, 나 그거 아직 안 봤어. 이름은 많이 들어봤는데. 재밌어?”
“재밌냐고? 완전 대박이지! 이건 혁명이야 혁명!”

그리하여 맛이라도 보자, 하는 마음에 잠시 틀어보게 되었는데, 스탠리 큐브릭 영화는 이전에도 몇 편 본 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뭐, 시작부터 굉장한 것이다. 뛰어난 재능과 예술성과 같은 이런저런 가타부타 설명은 생각도 나지 않을 정도의 어떤 압도적인 느낌. 물론 SF를 좋아하지 않아 끝까지 보진 않았지만.

그전까지 황정은 작가의 작품을 사실 일부러 찾아볼 생각은 못했었다. 그냥, 왠지 책 제목도 소개글도 딱히 끌리지가 않았어서. 그러다가 좋아하는 다른 작가들이 황정은의 신간이 나왔다며 너무나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갑자기 궁금해졌다. 아니 그 이름 자체가 하나의 브랜드라고 하는데, 황정은이라는 이름 석자만으로 다른 어떠한 말도 필요 없다고들 하는데, 사실 그렇게까지 압도적으로 히트한 작품이 있느냐 하면 또 그것은 아니므로. 왜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지에 대해서 알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읽게 된 황정은의 책 두 권, 연작소설 <디디의 우산>과 소설집 <아무도 아닌>은 정말 놀라웠다. 두 권은 별개의 작품이지만 하나의 세계관을 공유한다. 모든 이야기들은 서로 조금씩 연결되며, 여기서 이 인물의 입을 통해 나왔던 이야기는 다른 곳에서 다른 이를 통하여 다시 이어진다. 그 모든 과정은 스페이스 오딧세이 도입부를 볼 때와 같은 그야말로 압도적인 느낌, 이렇게도 소설을 쓸 수 있구나 하는 충격이었다. 단순히 이야기를 잘 풀어내고, 세태를 포착하고, 시대정신을 읽어내는 것을 넘어서 서사와 시점을 넘나들며 의식의 흐름을 자유롭게 따라가면서도 조금의 위화감이나 거슬림도 느낄 수 없는 문장들과 이제까지 줄곧 느껴왔으나 어디에서도 이야기된 적 없는 감정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어쩌면 치밀한 플롯이나 계산 없이 무의식적으로 그냥 쓰여진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의 자연스러움. 물론 그럴 리는 없겠으나.

개인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김애란 작가나 최은영 작가를 썩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이제껏 나온 둘의 작품을 거진 재미있게 읽었고, 이 시대의 훌륭하고 뛰어난 여성작가임에 틀림없고, 그야말로 ‘잘 쓴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와는 별개로 그 둘의 작품은 너무 ‘착해서’ 싫다는 것이 솔직한 감상이다. 그야말로 작가가 약한 것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너무나 지극해서, 읽고 있으면 스스로의 나쁜 부분을 끊임없이 상기하게 된다. 온통 연약하지만 선량한 것들 사이의 악하고 무력한 나.

그런 면에서 황정은은 좀 다르다. 신형철 평론가는 황정은에 대해 “이 작가는, 마치 어떤 맹수가 먹잇감을 점찍고 한참을 노려보다가 단 한 번의 돌진으로 대상을 정확히 가격하여 쓰러뜨리듯이, 쓴다.”라고 말했다. 황정은의 소설 속 약자들은 매우 무심하고 때론 드러내 놓고 악하기도 하다. 불의의 상황을 보면 쉽사리 고개를 돌리며, 그로 인해 비난받는 순간이 왔을 때, 그러는 넌 다를 것 같아?라고 외치기도 한다. 백화점에서 진상고객에게 시달리는 매니저는 근처의 보세 의류점에 가서 또 다른 갑질을 시전하며, 가난한 동네의 이웃들은 서로를 미워하고 쌍욕을 해대기 일쑤에, 오직 자신밖에 관심이 없는 남자는 땡볕에 쓰러져 바닥에 머리를 부딪히는 남자를 보고서도 자기가 탈 버스가 오자 그대로 가버린다. 약자가 약자를 착취하는 세계, 약자가 약자를 혐오하는 세계.

그러다가, 그들은 문득 고통의 순간에 자신이 했던 행동을 떠올린다. 자신이 비극을 맞이한 순간이 되자, 혹 자신이 과거에 했던 어떤 무심한 행동과, 타인을 방임했던 것들을 생각하며 괴로워한다. 그렇다고 그러한 괴로움이 각성의 계기가 되는 것은 아니다. 괴로움은 그저 괴로움일 뿐. 또 다른 비슷한 상황이 왔을 때 또다시 비슷한 선택을 한다. 현실세계 속 대개의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황정은의 작품들을 읽고 나니, 왜 사람들이 그토록 그녀에 열광하는지 알 것 같았다. 물론 소설을 좋아하고 많이 읽는 일부 사람들에 한해서겠지만. 그녀는 말하자면, ‘작가들의 작가’와도 같은 느낌이다. 압도적인 재능과 독보적인 존재감.



⭐️⭐️⭐️⭐️⭐️




아버지는 이제 칠십대에 접어들었고 누군가가 식사를 차려주지 않으면 곤경에 빠지고, 어느 서랍에 자기 양말이며 바지가 들었는지를 잘 모르고, 잘 씻지 않고, 아파도 스스로를 돌보지 않아서 어머니를 안달복달한 상태로 밀어넣고, 자신을 내버려둔다고 딸들을 원망하며 누군가를, 무언가를 혐오하는 데 전보다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젊음도 늙음도 혐오하는 그가 가장 혐오하는 것은 노조 활동과 폭로와 노무현인데, 파업은 빨갱이 활동이고 삼성의 수십억원대 비자금을 폭로한 김용철 변호사는 비열한 배신자이며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가당찮은 자리까지 올라간 범인이다. 막노동에 나보다 많이 버는 것들이 무슨 노조며 파업이냐,라는 그의 불쾌에는 노동 혐오와 노동자 혐오가 동시에 있고, 그보다 더 근본에는 약함을 혐오하는 마음이 있는 것 같고, 특히 노무현 전 대통령을 향한 분노나 혐오에 종종 등장하곤 하는 말이 ‘권위도 뭣도 없다’라는 점을 생각해보았을 때, 노동자, 김용철, 노무현을 향한 그의 혐오는 같은 물줄기가 아닐까,라고 김소리와 나는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는 권위 없음을 혐오한다. 그는 힘없음을 혐오한다. 그는 약함을 혐오한다.

-p.220-221,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 디디의 우산


두 달 동안 그녀의 몸엔 특별한 이유도 없이 미열이 이어졌다. 그녀는 그게 소음들 때문이라고 믿었고 공기관에 민원도 넣어보았는데 그때뿐이었다. 어떻게 막을 도리가 없었다. 그녀는 그때 자신이 계급적 인간이라는 것을, 자신이 속한 계급이라는 걸 알았다. 이런 거였구나. 이웃의 취향으로부터 차단될 방법이 없다는 거. 계급이란 이런 거였고 나는 이런 계급이었어. 왜냐하면...


왜냐하면 더 많은 돈을 가져서 더 많은 돈을 지불할 수 있다면 더 좋은 집에서 살 수 있을 테니까. 더 좋은 집에서 산다는 것은 더 좋은 골목, 더 좋은 동네에서 살게 된다는 것이고 더 좋은 동네라는 것은 이웃의 소음과 취향으로부터 차단될 수 있는 방법이 있는 동네일 테니까. 그런 동네에서는 서로 간섭하거나 간섭되는 일이 없으니 사람들의 표정은 편안하고 너무하네, 라도 외친다거나..... 너무 친절하게 구는 일도 없을 것이고 지속적인 소음에 시달리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런 세계는 좋을 것이다. 내게도 권리가 있어. 남들에게 시달리지 않을 권리가 말이다. 예컨대 잡상인, 이런저런 방문객, 확성기 소음, 휴대폰 매장의 무자비한 플레이리스트, 사람들이 망해가는 모습, 그런 것으로부터 해방..... 해방이라기보다는 차단될 수 있는 권리..... 그런 게 있고 그것이 내게도 분명 있는 권리인데 그걸 확실하게 실현하려면 돈을 가지고 있어서 그 권리를 실현할 수 있어야 하는 거야. 그렇게 할 수 있는 인간이라야 비로소 그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계급인 거야. 그런데 나는 그게 아니지. 나는 지금 그게 아니고 아마 죽을 때까지도 그게 아니다. 나는 그래 그거다.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계급..... 하고 그녀는 그 집에서, 어쩔 수 없게도 계급에 속하는 계급적 인간으로서의 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p.121-124, 누가, 아무도 아닌



저렴한 스커트와 블라우스와 양말 같은 것을 손에 잡히는 대로 계산대에 쌓아두고 그 매장에서 일하는 사람을 갈굽니다. 최고, 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매력 있게 웃을 줄 아는 그녀가 조금의 미소도 없이 매장 직원을 세워두고 질문이나 트집으로 몰아붙이고 까다롭게 굴면서, 그들이 애먹는 모습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노골적으로 사람을 무시하는 그 태도는 그녀와 내가 매장에서 겪는 고객들 가운데 가장 유난하고 잔혹하게 구는 사람들과도 꼭 닮아서, 지켜보는 내가 조마조마하고 민망할 정도입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왜 그 사람들처럼 해요, 그게 어떤지 언니도 알면서. 그러자 그녀는 내게 반문했습니다. 도게자라고 알아 자기?

도게자

이렇게, 인간이 인간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이는 자세를 도게자라고 해. 사람들은 이걸 사과하는 자세라고 알고 있지만 이것은 사과하는 자세가 아니야. 본래 사과하는 자세가 아니다. 이게 뭐냐하면 자기야, 그 자체야. 이 자세가 보여주는 그 자체. 우리 매장에서 난리치는 사람들, 그 사람들? 사과를 바라는 게 아니야. 사과가 필요하다면 죄송합니다 고객님, 으로 충분하잖아? 그런데 그렇게 해도 만족하지 않지. 더 난리지. 실은 이게 필요하니까. 필요하고 바라는 것은 이 자세 자체. 어디나 그래 자기야. 모두 이것을 바란다. 꿇으라면 꿇는 존재가 있는 세계. 압도적인 우위로 인간을 내려다볼 수 있는 인간으로서의 경험. 모두가 이것을 바라니까 이것은 필요해 모두에게. 그러니까 나한테도 그게 필요해. 그게 왜 나빠? 라고 매우 아름다운 얼굴로 말한 뒤 그녀는 이런 이야기를 덧붙였습니다.

게다가 자기야, 나는 무시당하는 쪽도 나쁘다고 생각해. 자존감을 가지고 자신을 귀하게 여겨야지. 존귀한 사람은 아무에게도 무시당하지 않는다. 스스로를 귀하게 여길 줄 모르는 사람이나 진정으로 당하는 거야 무시를.

그 이야기를 듣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나는 생각이 많았습니다. 발을 주무르고 화장을 지우고 세수를 하고 잠자리에 누워서도 계속 생각했습니다. 정말 기묘한 이야기라고 생각했습니다. 스스로를 귀하게 여길 줄 모르는 사람이나 진정으로 당한다 무시를. 지금까지 들은 적도 본 적도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그 말을 생각하고 생각했습니다. 자존감, 존귀한 사람.

그게 대체 뭘까요?

남에게 무시를 당한다면 당하는 나도 나쁘다. 왜냐하면 내가 존귀하니까. 나도 실은 존귀하니까. 그런데 나는 과연 존귀한 걸까요? 내가 나를 존귀하다고 여기고 있는 걸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스스로 귀하다는 식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요 나는? 그것은 어떻게 하게 되는 생각일까, 하고 생각하느라고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정말이지 그것은 어떻게 느끼는 것입니까? 사람이 날 때부터 존귀하다면 그것을 스스로 알아채게 되는 때는 안제일까요? 어떻게 그렇게 되는 것일까요? 학습되는 것입니까? 스스로 귀하다는 것은...... 자존, 존귀, 귀하다는 것은, 존, 그것은 존, 존나 귀하다는 의미입니까. 내가 존귀합니까. 나는 그냥 있었는데요. 언제나 여기저기에 있었는데요. 이렇게 그냥 있어도 존귀할 수 있습니까. 존귀하다는 것, 그것은...... 아무래도 상태는 아니지 않아? 정태가 아니고 동태가 아닙니까? 가만히 있어도 존나 귀하다면 그것은 일단 인간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냥 있는 것 자체로 존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선 인간에 속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요. 왜냐하면 인간은 똥을 싸는 데에도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생물이니까 병원비와 생활비도 벌어야 하고 그렇지 않습니까. 당신은 어떻습니까. 괜찮습니까. 자존하고 있습니까 제대로..... 존귀합니까. 존나 귀합니까....... 누구에게 그것을 배웠습니까.

 P.201-203, 복경, 아무도 아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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