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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혜 Feb 23. 2019

재미있는 것과 좋은 것

<디어 라이프>를 읽고

누군가 엄청나게 재미있는 소설책 딱 한 권만 꼽아달라고 한다면 조금 고민은 하겠지만 폴라 호킨스의 <걸 온 더 트레인>을 꼽을 것이다. 근 몇 년간 그 이상 재미있게 읽은 책은 없었던 것 같다(안타깝게도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는 망했다). 잠깐만 들춰본다는 것이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가 그만 날밤을 새고 말았다. 둘째가 4~5개월 무렵이라 잠이 엄청나게 부족했던 시기였는데도 불구하고.

그렇다면 그게 가장 좋아하는 책이냐고 누군가 다시 묻는다면 놀랍게도(?) 또 그렇지는 않다. 리스트를 만들어본 적은 없지만 하다못해 좋아하는 책 100권 안에도 못 들어갈 것이다. 요는 재미를 느끼는 것과 좋아하게 되는 것은 꽤 다른 차원의 이야기라는 것.  (물론 일치하는 경우도 있다. 꽤 많다!) 책도 그렇고, 영화도 그렇고, 어쩌면 모든 것이 그럴지도 모르겠는데, 오히려 좋아하게 된 것들은 처음 접하는 그 순간에는 큰 재미(?)나 자극은 느끼지 못했던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그렇게 흠... 하고서 지나간 다음, 두고두고 생각이 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앨리스 먼로의 소설들은 재미있지 않다. 작품 대다수가 단편으로, 하나의 완결된 줄거리를 갖고 있는 장편에 비해 몰입도가 떨어지며, 이야기들은 캐나다의 작은 시골마을에 사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인물의 일상적인 삶에 불과하다. 어쩌면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과 비슷할지도. 일상에서 포착된 어떤 순간들. 그 순간 인물들의 마음속에서 흘러가는 감정들. 물론 카버의 인물들은 남성이며 먼로의 인물들은 여성이다. 여하 간에 그렇기 때문에 소설을 즐겨 읽거나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몇 편 읽지 않아 지루함을 느낄 확률이 높다. 설사 소설을 많이 읽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아, 이 책 미친 듯이 재밌다!”라고 느끼기는 어려울 것이라 본다.

놀라운 것은 그렇게 무덤덤하고 평범한 것만 같은 먼로의 소설이 읽고 난 뒤에는 시간이 지날수록 거듭해서 생각이 난다는 것이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누구나 한 번쯤 겪어본 적 있거나, 차마 말로는 풀어내기 어려웠던 감정과 감각들을 먼로는 매우 예리하고 또 정확하게 그려낸다. 미묘한 감정은 시간과 사건의 흐름에 따라 수학 공식처럼 정교하고 섬세하게 변화한다. 인간 심리를 다소 차분하고 서늘하게 관조적으로 서술하는 점은 도리스 레싱과 비슷하지만, 레싱에 비해서는 내면에 지글지글 끓는 듯한 감추어진 정열 같은 것이 조금 더 느껴진다.

캐나다에서 태어난 앨리스 먼로는 2013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그전까지 정치적 색채가 강한 작품에 여러 가지 자세한 이유와 함께 수여되었던 노벨상은 먼로에게 “현대 단편소설의 거장”이라는 단 한마디와 함께 건네 졌다. 그 이상의 말이 필요 없었던 것이다. <디어 라이프>는 먼로의 대표작으로 엽편에 가까운 짧은 소설부터 중편 느낌의 긴 단편까지, 총 14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중 후반부 4편은 자전적 이야기를 바탕으로 쓰인 것들이라고 한다. 책장을 정리해야 혹은 정리하게 되는 날이 왔을 때, 아마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남기게 될 것 같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읽고 싶은 그런 이야기들이었다.



⭐️⭐️⭐️⭐️⭐️



가을과 겨울과 봄을 보내는 동안 그녀가 그를 생각하지 않은 날이 하루도 없었다. 잠이 들자마자 같은 꿈을 꾸는 것과 같았다. -p.23, 일본에 가 닿기를



이 편지를 쓰는 것은 유리병 속에 편지를 넣는 것과 같아요.
그리고 바라죠.
편지가 일본에 가 닿기를. -p.25, 일본에 가 닿기를



“넌 내가 지금 정상이 아니란 걸 알 거야. 나도 내가 그렇다는 걸 알고 있어. 모든 게 더없이 분명해졌어. 나는 그게 정말 고마워.” -p.315, 기차



그가 그녀와 함께 지냈던 방들이나 그녀의 집에서 했던 일을 그리워하면서 세월을 보낸 것은 아니었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런 기억들이 종종 꿈속에 나타난 것이다. 그러면 그는 그리움이라기보다는 조바심에 더 가까운 감정이 들었다. 아직 끝내지 못한 일을 당장이라도 해치워야 할 것처럼. -p.323, 기차



모든 것은 가두어 잠가버릴 수 있다. 그러는 데 필요한 것은 단지 결심뿐이다. -p.339, 기차



“우리는 싸울 여력이 없어.” 그가 말했다.
참으로 그렇다. 나는 우리가 얼마나 늙었는지 잊고 있었다. 모든 것을 잊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세상에는 늘 괴로워할 것과 불평할 것이 존재한다. -p.399-400, 돌리



내가 당신에게 보낸 편지가 오면 찢어버려요.
문제는 그가 내 부탁대로 할 거라는 점이다. 나라면 그러지 않는다. 어떤 약속을 했건 나는 편지를 뜯어볼 것이다.
하지만 그는 내가 시킨 대로 할 것이다.
그가 기꺼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면 나는 화가 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가 존경스러울 것이다. 돌이켜보면 우리가 함께했던 삶 전체가 그랬다. -p.400, 돌리



사람들은 어떤 생각들을 하지만 그것들은 이내 사라진다. 살다 보면 그렇게 된다. -p.447, 밤



어떤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용감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p.467, 목소리들



내 흥미를 끌었던 것은 페기가 아니라, 그녀의 눈물이 아니라, 그녀의 일그러진 얼굴이었다. 그녀는 나 자신의 모습을 많이 떠올리게 했다. 내가 감탄했던 것은 그녀를 위로하는 청년들이었다. 그녀 앞에서 허리를 숙인 채 자신의 생각을 말하던 그들의 모습이었다.
그들은 어떤 말을 하고 있었을까? 특별한 것은 없었다. 괜찮아, 그들이 말했다. 다 괜찮아, 페기, 그들이 말했다. 자, 페기, 괜찮아. 괜찮아.
그런 다정함. 누구라도 그렇게 다정할 수 있었을 것이다. -p.467-468, 목소리들



하지만 가까이 사는 아버지의 여자 친척들이 어머니를 못마땅해하며 예의주시했던 이유는 그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어머니의 잘못은 그녀 자신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농장에서 자란 사람으로는, 그런 여자로 살아가려는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p.491-492, 디어 라이프



그 딸은 한동안 내가 어른이 되어 살던 곳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살았다. 나는 그녀에게 편지를 써 보낼 수도 있었고, 어쩌면 찾아가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내가 나의 어린 식구들과 한결같이 불만족스러웠던 내 글쓰기 때문에 바쁘지만 않았다면. 하지만 그때 내가 정말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던 사람은 더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내 어머니였다. -p.500, 디어 라이프



어머니의 마지막 순간에도 그리고 장례식에도 나는 집에 가지 않았다. 내게는 어린 자식이 둘 있었는데 밴쿠버에는 아이를 맡길 사람이 없었다. 우리는 거기까지 갈 경비가 없었고 내 남편은 의례적인 행동을 경멸했다. 하지만 그것이 왜 그의 탓이겠는가. 내 생각도 같았다. 사람들은 말한다. 어떤 일들은 용서받을 수 없다고, 혹은 우리 자신을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 하지만 우리는 용서한다. 언제나 그런다. -p.501, 디어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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