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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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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혜 Mar 08. 2019

개인의 사정

둘째 하원시키고 돌아오는 길에 도서관에 들렀다. 적응하느라 힘이 드는지 부쩍 떼가 늘어난 아이는 차에서 울다가 잠이 들었다. 차를 세워놓고 후다닥 올라가 다 읽은 책을 반납하고 나왔다. 여기 저기 이상하게 댄 차들 때문에 긁을까봐 노심초사하며 백번쯤 움직여서 빠져나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폐휴지를 담은 리어카가 떡하니 출구를 막고 있다. 도대체 뭐야 하면서 신경질이 나려는 참인데 한 노인이 출구 옆 골목길에 쌓인 쓰레기를 뒤지고 있었다.

창문을 열고 조심스레 불렀다. 할머니, 할머니. 조금씩 소리를 높이는데도 전혀 반응이 없어 결국 클락션을 울렸다. 살살 누를 작정이었는데 생각보다 큰 소리가 났다. 허리를 구부리고 있던 노인은 화들짝 놀라더니 그대로 몸을 돌려 리어카를 아주 조금 옆으로 옮겼다. 폐지를 뒤지느라 숙인 것 같았던 허리는 숙인 게 아니라 아주 굽은 것이었는지, 리어카를 옮기는 사이에도 펴질 줄을 몰랐다. 소리가 난 방향을 향해 잠깐 드러난 노인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분노도 부끄러움도 민망함도 불쾌함도 놀라움도 슬픔도 아무것도. 노인은 다시 쓰레기더미를 뒤지기 시작했다. 매우 살짝만 비켜난 것이라 역시나 차를 빼면서 또 한참 고생해야 했다. 그래서 솔직히 짜증이 나지 않은 것도 아니었지만, 왠지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집에 오는 길에 이상하게 자꾸만 노인의 생각이 났다. 90도로 굽은 허리가 클락션 소리에 화들짝 놀라던 모습. 그 모습은 왠지 곤충이나 동물이 어떤 위협을 감지했을 때 본능적으로 움찔하는 동작에 가까웠다. 그 순간적인 반응 이외에는 인간으로서의 생명력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던 그 할머니. 얼굴에는 표정이 하나도 없이, 너무나도 무력하고, 너무나도 무해한, 그래서 왠지 모르게 바라보는 사람이 미안해지는 그 모습이 이상하게 자꾸만 생각나는 것은, 아무래도 엊그제 읽은 소설 탓이겠지만. 그럼에도 마음이 내내 좀.

”은교 씨, 나는 특별히 사후에 또 다른 세계가 이어진다고는 생각하지 않고요, 사람이란 어느 조건을 가지고 어느 상황에서 살아가건, 어느 정도로 공허한 것은 불가피한 일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인생에도 성질이라는 것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본래 허망하니, 허망하다며 유난해질 것도 없지 않은가, 하면서요. 그런데 요즘은 조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어요.
어떤 생각을 하느냐고 나는 물었다.
이를테면 뒷집에 홀로 사는 할머니가 종이 박스를 줍는 일로 먹고산다는 것은 애초부터 자연스러운 일일까, 하고.
무재씨가 말했다.
살다가 그러한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은 오로지 개인의 사정인 걸까, 하고 말이에요. 너무 숱한 것일 뿐, 그게 그다지 자연스럽지는 않은 일이었다고 하면, 본래 허망하다고 하는 것보다 더욱 허망한 일이 아니었을까, 하고요.”
 - 황정은, <백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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