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글을 몰랐지 인생을 몰랐나>
화장을 언제 처음 해봤는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아마도 중학교 3학년 때쯤이었지 싶다. 니베아에서 색깔이 들어있는 챕스틱을 판매했었는데(겉에 체리 모양이 그려져 있었다), 그걸 바르면 립스틱 바른 것처럼 입술이 빨갛게 되었다. 어디 수학여행이나 소풍 가서 단체사진이라도 찍는 날에는 교실이 아주 난리가 났다. 거울 앞에 길게 줄을 서서 다들 파우더 같은 걸 열심히 두드리고, 화장 좀 잘한다는 아이는 친구들 눈썹을 손질해주느라 바빴다. 그런 우리를 보며 선생님들은 혀를 끌끌 찼다. 야, 니들 때는 안 꾸미는 게 제일 예쁜 거야. 자연스러운 모습이 제일 예뻐. 그것도 모르고.
그때는 어른들이 그냥 하는 잔소리라고만 생각했는데, 지나고 보니 그 말이 진실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나도 이제 꼰대가 되었는지 화장을 하고 다니는 중고등학교 아이들을 보면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어떻게 학생이 화장을?!!! 이런 것은 당연히 아니고, 안 하는 게 더 예쁜데 아깝다, 뭐 그런 생각들. 물론 그 시기에는 지나가는 어른에게 예쁘게 보이는 것보다 또래에게 예쁘게 보이는 것이 더 중요하므로 아무리 이야기해도 소용없고 또 들리지도 않을 것이다.
글을 쓰는 것 역시 어쩌면 화장하기와 비슷한지도 모르겠다. 그냥 자연스럽게 있는 그대로의 생각을, 하고 싶은 말을 솔직하게 쓰면 되는데, 억지로 꾸미고 뭔가 더 있어 보이려고 하다가 되려 망쳐버리는 모습을 많이 본다. 어떤 글들은 자의식을 좀 걷어내면, 허영을 조금만 빼면 훨씬 더 좋아질 것 같은데, 싶고. 물론 남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나 역시 더 잘 쓰고 싶어서, 더 멋져 보이고 싶어서 뭔가를 자꾸 꾸미고 덧붙이고 얹고 하면서 오히려 이상해지는 경우가 많다.
이슬아 작가가 연재하는 칼럼에는 본인이 글쓰기 수업을 하면서 만난 초등학생들의 글이 자주 등장하는데, 정말 초등학생들이 쓴 거 맞아? 싶을 정도로 잘 쓴 글이 많아 깜짝 놀라게 된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초등학생이라 오히려 가능한 글 같기도 하다. 허영과 가식이 없는 솔직한 글, 있는 그대로의 간결하고 단순한 글.
<우리가 글을 몰랐지 인생을 몰랐나>는 순천의 할머니들이 여든 살이 넘어 뒤늦게 글과 그림을 배우면서 쓴 시, 일기, 그림으로 이루어진 책이다. 까막눈으로 평생을 살아오다가 글자 자체를 배운 지 얼마 안 되는 할머니들인지라 마치 초등학생들의 쓰고 그린 글과 그림 같다. 한 편의 글은 단순하고 일차원적인 문장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 특별한 감동이 다가오기도 한다. 고된 시집살이, 남편의 폭력, 가난의 고통, 여러 굴곡진 사연들이 어떤 과장도 호들갑도 없이 단순하게 나열되는데, 할머니들이 겪어온 시간을 생각하다 보면 가슴이 먹먹해지고 만다.
모든 이야기가 한 편의 드라마지만 어떤 사연들은 정말 충격적일 정도이다. 선본 지 3일 만에 시집을 갔는데, 처음에는 집을 사줄 것처럼 떵떵거리던 시댁은 알고 보니 너무나 가난했고, 신방조차 차릴 공간이 없어서 시어머니가 하루는 형님 방을 하루는 자신들 방에서 번갈아 잤다는 이야기. 그때는 너무나 힘들었는데, 돌이켜보면 당시 시어머니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다는 이야기. 요즘으로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그런 이야기들. 시집을 가서 나이차 많이 나는 어린 시누를 마치 딸처럼 키워야 했던 경험도 부지기수이다.
놀라운 것은 할머니들이 그 어려운 생을 살아내면서도 마냥 어둡고 우울해하지만 않고, 작은 희망과 행복을 찾아내 기뻐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나 글자와 그림을 배운 뒤에는 글을 읽고 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는, 지금 자신의 꿈은 건강하게 계속 공부하는 것이라는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참으로 여러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할머니들의 인생을 어설프게 동정하거나 추켜세우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니라 글도 그림도 진심으로 훌륭하고 아름다웠다. 좋은 글과 그림, 그리고 행복에 대해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