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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혜 May 15. 2019

여성들의 권력 다툼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소녀들의 심리학>


전에 아들과 같은 어린이집에 다니는 아이의 가족과 만난 적이 있다. 한 살 밑의 여자아이로 반은 다르지만 아들과 굉장히 잘 지내는 사이다. 놀이방에서 아이들이 노는 걸 지켜보고 있는데 여자 아이네 엄마가 문득 진지하게 말했다.
 
“그런데 OO이가 친구가 없는 것 같아 걱정이에요.”
“친구가 없어요? 왜요? 지금도 저렇게 잘 노는데요?”
“아... 애들이랑 두루두루 잘 어울리긴 하는데, 아주 친한 친구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요. 들어보니까 여자아이들은 자랄수록 단짝 친구가 있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저희 애는 친구들이 하는 놀이가 마음에 안 들면 금방 다른 데로 가서 결국 혼자서만 따로 놀고 있을 때가 많거든요.”
 
나 역시 몇 번인가 들은 적이 있었다. 남자아이들과 다르게 여자아이들은 단짝 친구가 꼭 필요하다는 말. 아주 어린 시기부터 친구사이에서도 깊이 있는 애착관계가 형성된다는 이야기. 그러고 보니 그랬던 것도 같다. 나의 어린 시절을 포함하여 주변을 둘러보아도 여자아이들은 꼭 누군가와 짝을 지어서 함께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한편으로는 이런 일도 있었다. 친구들과 공통지인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였다. 같이 잘 다니던 사람 몇 명이 요즘에 잘 안 보여서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알고 봤더니 그중 하나가 그룹으로부터 따돌림을 당했기 때문이었다고. 그 말을 해 준 사람은 이어서 말했다. 왜 여자들은 꼭 그렇게 돌아가면서 누군가를 따돌리는지 모르겠어. 그 말에 다른 친구가 거들었다. 맞아 맞아, 우리 어렸을 때도 생각해보면 꼭 그룹 중에 한 명씩 막 돌아가면서 따돌리고 그러지 않았어?
 
그랬다. 나 역시 초등학생 때, 중학생 때, 무리 지어서 여럿이 어울리는 그룹이 있으면, 나를 포함하여 꼭 한 명씩 누군가가 따돌려지곤 했다. 한 명의 따돌림이 끝나는가 싶으면 또 다른 아이의 따돌림이 시작되었다. 혹 따돌림에 저항하면 그 아이가 바로 따돌림의 타깃으로 변경되었다. 위와 같은 일들이 나만이 겪은 특수한 사건이 아니라, 여자아이들 사이의 꽤나 보편적인 경험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 후로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러면서 종종 생각하곤 했다. 왜 여자아이들 사이에서 이렇게 따돌림의 경험이 일상적인지에 대하여. 왜 여자아이들의 우정은 남자아이들과 다른 형태로 나타나는지에 대해.
 
레이철 시먼스의 <소녀들의 심리학>은 위와 같이 소년들과는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소녀들의 행동에 대해, 말하자면 소녀들의 ‘은밀한 공격 문화’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탐구하고 이야기하는 책이다. 남자아이들 사이에서 갈등이 주먹질과 같은 직접적인 공격, 혹은 공개적인 결투 등으로 이루어진다면, 소녀들의 싸움은 뒤에서 은밀하고 조용하게 이루어진다. 물밑작업과 조종, 여론의 확보. 당사자가 무언가 잘못된 거 같다는 느낌을 받았을 때는 이미 따돌림이 시작된 상태이다.
 
저자인 레이철 시먼스는 다양한 지역의 소녀들과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여자아이들 사이에서 따돌림이 시작되는 과정과 친구를 공격하는 상황에서 그들의 느끼는 것, 그들이 분노하게 되는 기재를 분석하고 소녀들 사이에서는 권력관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파악한다. 체계적이고 정량적인 연구결과라기보다는 인터뷰를 중심으로 정리한 소견서에 가깝지만 이와 같이 ‘소녀들의 심리학’을 본격적으로 다룬 내용이 그간 없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굉장히 공부가 되는 책이다.
 
사회학에서 ‘정답’이란 없겠지만 여자들의 공격성이 남자들과는 다르게 은밀한 형태로 나타나는 이유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파악한다. 여자들은 상대를 배려하고 상처 주면 안 된다는 교육을 지속적으로 받아왔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직접적으로 의견을 표명하고 자기주장을 하는 훈련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에, 불쾌한 상황이 발생하면 그것을 조정하거나 해결하는 대신 일단 회피한 뒤, 후에 ‘대체적 공격’을 한다는 것. 그리고 그 대체적 공격이 다름 아닌 따돌림이란 것.
 
나 역시 책을 읽기 전에는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아무리 남성과 여성은 다르지 않다, 같다, 라는 이야기를 해보려고 해도, 현실에서는 둘의 양상이 상당히 다르게 나타나는데, 여자애들은 왜 저럴까. 왜 저런 행동을 하는 것일까, 정말 여자아이들이 더 못되고, 더 열등하고, 더 나쁜 것일까 하면서 말이다. 책은 여성과 남성의 본능은 동일하지만 사회적으로 성역할이 다르게 학습되고 이상적으로 기대되는 역할 모델이 달라 그것이 다른 형태로 표현되는 것이라 주장한다.
 
말하자면 남아들의 경우 직설적으로 너 이런 행동 하면 나 기분 나빠! 하고 말하거나 더 나아가서는 주먹질 등 직접적인 공격을 하고 문제를 해결하고 푸는데 반하여 여아들은 놀이에서 배제하거나 상대의 험담을 하는 방식으로 표현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여자아이들이 어려서부터 남아에 비해 폭력적인 행동에 대해 더 강한 제재를 받고 자라면서, 그런 행동을 좋지 못한 것, 이를테면 원시적이며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고, 따라서 본인을 포함하여 상대가 그런 행동을 하면 오히려 이상한 아이로 생각하고 더 피하게 되는 어떤 순환의 과정이 녹아 있다.
 
한편으로는 이 모든 것은 단순히 여아가 남아보다 정서적으로 더 빨리 성숙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 같기도 하다. 예를 들어 집단에서 누군가를 따돌리거나 특정인을 험담하는 행위는 여성들 사이에서는 연령에 관계없이 발생하지만 남성들 사이에서는 성인이 된 이후에 본격적으로 발생한다. 남성들 사이에서도 따돌림이 발생하고, 그룹에서 누군가를 배제시키는 행위도 빈번하게 일어난다. 다만 해당 행동은 이미 ‘여성적인 것’으로 규정되어 있기 때문에, 여성들의 경우에는 당연한 것이 되고, 남성들의 경우에는 예외적인 케이스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주변을 살펴보면 누군가를 주도적으로 따돌리는 남성, 거기 가담하는 남성들의 모습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말하자면 공격성을 직접적으로 표출하는 대신 은밀하고 간접적인 방식으로 드러내는 게, 더 ‘비열한’ 방식이 아니라, 보다 고차원적이고, 더 복잡한 방식이라는 이야기다. 사회성과 지능이 진화할수록 공격은 더 은밀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여아들이 어린 시절 뒤에서 친구들을 따돌리고 배제하는 것은, 여자아이들이 남아보다 더 못되고 사악해서라기보다는 그만큼 사회성과 정서적 능력이 더 발달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말해두지만, 이것이 옳은 방식이라는 뜻은 아니다.)
 
또한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여성들의 지배욕과 권력욕이 어쩌면 사람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남성보다 훨씬 더 강할지 모른다는 그런 생각을 했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여자아이들 사이에서의 따돌림은 같은 형태로 발생하는 경우가 드물다. 한 명씩 번갈아서 따돌림을 당한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룹의 리더 격이었던 아이가 다음날에는 친구도 없이 혼자 앉아 밥을 먹게 될 수도 있다. 책은 이와 같이 따돌림에 가담하고 따돌림을 당하고 하는 과정들이 여자아이들 사이의 권력 투쟁 과정이라 말한다. 남자아이들이 주먹싸움을 하는 것처럼, 여자아이들은 여론을 조종하고, 무리를 휘두르고, 권력을 움직이는 방식으로 다툼을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결국 남자아이들 사이에서 서열이 일단 한 번 정해지면 큰 변동이 없는데 반해 여자아이들은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을 반복한다는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한편 여자아이들이 서열관계 자체를 남성들보다 더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어쩌면 권력욕이 강한 것보다 평등한 관계를 지향하는 경향이 보다 강한 것일 수도 있겠다.
 
책은 이처럼 여자아이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폭력의 양상을 다양한 인터뷰를 통해 심도 있게 분석하며, 어린 시절의 경험이 그들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끼쳐는지를 보여준다. 이 외에도 괴롭힘을 당했던 것뿐 아니라 괴롭힘을 가했던 사람 역시 트라우마에 시달린다는 것, 궁극적으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했던 행위가 사실은 자신을 망칠 수 있다는 것을 포함하여, 갈등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좋을지, 실제로 따돌림을 당했을 때의 무력감 등에 어떤 방식으로 대처하면 좋을지 등 소녀들의 사회관계 관련 다양한 케이스를 제시하고 있어서 여자아이를 기르는 부모들이라면 상당히 도움이 될만한 내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여자아이를 기르지 않더라도, 사회학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그 자체로 매우 재미있는 책이다.
 
다만 유익하고 흥미로운 내용에 반해, 책의 논지가 전반적으로 다소 중언부언한다는 점은 많이 아쉽다.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기 때문에, 술술 넘어가는 전반부에 비해 읽을수록 책장이 더디게 넘어간다. 이는 저자의 문제일 수도 있고, 편집 과정의 문제일 수도 있고. 이 책을 읽으실 분들은 영화 <우리들>과 같이 보기를 추천한다.


⭐️⭐️⭐️⭐️ 열 살짜리 멜라니는 카야에게 화났다고 말하지 못한 이유를 집단 토의에서 설명다.
“그렇게 못 해요!” 멜라니가 소쳤다.
“왜 못 지?”
“우리 학교에는 정말 예민한 아이들이 있는데요, 그런 말을 하면 울음을 터뜨릴 거요.”
“네 감정을 알려주는 거잖아.” 나는 어떤 이유든 필했다.
“그 애가 마음에 상처를 입잖요.”
“네가 정말 무지무지 화났을 때는?” 그러자 몇몇 아이들이 킥킥렸다.
“가끔은 말하기도 하지만, 그냥 가만히 있어요.” 멜라니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나중에 화낼 기회가 있을 거라고 덧붙였다. “아니면 다른 아이한테 가서 말하는 거죠. ‘있잖아, 카야 때문에 화나서 미치겠어. 그 애가 나한테 이런 말을 했거든.’ 이렇요.”
“하지만 왜 직접 말하지 않니? ‘너 때문에 화났어.’ 이렇게 말야.”
“왜냐하면요.” 멜라니가 나를 조심스럽게 쳐다보았다. “그 애랑 또 놀고 싶으니까요.”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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