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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혜 Oct 14. 2018

위대한 소설가가 지루한 자서전을 쓴 이유

필립 로스의 <사실들>을 읽고




필립 로스의 <사실들>을 읽었다. 필립 로스는 현대 미국 문학의 대가 중 한 명으로, 포크너 상을 비롯한 많은 권위 있는 상을 수상하였으며, 소설 속에 자전적 요소를 많이 넣기로 유명하다. 뭐, 원래 소설이란 것이 자전적 요소를 포함하지 않고선 쓰여질 수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사실들>은 올해 심장마비로 사망한 그가 50대 무렵 펴냈던 유일한 자서전이다.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필립 로스는 대학에 진학한 뒤부터 본격적으로 문학을 공부하고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타고난 재능 덕에 상당히 이른 나이에 작가로 데뷔하고 작품성 또한 인정받는데, 소설가라는 점을 제외하고선  전반적으로 매우 평범한 인생이다. 대학에 가고, 대학원에 가고, 누군가를 만나고, 같이 살고, 헤어지고, 취직을 하고, 새로운 이를 만나고, 이사를 가고, 결혼을 하고, 이혼을 하고.

실은 이전까지 필립 로스의 책을 읽어본 적이 없다. 따라서 작가의 실제 인생과 소설 속 자전적 요소를 비교해보며 반가움이나 친숙함을 느낄 여력이 없었던 것에 더하여, 그가 의도적으로 드라마성을 억누르고 ‘사실들’을 건조하게 기술한 덕분에 이 자서전은 처음 읽을 당시 엄청나게 지루하게 느껴졌었다. 복잡한 구조의 문장과 현학적인 문체 또한 익숙해지기 쉽지 않았다. 그러하다보니 나중에는 도대체 내가 왜 이 재수없고 잘난척하며 거만한 인간의 지루한 성장사를 읽고 있나 싶은 마음까지 들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깨달았다. 그가 모든 것을 건조하게 낱낱이 기술하는 이유를. 적나라하게 자신에 대해 드러내는 이유를.

소설가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두 자기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자신의 경험과 생각은 남들이 볼 때는 머리속에서처럼 대단한 것이 아니다. 대개의 경우 너무 시시하거나 평범하거나 지루하거나 부끄러운 이야기이기 마련이다. 예를 들자면 어떤 노래를 듣고 내가 느끼는 아련한 추억과 그리움의 감정들은 밖에서 볼 때는 그저 흑염룡에 심취한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내부에 있는 그 감정을 전달하고 공유하고 싶은 욕구는 결코 사라지지 않고, 간단한 말로는 전달될 수 없기에, 결국 이야기로서 재탄생시키게 된다.

문제는 소설을 통해 간접적으로 풀어낸 이야기들은 결국 간접적인 해소의 경험밖에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당사자인 필립 로스 또한 책의 첫머리에서 말한다.
“사실 10여 년 동안 자네(주커먼: 필립 로스 소설 속 주인공으로 작가의 분신과도 같은 존재)에 대한 긴 소설 두 편을 쓰다보니 나 자신을 소설화하는 것에 신물이 나고, 내 경험과 비슷하면서도 더 강력한 유인성을 발휘하는 경험을 지닌 존재를, 나 자신의 삶보다 더 활기차고 열정적이고 재미있는 삶을 이끌어내는 노력에 지친 것이라고 볼 수 있네. 정작 나 자신은 혼자 방에서 타자기 앞에 앉아 아주 재미없게 시간을 보낼 때가 많았으니까.
나는 스스로 정한 규칙들, 나의 일종이자 나의 것의 투영인 대리자에게 어떤 일이 나에게 일어난 그대로와는 다르게 일어나거나, 내게 일어난 적 없거나 내게 일어날 수 없었던 일들이 일어나는 것으로 상상해야 하는 규칙들로 인해 고갈되었네.”

이 지점에서 지루하고 평범하기 짝이 없던 그의 자서전은 다시금 흥미로워진다. 그가 자서전을 쓴 동기와 이를 통해 해소하고 싶었던 욕구는 무엇인가.


그의 자서전을 읽다보면 유대인으로서의 자부심과 자기혐오가 복잡하게 결합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고유의 역사를 가졌으며, 그로 인한 폐쇄성 및 배타성을 지니고, 또 다시 누군가로부터 배척을 받거나 혐오의 대상이 되는 유대인 집단을 그는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는 동시에 많은 순간 역설적으로 자부심을 느끼는 모습을 보여준다. 혐오와 애정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것이다. 그와 진지한 관계를 맺었던 여성 중에 유대인이 없었다는 점 또한 그의 이러한 면모를 잘 드러낸다.

그가 자신에 대해 적나라하고 건조하게 기술하는 점은 책 속에서 여성을 대하는 그의 태도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는 여성들에게 계산적으로 접근한 뒤 그들을 취하고, 자신의 욕구를 채우면 다시 떠난다. 대단히 무책임하고 이기적이다. 그의 이러한 패턴은 나중에 아내 조시에 의해 좌절되는데, 그래서인지 아내를 대상으로 하는 부분들은 특히나 지독하게 자기 변명적이고 자아도취적으로 쓰여 있다. 그런데 그렇게 보이는 것을 필립 로스 자신이 몰랐을 리가 없고, 스스로의 그런 모습까지도 가감없이 드러내 보이려는 일종의 시도였다고 생각된다. 조시와의 결혼생활은 그에게 정신적으로 매우 피폐한 영향을 주었는데, 그러면서 그녀와의 관계로 인해 뒤틀리거나 엉망이 되었던 자기 자신에 대한 풀리지 않는 욕구를 계속 간직하고 있었을 것이다.

결국 자전적 요소를 통해 풀어낸 수많은 작품을 그대로 두고, 지극히 재미없고 평범한 자서전을 그가 다시 집필하게 된 까닭은 그러한 ‘사실들’을 낱낱이 파헤치고 그 안의 자신을 본격적으로 직시함으로써 자기 안의 욕망을 해소하기 위한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심증은 책의 종장부에 주커먼(필립 로스 소설 속 주인공)이 등장하는 장면에서 더욱 굳어진다. 주커먼은 필립 로스에게 쓴 편지에서 나약한 소리 하지 말라며, 질질 짜지 말라고 이야기하는데, 주커먼의 창조주는 실은 필립 로스이므로 스스로도 자신의 지루하고 오만하고 건방진 개새끼적 면모를 인식하고 있으며 그럼에도 그것을 의도적으로 독자에게 드러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아마 그것을 통해 과거의 자신의 이해할 수 없었던 행동이나, 뒤틀렸던 관계나 욕망의 수수께끼를 해소하고 싶었을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처럼 스스로에게조차 지독하게 분석적이고 극도로 상세한 현미경을 들이대는 그이지만, 여전히 객관적이지 못한 부분이 남아있기도 하다는 것이다. 몇 번이고 반복해서 왜 좀 더 자기도취적이 되지 못하고 그토록 철저하게 분석적이냐며 스스로를 질책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글을 통해 만난 필립 로스는 내가 보기엔 그 누구보다도 자기도취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생각해보면 스스로를 분석하고 뜯어보려는 그 시도 자체가 자아도취적일지도 모르겠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이해하고 싶다는, 자기 자신마저 분석하고 풀어내며 낱낱이 이해하고 싶다는 욕망. 문득 작가 중에 자기도취적이 아닌 사람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동시에 자기혐오가 없는 작가도 없을 것이고. 자기혐오와 자기도취는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기 때문에.



“나는 자기혐오가 꼭 의식적이진 않을지라도, 식별 가능한 집단적 표시들에 대한 내면화된 증오이며, 그 표시들을 지우기 위한 거의 병적인 노력이나 그런 노력을 할 정도로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악의에 찬 경멸에서 정점을 이룬다는 사실을 곧 깨닫게 되었다.”

“조시의 매력처럼 미묘한 그녀의 아름다움은,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무신경한 세속성을 지니고 있었다. 조시의 매력에 소도시라는 도장이 찍혀 있었듯이, 그녀의 외모에는 특권이라는 지워지지 않는 도장이 찍혀 있었다. 두 여자는 더 다르기가 힘들 정도로 다른 사회적 배경을 가진 철저하게 상이한 육체적 타입들이었고, 같은 여성이었지만 서로 다른 성을 대표하는 것처럼 달랐다. 그들 각자의 타고난 성향들은 그들의 사회적 태생 속에서 선천적인 장애를 만드는 무언가에 의해 전형적인 극단에까지 이른 듯했다. 그리하여 노동자 계급 낙오자의 딸 조시는 퉁명스럽고, 공격적이고, 불만과 시샘과 분노에 차 있고, 교활하게 기회주의적이었던 데 반해, 메이는 수년간 스스로를 거의 질식시킬 듯한 예의바름이라는 상류층 신부 학교의 허울 뒤에 자신의 불확실성들을 숨겼다. 그들의 공통점은 그들의 가장교육을 지배한 사회적 사고방식에 상처를 입고 흉터를 지니게 된 것이었고, 내가 그들에게 끌린 건 (그리고 그들이 내게 끌린 것도) 그들이 자기 혈통을 잘 나타내는 존재로서 아버지의 세계에서 확고히 자리를 잡고 있어서가 아니라 그들의 외모에 너무나도 선명하게 새겨진 미국사회의 바로 그 계층에서 흥미롭게도 멀어져 있어서였다.”

<주커먼이 필립 로스에게 쓴 편지에서>

“말미에 이 편지를 싣는 것도 두 마리 토끼를 다 집기 위한 자기방어적 수법이고. 난 이제 심지어 그가 허수아비로 세운 사람이 그와 나 중 누구인지도 확신이 없소.”

“서술이 얼마나 진실에 가까운가? 자신의 동기를 숨기고 있는 작가가 자기 행동과 생각을 제시하는 것은 상황의 본질을 드러내기 위함인가, 아니면 말하지 않기 위해 말하는 식으로 무언가를 감추기 위함인가? 어찌 보면 말하지 않기 위해 말하는 건 우리가 늘 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지만, 개인 사가는 위조하고 왜곡하고 부인하고 싶은 평범한 충동에 최대한 저항해야 마땅하지. 여기 있는 자네는 진짜 ‘자네’인가 아니면 쉰다섯 살의 자네가 독자들에게 보이고 싶은 모습인가? (....) 이 모든 조작은 진실로 무의식적인 것인가, 아니면 무의식적인 것처럼 꾸민 것인가?”

“현상태에서의 자네는, “아무도 나를 이해하거나 나의 커다란 가치를 알지 못해 - 진짜 내면의 내가 어떤지 아무도 몰라!”라고 소리내어 웅얼거리는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못할 게 없네.”

“자넨 (이 책에서) 불만들을 넌지시 빗대어서만 이야기하고 심지어 아버지와의 갈등도 지엽적으로 처리하지. 소설 속에서는 슬픔과 비판, 반감, 풍자, 소원함이 너무도 강력하게 표현되었는데 말일세. 그렇다면 자네가 어디에서 보인 태도를 믿어야 할까? 소설일까, 이 책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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