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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혜 Oct 15. 2018

그들에게는 내일이 없다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를 읽고






박상영의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를 읽었다. 1988년생 박상영 작가의 첫 소설집으로 2018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에 동명의 단편 소설이 실렸었다.

몇 주 전에 해당 단편 소설을 읽었는데, 웬만하면 중박 이상은 하는 젊은작가상 수상작들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놀라울  정도로 사실적인 묘사, 지극히 찌질한 루저들임에도 자기 연민이나 감정의 과잉이 전혀 없는 등장인물, 그리고 아주 뛰어난 유머감각. 너무 잘 쓴 나머지 읽고난 후 질투로 이글이글 타오를 정도였다. 그래서 안그래도 소설집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내가 아주 좋아하는 이기호 작가와 정이현 작가가 이번 그의 첫 소설집을 극찬한 것, 그리고 최근 그의 ‘열풍’이 분다는 이야기까지 나오는 것을 보면, 그를 보고 감탄한 사람이 나뿐만이 아니었나 보다.

그의 이야기들을 읽다보면 세대가 바뀌었다는 게 실감이 난다. 마치 오래 전 김영하 작가 작품을 읽고 놀랐을 때처럼. 주로 20-30대인 그의 인물들은 돈이 필요하면 고민 없이 성매매를 하고, 즉석만남 앱을 통해 섹스 상대를 물색하고, 애인을 놔두고 다른 사람과 아무렇지 않게 잠자리를 하거나, 노래방이나 술집에서 리모콘이나 탬버린 등을 훔친다. 그냥 그렇게 하루 하루를 즉흥적으로 살아간다.

얼핏 들으면 도덕도 규칙도 윤리도 없고 그저 섹스에 미친 사람들 같겠지만, 그가 그리는 인물들의 ‘난교’는 오래전 엑스세대나 오렌지족이 부상하던 시대의 그것과는 좀 다르다. 그 당시의 섹스가 어떤 강렬한 자극과 세기말적인 감성을 돋보이게 하려는 소재였다면, 박상영이 그려내는 섹스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니다. 마치 밥을 먹거나 화장실을 가는 것처럼 대수롭지 않은 행위이다. 자극을 위한 것도, 일탈을 위한 것도, 숭고한 사랑을 위한 것도 아닌 그저 섹스일 뿐이다.

또한 등장 인물 대다수가 죽을 시도를 한 적이 있거나 죽고 싶어하며,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는 듯이 행동한다. 그들에게는 내일이 없다. 미래도 없으며, 희망도 없고, 신뢰도, 사랑도, 돈도 없다. 그들을 위로하는 것은 기껏해야 술이나 인스타그램의 하트 정도이다. 일례로 남자친구에게 촬영을 간다며 말하고 젊은 애인과 해운대로 놀러간 ‘나’는 애인을 방에 두고 욕조에서 자살하려고 물을 받다가도 셀카를 찍은 뒤 #해운대 #거품목욕 의 해쉬태그를 붙여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한다.

이 소설집에 실린 이야기들을 읽으며, 신파나 작위적인 설정이 빠진 리얼한 퀴어이야기에 감탄하기도 하고, 인스타 문화 등을 메타리얼리즘 수준으로 잡아내는 실력에 놀라기도 했다. 지금의 젊은 세대(90년대 이후의 출생 세대)가 느끼는 좌절감이나 절망감 또한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세태를 포착해내는 소설이란 훌륭하다. 그런데 실은 그런 세태를 포착하는 예리한 감각보다 더 좋았던 것은, 그의 소설이 결코 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애란이나 최은영의 소설은 아주 착하다.) 등장인물들은 착하지 않고, 동정할거면 돈이나 주라는 듯 냉소적이며, 자기연민처럼 끔찍한 것은 없다는 듯이 행동한다. 그것이 좋았다.

<부산국제영화제>

“아침에 식욕억제제 먹는 것을 빼먹은 탓인지 곧잘 넘어갔다. 약간의 죄책감이 느껴졌지만 견과류가 많이 함유되어 있어서 괜찮을 것이라는 합리화를 하며 마음을 달랬다. 태혁이 호떡 먹는 내 모습을 찍어주었는데 턱이 두 개로 나와 다시 찍으라고 명령했다. 그래도 예뻐요. 라고 하는 태혁의 목소리가 담겨 소리를 지우고 동영상을 업로드했다. #남포동 #씨앗호떡”

“지겹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망쳐버렸을 땐 상대방 탓을 하며 도망쳐버리면 그만이었는데, 내가 나에게서 도망칠 수는 없었다. 그것만큼 절망적인 일은 없다.”

<조의 방>

“스무 살부터 일을 하면서 깨달은 단 하나의 진실은 노동은 언제나 어느 정도의 비참함을 수반한다는 것이었다. 더 많은 돈을 위해 더 많은 수치를 견디는 건 세상의 이치였다.”

<햄릿 어떠세요?>

“실패는 인간을 성숙하게 한다.
개소리다. 실패는 인간을 한껏 구겨지고 쪼그라들게 만든다. 날카로운 끄트머리로 살갖을 찢어 낱낱이 해부해버린다. 보지 않아도 될 내장 속 시꺼먼 부분까지 기어이 들여다보게 만드는 것이 실패라는 경험이다.”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

“공자의 말처럼 즐길 줄 아는 자기 진짜 성공을 하는 것이라면, 왕샤는 스타가 됐어야 했다. 즐기는 사람은 그저 즐길 줄 아는 사람일 뿐이고 잘하는 사람은 그저 잘할 뿐이며, 정작 잘되는 사람은 따로 있다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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