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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혜 Oct 18. 2018

여자가 축구를 한다고???

김혼비의 <우아하고 유쾌한 여자 축구>를 읽고




김혼비의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를 읽었다. 아마추어 축구팀에 입단한 여성이 1년간 겪었던 에피소드를 풀어놓은 에세이로 말 그대로 축구하는 여자들의 이야기다.

나는 축구를 싫어한다. 싫어한다고 해서 혐오의 감정은 아니고, 극도의 무관심에 더 가깝다. 국가대항전이 있을 때도 시합 자체를 열심히 본 적이 거의 없다. 경기의 승패 정도에만 관심이 있었다. 오래전 축구를 매우 좋아하던 구남친이 이런 나를 두고 축구를 좋아하게 만들려고 갖은 노력을 기울였던 적이 있지만, 그 많은 시합을 보면서 내가 느낀 것은 오로지 페르난도 가고와 필리포 인자기가 잘생겼다는 것 뿐이었다. 그처럼 아웃오브안중인 축구에 관한 이야기인지라 여기저기서 무척 재미있다는 평을 듣고 일부러 집어왔음에도 선뜻 손이 안가 한참동안 표지만 뚫어져라 바라보았던 책이기도 했다.


(참고)

페르난도 가고와 필리포 인자기



그러나 일단 한 번 펼쳐서 읽기 시작하니 멈출 수 없을 정도로 재미있었다. 본래부터 축구를 좋아했던 저자 본인은 그렇다치고, 같은 팀에 있던 언니들(이라고 쓰고 아주머니들이라고 읽는다)은 왜 축구를 시작했는지, 축구를 시작하고 배우는 과정에서 어떤 갈등이 있었는지, 어떤 기쁨을 느끼게 되었는지, 그러면서 삶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등이 차곡 차곡 풀어져 나오는데, 각각의 에피소드들 자체도 흥미롭지만 글쓴이의 찰진 드립력과 더불어 엄청난 필력이 내용을 더욱 돋보이게 해준다. 축구에는 관심도 없고 지식도 없는 내가 보아도 술술 넘어갈 정도로 유쾌하고 호쾌한 이야기들이었으니,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이 읽으면 아마도 훨씬 더 큰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재미와 유쾌함 이외에도 이 책이 특별히 좋았던 점은 “페미니즘”이라는 어떤 딱지나 거창한 명제 없이도 자연스럽게 페미니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실은 나 역시도 부끄럽지만 “여자 축구”라는 말을 듣고 초반에 깜짝 놀랐던 것이 사실이다. 축구를 좋아하는 여성들이 있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직접 나서서 할 정도로 열중하는 이들이 그렇게나 많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했었다. 일종의 성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은 여자는 스포츠를 싫어하고 축구를 못한다는 편견을 몸소 운동장을 뛰어보이며 뒤집고, 같이 축구하는 입장임에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얕잡아보고 맨스플레인을 하는 아저씨들의 콧대를 실력으로 납작 눌러주기도 하며, 임신과 출산으로 떠나게 되는 팀원과 헤어지는 과정에서의 안타까움을 그려냄으로써 왜 아마추어 남성팀의 연령대는 고루 분포해있는 반면 여성팀은 자녀가 없는 20-30대 여성이나 자녀가 다 자란 40-50대 여성으로 양극화 되어있는지, 왜 여성들은 애초에 남성만큼 축구에 관심이 없는 것인지 등에 대하여 생각하게 해준다. 편견에 대해 화를 내거나 원망하는 것으로만 끝나지 않고 직접 행동하며 그것을 뒤집고 변화시키는 사람들의 모습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즐겁고 신났다. 페미니즘 역시 즐겁고 유쾌할 수 있다는 점을 큰 틀에서 보여준 것 같아 왠지 읽는 내가 더 뿌듯해지는 그런 책이었다.



“그랬다. 어떤 욕망을 이길 수 있는 건 공포가 아니고 그보다 더 강렬한 다른 욕망이었다. ‘축구를 잘하고 싶다.’라는 중요한 목표를 받쳐 줄 ‘축구를 잘할 수 있는 몸’에 대한 욕망이 무럭무럭 자라 기존의 욕망들을 압도했다. 그 어떤 종류의 몸보다도 두 시간을 전력으로 뛰어도 지치지 않고, 상대 팀 선수들의 강한 압박 수비도 다 버텨 내는 “힘들어 죽겠어도 다리가 ‘지절로’ 앞으로 막 가”는 몸이 갖고 싶었다. ‘예쁜 머리’보다는 ‘편한 머리’를, ‘예쁜 몸’보다는 ‘강한 몸’을 갖는 것으로. 몸과 축구 사이에 다른 욕망이 끼어들 틈이 없는 완벽한 일대일 맨투맨의 관계처럼.” - p.155

“신체 조건상 남자 축구에 비해 힘과 속도가 떨어지는 건 사실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 여자 축구만의 독특한 색깔이 나온다. 남자 축구는 뭔가 휙휙 재빠르게 지나가 버리는 느낌이라면,(물론 그게 또 재미지만) 여자 축구는 ‘상대적으로’ 느리고 정적인 몸동작과 전개가 선수들과 공이 만들어 내는 축구의 전체적인 그림을 좀 더 명확하기 보여 준다.” - p.210

“다들 정말 못 말리겠다. 아마추어 여자 축구가 있는지 없는지, 여자들이 축구를 좋아하는지 아닌지에 전혀 관심 없는 세상의 곳곳에서 축구에 푹 빠진 여자들이 축구를 시작하고, 축구를 시작하게 끌어 주고, 축구를 하다가 다치고, 힘겹게 재활하고, 그래 놓고 또 기어들어 오고, 축구를 못 해서 병이 나고, 축구를 공부하다 못해 심판 시험 준비를 시작하고, 축구를 좀 더 잘해보겠다고 누가 시키지도 않는데 매일매일 연습을 한다.” - p.247

“들어갈 수 있는 축구팀을 찾고도 막상 팀이라는 일종의 ‘조직’에 들어가는 게 내키지 않아 당일 아침까지도 고민하고 주저했던, 오랜 세월 ‘인간은 안 모일수록 좋다.’라고 내심 생각해 오던 ‘초개인주의자’가 축구에 푹 빠지기까지 1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 p.267


“일상에서 개인이 편견에 맞서 할 수 있는 운동이라는 건 결국 편견의 가짓수를 줄여 나가는 싸움이 아닐까.” - p.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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