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승혜 Jun 12. 2019

어느 우익 청년 탄생기

<구월의 이틀>

가끔 열혈 활동 중인 우파(?) 청년들을 보면 궁금해지곤 했다. 저이들이라고 처음부터 저러진 않았을 텐데, 대체 왜 저러는 걸까. 무슨 생각으로 저러는 걸까. 요즘 세상에 자꾸 좌파가 어쩌고 저쩌고 빨갱이가 어쩌고 저쩌고 북한이 어쩌고 저쩌고. 대체 뭘 읽고 뭘 보고 무슨 생각을 하면 저렇게 되는 걸까.

장정일의 <구월의 이틀>은 나와 같은 궁금증을 가진 이들에게 괜찮은 답안이 될 수 있다. 장정일 작가는 대학에서 문학 수업을 할 때 매번 첫 시간이면 학생들에게 류시화 시인의 시인 <구월의 이틀>을 낭독해주었다고 한다. 이 시는 한 사람의 일생에 엄청난 변화를 끼칠 수 있는 단 이틀에 관한 내용이다. 그러던 차에 같은 이야기를 수업을 듣는 학생뿐 아니라 좀 더 많은 사람을 대상으로 하고픈 욕구를 느끼고 결국 이 소설을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구월의 이틀>은 두 남학생의 성장 소설이다. 운동권 아버지와 억척스러운 어머니 밑에서 성장한 광주 출신의 금, 걸핏하면 사업을 말아먹는 아버지와 허영심 있는 어머니 밑에서 성장한 부산 출신의 은. 두 주인공의 가족들은 각각 아들들의 대합 합격을 빌미로 서울로 올라와 생활하게 된다.

서울로 올라오는 휴게소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금과 은 두 사람은, 학교 교양수업시간에 재회한 이후로 자연스럽게 가까워진다. 재미있는 것은 잘생기고 훤칠한 용모를 타고난 데다가 태생적으로 활발하며 적극적인 금이 점점 더 진보적인 가치관을 갖게 되는데 반하여 병약한 문학소년이었던 은은 가족과 주변인들의 영향을 받아 더욱 보수적인 정치관을 확립하게 된다는 것이다.

금과 은 둘 다 비슷한 비중으로 등장하는 주인공이기는 하나, 정치적인 의견을 피력하는 비중에 있어서는 가히 은 쪽이 압도적이다. 타고난 문재를 바탕으로 세상에 대한 관찰력과 세태를 파악하는 능력을 지닌 은은 어느덧 대학생 우파 단체의 간부급으로까지 성장한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가치관과 인식에 대한 열변을 토로한다. 그가 어찌하여 그런 시각을 가지게 되었는지, 그 배경에는 누가 있었는지, 그는 지금 현재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하여 소설은 말 그대로 ‘어느 우익 청년의 탄생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장정일 작가는 전통적인 우파인 ‘올드라이트’는 일제와 독재에 부역한 죄가 있고, ‘뉴라이트’는 386세대에 대한 복수심에 사로잡혀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그러한 굴레에서 벗어난 많은 청년들이 ‘퓨어 라이트’가 되어 진정한 보수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책을 썼다고 밝힌 바 있다. 그리고 그러한 이유로 “아니 작가가 되어서 어찌 감히 청년에게 우파가 되란 말이오!!!”라고 엄청난 비판을 들었다고도 하는데,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책을 제대로 읽지 않은 것이 틀림없다.

중요한 지점은 이 ‘보수적인’ 세계관을 가진 은이라는 캐릭터가 단순히 요즘 희화화되어 자주 거론되곤 하는 ‘애국보수’들이나 ‘극우’ 집단과는 사뭇 성격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는 말 그대로의 ‘보수’를 꿈꾼다. 요즘처럼 변질된 의미가 아니라, 전통적인 것을 지키고 옹호하며, 변화보다는 안정을 추구하는, 사회의 무게추와 같은 역할을 하는 이들 말이다. 종종 사회 문제를 논하면서 ‘저는 보수적인 사람이라서”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보이는데 여기에서 은의 ‘보수’는 그들의 보수에 가깝다.

그런 면에서 요즘과 같은 변질된 의미가 아니라 진정한 의미로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가치관을 지닌 청년들이 늘어나는 것은 좋은 일일지도 모른다. 물론 소설을 읽으면서 끊임없이 등장하는 보수 집단에 대한 조롱과 조소를 보다 보면 장정일 작가가 본인의 말처럼 은과 같은 ‘퓨어 라이트’가 생겨나길 진심으로 바랬는지부터가 사실 의문이긴 하지만 말이다.

이 소설은 성장소설이며, 분류학적으로 말하면 ‘근현대 역사’ 소설이기도 하다. 소설 속에서는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된 2002년부터 이라크 파병에 이르기까지 사회 정치적인 상황이 촘촘하게 묘사된다. 일제시대나 70-80년대 독재정권을 다룬 소설은 많았으나 2000년대 이후의 정치적 상황을 다룬 소설이 거의 없었다는 점에서 그러한 부류의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흥미롭게 다가올 내용이다.

다만, 아쉽게도 소설의 매우 결정적이고 중대한 흠이 있는데, 설정상 1984년생, 03학번 연세대학교 학생들이 틀림없는 두 주인공이 말투나 생각을 보면 마치 80년대, 아무리 잘 봐줘봤자 90년대 학번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수업시간에 처음 만난 금과 은은 서로를 금형, 은형이라고 부른다. 만약 실제 03학번이 서로를 저런 식으로 불렀다가는.... 음...

또한 주인공 은은 미시마 유키오를 모델로 한 것이 틀림없는데(병약하고, 신체에 콤플렉스가 있고, 동성애자), 이 은이 친구인 금에 대하여 갖는 감정은 그렇다 치고, 금이 느닷없이 은에게 감정을 느낀다는 지점이 너무 뜬금이 없다는 것이다. 무슨 의도로 그런 건지 알 수는 없지만 개연성도 없고 오히려 소설의 완성도를 해치는 요인이라고 느껴졌다. “지금까지 널 사랑했어!” “사실은 나도야!!!” 이게 뭐냔 말이다. 할리퀸 로맨스도 아니고.

03학번이 93학번처럼 말한다는 것, 그리고 느닷없이 막판 전개가 트와일라잇 느낌이 된다는 것을 제외하면 흥미롭고 재미있는 소설이었다.


⭐️⭐️⭐️ “아까 왜 우셨어?”
그러자 거북 선생은 다시 울음을 터뜨릴 듯이 입을 삐죽거다.
“음, <마태수난곡>을 듣고 있다 보니, 예수님이 당하신 수난이 꼭 내가 당한 수난 같아서 그만 눈물이 복받쳤지. ‘빨갱이’들한테 어용이니 회색분자니 하면서 얼마나 당하고 또 당했는지......”
거북 선생의 말을 듣는 순간, 은은 생각다.
‘이 미친 늙은이, 노망도 참 단단히 낫네. 도끼로 정수리를 콱 찍어버릴까 보다. 이런 늙은이들은 대체 언제까지 이처럼 어리광을 부리려는 걸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시절에 좌파는 고문당하고 죽고 그것도 못 당한 사람은 하다못해 감옥이라도 가지 않았나? 그때 이런 노인네들은 호의호식하면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지옥’에 있었을 뿐이면서, 뭐가 그렇게 억울한 것일까? 온통 우파가 권력과 물질을 차지했던 나라에서, 이런 노인들이 좌파 지식인들에게 핍박을 받아봐야 또 얼마나 받았다고? 우파 노인네들이 이처럼 나약해 빠졌으니, 일제 식민지 시기를 얘기할 때도 ‘위안부는 강제가 아닌, 공창이다’, ‘일본 식민 지배는 조선의 축복이다’ 같은 애먼 소리를 해대고 망신살이 뻗치지. 대체 그런 역사관이 강한 것을 지향하는 우파의 입에서 나올 소리인가? 이 노친 세대는 우파라면서 왜 스스로 강해지려고 하지 않는 걸까? 답은 하나야. 이 노친네들은 빨리 죽어야 해. ‘미국이 없으면 우리는 죽는다’고 벌벌 떠는 이런 계집애처럼 나약한 구 우파들이 깨끗이 청소되어야, ‘미국 없으면 어때?’라고 턱을 세우는 진짜 당당한 우파들이 새로 돋아나지. 이 땅에서 ‘좌빨’이나 ‘빨갱이’들을 몰아내려면 그런 신 우파가 빨리 나와야 해. 미국과 동맹을 절연하라거나 반미를 하라는 뜻이 아니라, 미국에 당당한 우파가 나오면 ‘좌빨’들은 저절로 사그라져. 그것도 모르고 주구장창 입을 떼느니 ‘미국이 없으면 우리는 죽는다’고 외쳐대고, 광복절엔 미국 국기를 들고 나와서 꼴값을 떨어대니 ‘좌빨’들에게 말발이 안 서고 무시당하는 거지.
거북 선생의 복받쳤던 울음이나 노망도 어찌 보면 코미디로 제자를 가르치려는 산파술인지 몰랐다. -p.316

매거진의 이전글 책이 너무 많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