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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혜 Jun 14. 2019

전쟁이 남기고 지나간 것들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

일명 ‘페이지터너’라고 불리는 작가들이 있다. 몰입도가 엄청나 페이지가 술술 잘 넘어가고, 순식간에 독자를 이야기에 빠져들게 만든다. 아마 대부분의 베스트셀러 작가들이 여기 해당할 것이다.

한편 소위 ‘문학성’이 높다고 하는 작가들은 페이지 터너인 경우가 드물다. 그들은 드러나지 않은 많은 정보를 행간에 넣고 인물들의 심리 묘사에 신경을 쓴다. 따라서 줄거리의 윤곽이나 인물의 특성을 파악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같은 선상에서 플래너건의 소설을 읽으려면 참을성이 필요하다. 플래너건은 문학성이 뛰어나다고 평가받는 작가 중에서도 유난히 불친절한 편이라고 생각되는데, 초반부터 상당히 많은 인물이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에 대한 일련의 정보가 절대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독자는 책 곳곳에 흩뿌려진 각종 정보를 수집하며 그 맥락과 배경을 적극적이고 공격적으로 파악해야만 한다. 훌륭한 소설이라는 느낌적 느낌을 받으면서도 읽으면서 재미를 느끼기가 결코 쉽지 않은 이유이다.

말하자면 플래너건 소설을 읽을 때는 (그래 봤자 여태 두 권에 불과하지만) 100페이지 정도가 고비라고 할 수 있다. 초반부는 항상 과거와 현재와 그 중간의 어드매가 쉴 새 없이 왔다 갔다 펼쳐지며, 누군지도 모르겠는 인물의 속마음과 심리상태가 상당히 자세히 그려진다. 대체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지 파악조차 어렵다. 페이지 역시 매우 더디게 넘어간다.

그러나 일단 100페이지 정도를 넘어서면, 그때부터 대략적인 그림이 그려지면서 정신없는 흡입력으로 독자를 끝까지 이끌고 간다. 이번에도 비슷해서 초반부 100페이지와 나머지 400페이지가량을 읽는데 거의 비슷한 시간이 걸렸다.

플래너건의 스타일에 대한 건 이 정도로 줄이고,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이것은 그러니까 전쟁 소설이다. 세계 2차 대전 당시 일본군에게 포로로 잡혔던 오스트레일리아 부대원들에 대한, 그들의 지휘관으로 활동했던 주인공 도리고에 대한, 그들을 고문하고 착취했던 일본군들에 대한, 일본군 밑에서 일했던 조선인 부사관에 대한, 도리고가 사랑했던 여인에 대한 그런 것들.

소설은 무엇에도 감흥을 느끼지 못하고 엄청난 여성편력을 보이는 도리고의 상황을 보여주며, 그가 왜 사회에서는 전쟁영웅으로 떠받들어지고, 여성들에게는 인기를 끌고, 부족한 것 없이 지내면서도 끊임없는 허무와 불안에 시달리는지를 추적하는 과정으로 진행된다. 그러면서 도리고가 전쟁 중 겪었던 일들, 그 안에서 만났던 사람들, 사랑했던 여성과의 추억이 등장한다.

어찌 보면 전쟁과 관련하여 늘 있을 수밖에 없는 진부하고 뻔하고 흔한 이야기들이지만, 플래너건은 이를 상당히 고전적이면서도 매혹적인 방식으로 그려낸다. 그러면서 결국은 전쟁이 무엇을 파괴하고 사람들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되는 것이고.

도전정신을 요하는 소설이었으나 아주 재미있게 잘 읽었고 읽기를 잘했다고 생각한다. 다만 <굴드의 물고기 책> 때도 느꼈으나 어디까지나 이건 남자의 이야기란 생각도 들고. 여성혐오니 피씨니 하는 차원이 아니라 그냥 ‘남자’의 이야기. 그러므로 여성 작가들의 글을 읽을 때만큼의 느낌을 받을 수는 없었기도 하다.


하여간 간혹 장난식으로 전쟁 터지면 좋겠다고 가볍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과연 전쟁이 어떤 것인지 알고는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었는데, 책을 읽으며 몇 번인가 더 그들을 떠올렸다. 물론 이런 말을 하는 나도 모른다. 전쟁이 무엇인지. 어떤 흔적을 남기는지.


그저 짐작할 뿐이다.



⭐️⭐️⭐️⭐️



그들은 술을 마시지 않았을 때의 기분이 되려고 술을 마셨다. 전쟁 전 술을 마시지 않았던 시절의 기분이 되려고. 그날 밤 그들은 사나우면서도 온전했지만, 아직 예전 모습으로 돌아가지는 못했다. 그들은 자기들이 겪은 모든 일에 대해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웃을 때면 전쟁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죽은 사람들은 모두 그들의 마음속에 살아 있었고, 그들이 겪은 모든 일은 몸속에서 펄쩍펄쩍 뛰고 있는 그것을 뿐이었다. 그것이 워낙 강하게 펄떡거렸기 때문에 그들은 그 느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또 재빨리 술을 마셔야 했다. -p.405



그가 다시 돌아와서 맞이한 결혼생활은 그가 떠날 때의 결혼생활과 달랐다. 아니면, 그가 다른 사람이 되어 돌아온 것일 수고 있었다. -p.406



뒷좌석의 세 아이는 검댕을 잔뜩 묻힌 채 조용히 앉아서 주위의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숨이 막힐 것 같은 방부제 냄새, 바람과 불길의 포효, 거칠게 흔들리는 차, 열기, 난도질된 고기처럼 생살이 드러난 감정, 사랑하지만 사랑하지 않으며 함께 살아온 두 사람의 고통과 절망, 함께 살면서도 함께 하지 못하는 삶, 애정과 질병과 비극과 농담과 수고로 이루어진 음모, 결혼생활, 기묘하고 무서운 인간 존재의 한없음.
가족. -p.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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