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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혜 Jun 30. 2019

소설을 읽을 때 우리가 기대하는 것들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사람들은 왜 소설을 읽을까. 한때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잊어버리고 싶을 때 소설을 읽는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잊어버리고 싶을 때,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자극적이고 신기한 재미를 느끼고 싶을 때.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목적으로 소설을 읽는다. 나에게는 일어날 수 없는 일들, 내가 결코 경험할 수 없는 세계를 소설을 통해 만나며 얻게 되는 대리만족.

그리고 시간이 조금 더 지난 후에, 사람들은 자신을 잊기 위해서 뿐 아니라, 기억하고 싶을 때 역시 소설을 읽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신이 경험했던 어떤 순간들, 감각들, 그 당시 느꼈던 감정을 되살리고 싶어서, 잊고 싶지 않아서, 혹은 잊고 지나쳤던 것을 다시 떠올리기 위해서. 그래서 소설을 읽는다고.

많은 훌륭한 소설들이 위의 두 가지 범주에 속한다. 나를 잊어버리고 다른 세계로 접속하게끔 만들어주거나, 나의 과거로 연결시켜 잊고 있던 자신의 모습을 다시금 마주하게 만든다. 앤드루 포터의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은 명백히 두 번째에 속하는 소설이다. 나의 과거, 내가 잊고 지내던 어떤 순간들, 있는 줄도 모르던 미묘한 감정들을 상기시키게 만드는 그런 소설.

얼핏 과학서를 연상시키기도 하는 제목의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은 총 10개의 단편이 실려있는 소설집으로, 무려 데뷔작이다. 작가인 앤드루 포터는 이 데뷔작을 통해 미국에서 최고의 단편소설에 주는 플래너리 오코너 상을 수상했고, 평단으로부터는 극찬을 받았다. 문학적으로도 인정받았을 뿐만 아니라 대중으로부터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미국에서는 2008년, 국내에는 2011년에 출간되었던 이 소설은, 많은 해외소설이 그렇듯이 5년여 만에 절판되었다가 성원에 힘입어 올여름 다시 출간되었다.

명성은 익히 들었던 터이지만, 직접 읽어보니 정말로 뛰어난 작품이었다. 아무리 극찬을 받은 작품이라 하더라도, 새로운 작가의 소설을 읽는 것은 마치 새로운 사람을 만나 알아가듯 경계심으로 가시를 바짝 세우고 긴장된 상태로 들어가기 마련인데, 몇 페이지를 채 넘기기도 전에 완벽히 무장해제되어 버렸다. 10개의 짧은 이야기는 모두 우리가 흘려보낸 어떤 순간들을 연상시킨다. 잊고 지내던 어떤 기억들, 분명 무언가를 느꼈지만 그게 무엇인지 인지하지 못했던 어떤 감정들, 잊고 싶었던, 혹은 끝내 잊을 수 없었던 마음들.

10개의 단편이 모두 좋았지만, 굳이 하나만 꼽자면, 역시나 표제작인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이 가장 좋았다. 물리학도인 주인공은 황당하도록 어려운 시험 문제에 기가 질린 동급생들이 모두 떠난 뒤에도 홀로 남아 끝까지 문제를 풀고, 그것을 계기로 교수였던 로버트에게 초대를 받게 된다. 둘은 매일같이 차를 마시며 우정을 쌓아가고, 그러는 사이 주인공에게는 콜린이라는 뛰어난 운동선수이자 전도가 유망한 의대생, 학교의 인기스타인 남자친구도 생긴다. 주인공은 남자친구를 사랑하지만, 동시에 로버트와의 관계에서도 어떤 특별한 감정을 느끼게 되면서 혼란을 느끼고 갈등에 빠진다.

연인을 두고 다른 사람에게 어떤 끌림을 느끼게 된다는 이 흔해빠진 상황을 두고, 이토록 미세한 감정의 결을 포착할 수 있다는 것이, 그것을 이렇게 아름답고 절제된 언어로 풀어낼 수 있다는 것이 정말로 놀라웠다. 한 줄 한 줄 읽는 것이 아까울 정도였다. 일상의 순간을 포착하고 감정을 섬세하게 읽어낸다는 것은 앨리스 먼로나 레이먼드 카버와 비슷하지만, 앤드루 포터의 작품에는 그 둘 보다 조금 더 서정적인, 그래서 연약하고 바스러질 것 같은 느낌이 있었고, 그것이 너무도 좋았다. 물론 다른 두 작가 역시 몹시도 좋아하지만. 이것은 어쩌면 포터가 아직 ‘젊은’ 축에 속하는 작가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나쁜 이야기는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작가에게 의문을 던지게 만들고, 좋은 이야기는 읽으면서 독자가 스스로에게 의문을 던지게 된다는 말이 있다. 훌륭한 소설을 읽을 때면, 어느 순간 소설 속 주인공이 아닌, 나를 생각하게 되어버린다. 나의 시간, 나의 과거, 나의 추억, 나의 감정들. 결국 이 소설을 읽고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어제 새벽 늦게까지 자지 않고 짧은 단편소설 하나를 쓰고 말았다.

읽는 내내 이토록 훌륭한 소설을 읽을 수 있음에 너무나도 행복했던, 그런 아름다운 책, 잊지 못할 이야기들.


⭐️⭐️⭐️⭐️⭐️



나는 이제, 이십 년이나 흘렀으므로, 아버지는 한때 자신이 성취하고자 했던 유형의 명성이 허락될 운명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위대한 영화감독은 그의 몫이 아니었고, 동시대 많은 이들이 누린 뛰어난 재능도 그의 몫이 아니었다. 아버지에게 분명히 있기는 했던 조금의 재능은 단지 좌절의 원천으로만 작용하며, 실현되지 않은 막연한 잠재력을 끊임없이 상기시켜줄 뿐이었다. -p.18, 코요테


다른 사람이 당신을 채워줄 수 있다거나 당신을 구원해줄 수 있다고 - 이 두 가지가 사실상 다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 추정하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나는 콜린과의 관계에서 그런 식의 느낌을 받아본 적이 없다. 나는 다만 그가 나의 일부, 나의 중요한 일부를 채워주고 있고, 로버트 역시 똑같이 나의 중요한 또 다른 일부를 채워주었다고 믿을 뿐이다. 로버트가 채워준 나의 일부는, 내 생각에, 지금도 콜린은 그 존재를 모르는 부분이다. 그것은 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만큼 쉽게 파괴도 시킬 수 있는 나의 일부다. 그것은 닫힌 문 뒤에 있을 때, 어두운 침실에 있을 때 가장 안전하고 제일 편안하다고 느끼는, 유일한 진실은 우리가 서로 숨기는 비밀에 있다고 믿는 나의 일부다.  -p.125,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깨져버렸던 거야. 그녀는 내게 말했다. 이미 깨져버린 걸 어떻게 도로 붙이겠어. 그러나 그녀에게 왜 화를 내지 않았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그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결혼을 깨는 것은 두 사람이야, 허니. 나는 그 두 사람 중 하나였고.” -p.208, 머킨



이 순간 내게 중요한 것은, 그녀가 내게 허락하는 동안 그녀를 곁에 안고, 그곳에 린과 함께 서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우리들은 다만 멀리서 지켜본다. 호세의 입술을, 갑작스레 치몰리는 그의 이맛살을, 아무도 알지 못하는 언어를 말하며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 소통할 수 없는 한 소년을. -p.215, 머킨



삶은 계속되지만 달라졌다. 더 물러졌고, 더 지루해졌다. 즐거움은 덜해졌고 고통은 그 구렁텅이의 깊이가 한없어진 듯하다. 그 구렁텅이로 빠지지 않을까 늘 경계를 해야 한다. 그날 오후 침대에 누워 있으면서 나는 누나가 자신의 삶의 대부분을 그 구렁텅이의 가장자리에서 보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러 빠질 마음을 먹지는 않으나, 그것의 존재로 인해 늘 두려움을 느껴야 하는 구렁. 이제 누나는 마침내 그 안에 빠지기로 마음먹어버린 것 같았다. -p.240, 폭풍



언덕 아래로 아버지의 자동차 전조등 불빛이 보일 때 누나가 미소 짓던 모습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소박한 기쁨처럼 보였다. 그 불빛, 자동차,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집으로 돌아오고 있음을 안다는 그것은. -p.245-246, 폭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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