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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혜 Jul 05. 2019

하루키의 에세이를 읽는 것에 대하여

<장수 고양이의 비밀>

중학생 때 뭣도 모르는 상태에서 <상실의 시대>를 읽었으나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고, 덕분에 하루키는 뭔가 팬시하지만 지나치게 멋을 부리고 가볍다는 편견과 선입견을 갖게 되었다.

그렇게 20년 넘게 생전 들여다보지도 않다가 페친님의 추천으로 2년 전쯤 처음(인 줄 알았는데 알라딘 기록을 뒤지다 보니 사실은 그보다 10년도 더 전에 <빵가게 재습격>이란 에세이를 읽은 것을 알게 되었다)으로 그의 에세이를 읽게 되었는데, 진짜 너무 재미있는 것이다. 그걸 계기로 완전히 좋아하게 되어 그 직후 20여 권 정도를 연달아 읽었던 것 같다.

이후로도 중고서점에 갔을 때 안 읽은 하루키의 책이 눈에 띄면 보이는 족족 사들여서, 현재 우리 집에는 하루키의 책이 상당히 많다. 그런데 그렇게 책장에 꼽아놓고 난 뒤에는 이상하게도 왠지 손이 가질 않았다. 에세이도 그렇고 소설도 그렇고. 사두고 안 읽은 하루키의 책만 한 20권 될 듯. 여전히 좋아하는 마음은 있는데도 참 이상한 일이었다. 서가에 가서 뭘 새로 읽어볼까 고민할 때도 한 번도 눈길을 끈 적이 없다. 따로 의식해본 적은 없었지만, 읽으면 좋으나 안 읽어도 무방한 그런 책들이라고 은연중에 생각했는지도.

오랜만에 하루키의 에세이를 읽는다. 여전히 읽으면 좋고 안 읽어도 무방한 그런 이야기들이다. 나이가 들어 죽기 직전에 병상에 누워 아아.... 내가 그 책을 읽었어야 했는데 하고 후회할만한 책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읽고 있으면 여전히 좋다. 마음이 편해지고 기분이 좋아지면서 안정감을 느낀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소소한 일상의 행복들이 중요한 것처럼, 독서를 할 때도 치명적인 걸작, 영혼을 뒤흔드는 수작들 말고도 이런 소소한 기쁨과 안정감을 주는 글들이 생각보다 훨씬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남들이 보기엔 읽어도 그만 안 읽어도 그만인 책들 일지 몰라도.


⭐️⭐️⭐️


그래도 내가 나이들며 그다지 상처를 받지 않게 된 것은 뻔뻔해져서만은 아니라고 본다. 어느 날을 경계로 ‘이 나이 먹어서 젊은이처럼 정신적으로 상처받는 건 썩 보기 좋지 않다’는 인식이 생겼고, 그뒤로 최대한 상처받지 않는 훈련을 의식적으로 해온 것이다. (...)
물론 나이들어서도 상처받을 일은 얼마든지 있다. 그래도 그 상처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거나 두고두고 곱씹는 건 나이깨나 먹은 사람이 할 일이 아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설령 상처를 받거나 화가 나도 꿀꺽 삼켜버리고 오이처럼 서늘한 얼굴을 하려 애썼다. 처음에는 쉽지 않았지만 훈련을 거듭하는 사이 점점 정말로 상처를 받지 않게 되었다. 물론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문제처럼, 상처를 받지 않게 되었기에 그런 훈련이 가능했던 건지도 모른다. -p.125, 상처받지 않게 됨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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