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서를 거의 읽지 않는다. 역사도 하나의 이야기라는 것을 생각할 때 소설은 좋아하면서 역사를 멀리한다는 것이 얼핏 이해가 가지 않을 수도 있다. 나 역시 그런 스스로가 이해가 가질 않아 곰곰이 생각해본 적이 있는데, 수많은 사건들을 하나의 큰 줄기로 수렴하는 과정에서 인간 한 명 한 명의 개별성과 입체성이 사라진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다. 이를테면 전쟁에서는 승전국과 패전국이 있더라도 승전국의 모두가 승리한 것이 아니고 패전국의 모두가 패배한 것이 아니니까. 물론 나무가 아니라 숲을 보는 게 더 중요할 때도 많지만, 나는 어쨌거나 나무에 더 관심이 많은 사람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논픽션 르포들은 훌륭한 대안이 된다. 사진 속 작품들은 내가 가지고 있는 논픽션 르포 작품들.
1. 속삭이는 사회 - 올랜도 파이시스
추천을 받고 구입했는데 스탈린 시대를 살았던 보통 사람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당시 사회상을 복원하는 작품이다. 알고 보면 세상에 드라마 아닌 삶이 없지만 이 시대 소련 사람들의 삶은 유난히 더 대하드라마 같다.
2.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르포문학(?)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작품. 전쟁을 다룬 많은 작품들이 전장에서 싸운 남자들에게 주로 포커싱을 하는데 반하여 스베틀라나는 전쟁에 참여하였거나 전쟁을 목격한 여성들의 목소리를 담았다.
3. 세컨드 핸드 타임 -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이 역시 <속삭이는 사회>처럼 소련 붕괴 이후 남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아냈다.
4. 내 심장을 향해 쏴라 - 마이클 길모어
하루키의 에세이를 읽다가 존재를 알게 된 책. 하루키는 부인과 편집자로부터 이 책을 읽어보고 번역해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는데, 책을 읽어본 뒤 본래 번역 의뢰는 받지 않는다는 원칙을 어기고 번역에 임하기로 한다. 인생의 가치관을 뒤흔들 정도로 묵직한 충격을 주는 작품이었다고. 저자인 마이클 길모어의 형 개리 길모어는 어느 날 거리에서 무고한 시민 두 명을 쏘아 죽이는데, 이는 사실 사형을 당하기 위해 일부러 벌인 일이었다. 그리고 개리가 그런 일을 벌이게 된 데에는 아주 길고 어두운 가족의 역사가 있었다. 마이클 길모어는 자신의 가족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학대와 폭력의 역사를 낱낱이 고백하는데, 부모 자식 관계나 가족 제도, 인간의 폭력성과 트라우마 등에 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5. 인 콜드 블러드 - 트루먼 커포티
트루먼 커포티가 1959년 텍사스에서 일어났던 실제의 살인사건을 집요하게 추적한 끝에 되살려낸 작품이다. 논픽션이지만 소설과 같은 방식으로 쓰여 있고, 소설과의 차이점은 여기 적힌 모든 일들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인간의 어둡고 연약한 내면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6. 언더 그라운드 + 약속된 장소에서 - 무라카미 하루키
우리나라에도 유명한 일본의 지하철 사린가스 유포 사건을 다룬다. 옴진리교라는 종교 단체가 작정하고 벌인 테러사건으로 하루키는 이 사건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을 취재하여 어느 날 갑자기 예상치 못한 재앙에 노출된 보통 사람들의 삶과, 그들의 내면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에 초점을 맞추어 기록했다.
7. 인간의 조건 - 한승태
사실 내 주변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취직하여 일을 한다. 요즘은 정규직으로 취직하는 것이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렵다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다들 어떻게든 살길을 찾고는 한다. 그러나 그렇게 탈출구를 찾지 못하거나, 혹은 아예 처음부터 가는 길이 달랐던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 무슨 일을 하면서 사는지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미처 몰랐다. 꽃게잡이 배에서부터 주유소, 편의점, 비닐하우스, 돼지 농장, 자동차 부품 공장에 이르기까지 ‘회사원’들이 쉽게 상상할 수 없는 노동의 삶이 이 안에 담겨 있다.
8. 미줄라 - 존 크라카우어
성폭행 사건에 대해서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뉴스나 언론에서 소개되는 자극적인 정보들 속에서 그 사건의 진실에 얼마만큼 근접해 있을까. <미줄라>는 몬태나 대학교에서 일어난 세 건의 강간사건을 바탕으로 성폭행 사건의 발생 후 수사과정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일들, 가해자의 태도, 난항에 빠진 피해자의 심리, 주변의 반응들을 그대로 옮겨 사건을 바라보고 다루는 우리의 태도를 돌아보게 한다.
9. 사형수 오휘웅 이야기 - 조갑제
얼마 전 화성 연쇄 살인 사건의 범인이 잡혔는데, 사건이 일어났던 당시 범인으로 몰려 취조를 받다가 자살하거나 사망한 사람만 해도 여럿이라 한다. 그만큼 당시에 고문수사가 횡행했었다는 이야기다. 1974년 한 남성과 두 아이가 목 졸려 죽은 사건이 발생하고, 경찰은 남성의 아내인 두이분 씨의 내연남인 오휘웅을 범인으로 지목하여 수사를 시작한다. 처음에 자신이 범행을 저질렀다고 자백했던 오휘웅은 후에 재판 과정에서 고문에 의한 강압적인 고백이었다며, 자신은 누명을 쓴 것이라고 피력하지만 사형은 예정대로 진행된다. 두이분은 재판 중 자살한다. 사형수 오휘웅 이야기는 저자가 오휘웅의 주변 인물 및 해당 사건의 기록을 역추적해 나간 기록이다. 그 시절의 고문 수사 과정과 사형제도를 둘러싼 여러 가지 물음을 던진다.
10. 고기로 태어나서 - 한승태
(사진에 없음) 전작인 인간의 조건이 여러 가지 육체노동 그 자체에 포커싱이 되어 있다면, <고기로 태어나서>는 닭, 돼지, 개 농장에서 일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도축산업과 육식 생활, 생명과 죽음에 대한 여러 가지 성찰을 담아낸 르포이다. 단순히 동물들 죽이지 마세요! 혹은 고기 먹지 마세요! 의 차원이 아니라 심도 있고 깊이 있는 물음을 던진다. 작가의 드립력과 문장력도 뛰어나서, 책 자체도 엄청나게 재미있다.
11.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죽음 - 하재영
(역시 사진에 없음) 소설가 하재영이 개 번식장, 유기견 보호소, 개 농장, 개고기 식당 등을 두루 취재하며 한국 개 산업의 실태를 그러 낸 르포르타주. 고기로 태어나서와 어느 정도 통하는 면이 있는데, 개에 좀 더 초점을 맞췄다는 것, 동물권에 대해 생각해보기를 더 강하게 촉구하고 있다는 점이 약간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고백하자면 이 책들 중 완독한 책은 몇 권 되지 않는다. 이야기들 자체는 엄청나게 잘 읽히고 ‘재미있는’ 반면, 저게 소설 속 인물에게 일어난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 존재하는 누군가들이 겪었다는데 생각이 미치면 도무지 페이지를 넘기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마이클 길모어의 <내 심장을 향해 쏴라>는 200페이지까지 읽고 덮어두었는데, 다시 펼 용기가 나지 않을 정도. 언젠가는 읽고 싶지만.
하여간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도,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두루 의미 있게 읽을 수 있는 책들이므로 ‘논픽션 르포’라는 장르로 묶어서 한 번 소개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