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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혜 Nov 12. 2019

무정에세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다. 올해 들어서만도 벌써 여러 번 보았다. 보고 나면 정말이지 사랑스럽고, 행복하고, 따뜻한 기운이 심장에서 시작하여 전신으로 몽골몽골 퍼져나가는 듯한 그런 영화다.

그런데 신기한 점은 그렇게 사랑스러운 영화를 보면서 매번 울게 된다는 것이다. 이번엔 절대 울지 말아야지 다짐했음에도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눈물이 줄줄 흐르고 있다. 슬픈 장면이 단 하나도 나오지 않는데도 그렇다.

사실 줄거리 또한 매우 단순하다.

부모가 이혼하면서 엄마를 따라 외갓집으로 들어가 살게 된 초등학생 코이치에게는 한 가지 소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온 가족이 다시 함께 살게 되는 것. 그러면서 코이치는 외갓집 근처의 휴화산이 폭발하면 아빠와 동생이 사는 옛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때마침 친구들 사이에 돌던 소문 - 양쪽에서 달려오는 열차가 서로 스쳐 지나는 순간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 - 을 듣고 결국 친구들을 이끌고 소원을 빌러 떠난다.

이게 내용의 전부다.

내가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사실 거의 정해져 있는데, 바로 저 기차가 서로 맞닿는 순간 아이들이 소원을 비는 씬이다. 열차의 시끄러운 소음을 배경으로 아이들은 죽을힘을 다해 소리친다. 죽은 강아지가 살아나게 해 주세요. 배우가 되게 해 주세요. 노력하지 않아도 그림 잘 그리게 해 주세요. 아빠 일이 잘 되게 해 주세요. 아빠가 파칭코 좀 그만하게 해 주세요.

이 장면을 볼 때마다 눈물을 참을 수가 없다. 제일 처음은 설거지를 하면서 봤었는데, 비누거품이 묻은 솔을 든 채로 그 자리에 서서 큰 소리를 내며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참으로 드물기도 하고 오랜만이었던 경험. 그런데 사실 그렇게 울면서도 몰랐다. 내가 왜 울고 있는지를. 가끔 그렇게 내 안의 무언가를 건드리는 것들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를 나 자신도 모르는 경우가 있다.

어제 저녁에는 아이들을 데리러 어린이집으로 가는 길에 달이 아주 동그랗고 밝았다. 그리고 밤에 잠이 잘 오지 않았다. 달을 본 것과 잠이 오지 않는 것의 상관관계는 나도 잘 모르겠고. 굳이 표현하자면 뭔가 마음이 스산했던 것 같은데, 어째서인지를 스스로도 모르겠어서 한참 동안 누운 채로 구름 속에 달이 숨어 있던 순간을 다시 떠올려봤다.

그런 밤이면 사실 책도 잘 읽히지 않는다. 책장에는 사놓고 읽지 않은 책이 무덤처럼 쌓여있고, 당장 일적으로 읽어야 할 책도 산더미 같지만,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뭔가 읽고 싶은데 읽고 싶지 않은 기분이라고 하면 될까. 이야기하고 싶은데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기분. 사람이 그리운데 사람이 무서운 기분. 그럴 때면 집중력이 흐트러지고 마음이 자꾸만 어디론가 달려간다.

그런 순간순간마다 누군가 나의 마음을 설명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갈피를 잃고 어딘가를 떠도는 생각들과, 그때의 심정 같은 것들을 누군가 헤아려주기를, 알려주기를, 알아주기를 기다리게 된다.

부희령의 <무정에세이>는 말하자면 그런 책이다. 나도 몰랐던 나의 마음. 내가 눈치채지 못했던 나의 생각. 언젠가 스쳐 지나간 순간들, 그렇게 보았던 것과 보지 못했던 것들에 대한 글. 어젯밤 누워서 달을 그려보다 말고 이 책을 읽기 시작했고, 읽다 말고 줄줄 울기 시작했다.

그러나 말해두고 싶은 점은 이 책에는 슬픈, 아픈, 고통스러운, 과 같은 형용사로 묘사할만한 장면은 하나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감정의 표현조차 많지 않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눈물이 줄줄 흘렀다. 아마도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처럼 내 안의 무언가를 건드렸다는 이야기인데, 그것이 무엇인지는 나도 모른다. 그것을 알고 싶어서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이 책은 소설가 부희령 선생님이 몇 년 동안 쓰셨던 짧은 에세이 모음집으로 내가 늘 보고 싶었던 것, 보고 있었지만 눈치채지 못했던 것, 보이지 않는다고 믿고 싶었지만 사실은 보고 있었던 것들에 관한 이야기다. 이런 글을 읽고 있을 때면, 세상에 이러한 책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기뻐서, 나에게 글자를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이 행복하게 느껴진다.

이 이상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이 책이 너무 귀하고 좋아서, 쓸데없는 말로 책의 좋음을 손상시킬까봐 이 이상 다른 이야기를 잘 하지 못하겠다.

이런 책을 세상에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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