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자본주의백과전서>를 읽고
장강명의 <우리의 소원은 전쟁>은 남북한이 독립된 국가로서 서로 공존하고 있다는 설정을 바탕으로, 북한의 마약 문제를 다룬 소설이다. 좋아하는 작가의 신작이라 별 고민 없이 구매했는데, 막상 펴본 뒤 북한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을 알고 처음에 인상을 찌푸렸던 기억이 난다. 내게 있어 북한이나 북한 관련한 이야기는 정치적 당위나 이런 저런 가치판단을 떠나, 늘 고루하고, 지루하고, 답답하고, 하여간 재미없는 소재란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소설을 읽으면서 내가 생각했던 북한과 실제의 북한 사회의 모습에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을 알고 아주 깜짝 놀라고 말았다. 머릿속 북한의 모습은 이승복 어린이의 절규로 상징되는 공산당과 인민재판의 무서운 이미지만 남아 있었는데, 실제로는 우리가 사는 모습과 큰 틀에서는 차이가 없었다. 장마당이라는 이름으로 시장경제도 돌아가고 말이다. 소설은 어디까지나 소설일 뿐이지만, 그 안의 디테일은 철저한 자료조사를 바탕으로 했다는 것을 알기에 북한에 대한 인식을 달리하는 계기가 되었다. 더군다나 문재인 정부 들어서부터 남북간의 분위기도 점차 훈훈해지는 조짐이 보이고, 평양냉면이나 각종 북한 음식들이 힙스터의 상징처럼 떠오르는 것을 보면서, 한때 기피하던 북한은 이제 본격적인 호기심의 대상으로 급부상하게 되었다.
주성하 기자의 <평양자본주의백과전서>는 나와 같은 사람들을 위해 북한 관련한 세세한 정보를 상세하게 두루 알려주는 그야말로 ‘백과전서‘이다. 물론 제목과 같이 평양에 한정된 정보이긴 하지만. 막상 읽어보니 소설이나 인터넷 풍문으로 들었던 것 이상으로 평양 주민들의 삶은 대단했다. 생각하고 있었던 것 이상으로 잘 먹고 잘 산다는 것에 대한 놀라움이랄까. 초등학생 때, 북한 사람들은 늘 세뇌를 당하며 살아서 실제로는 저들이 다 굶어죽게 생겼으면서도 남한이 더 가난한 줄 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러나 막상 실체를 알고 보니, ’세뇌‘를 당하고 있었던 것이 그들뿐 아니라 우리도 마찬가지였구나 싶은 것이다. 그 정도로 세간에 알려진 바와 북한의 실상은 전혀 달랐다. 물론 90년대는 실제로 고난의 행군이 있던, 북한에게 있어 아주 어려운 시절이었던 것이 사실이나, 그 이후에 어떤 과정을 거쳐 발전하고 생활하고 있는지 남한 쪽에도 전혀 업데이트가 안되었던 셈이다.
책은 북한의 시장경제에 관한 이야기를 베이스로 부동산 투기나 명품과 같은 자본주의의 상징과도 같은 부분부터 술과 접대문화, 데이트와 연애, 결혼식, 대중문화, 사교육과 치맛바람 등 다양한 분야를 세세하게 다루는데, 정말이지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다. 북한에서도 아파트를 투기하고, 인테리어를 매우 신경쓴다든가, 명품에 대한 선호가 있다든가, 유치원생 시절부터 부모가 사교육에 매우 관심을 기울인다든가 하는 부분은 그야말로 처음 듣는 내용이었다. 관료나 정부기관의 권력이 강하고 주민들의 생활풍속까지 단속한다는 점, 뇌물이 일상적으로 사용된다는 점, 부실 공사 등으로 아파트가 붕괴되어 수백명이 죽었던 사건, 그 외에도 빈부격차가 점점 더 극심해지고 있다는 점(물론 빈부격차는 심해져도 평균적인 생활의 질은 향상되고 있다) 등을 볼 때는 마치 대한민국의 70-80년대를 보는 듯한 인상이 들기도 했다. 물론 그 시대에는 아직 어린아이였으므로 직접적인 비교는 어렵지만, 어려서 읽었던 박완서의 소설이나 조정래의 <한강>에 나오는 것과 거의 흡사한 것이다. 국가가 이념을 통제하고 시민들의 준법의식이 약하며 성관념이 전반적으로 보수적이면서도 성평등의식이 부족한 부분까지 너무나도 비슷하였다. 접근이 통제된 한국 대중문화(영화, 노래, 드라마 등)를 몰래 구해서 보는 부분마저 일본문화가 개방되기 이전의 우리나라를 연상시킨다.
북한의 세세한 생활풍속도 재미있었지만, 읽다보면 역시 인간의 욕망을 누를 수 있는 것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누군가와 비교하고 경쟁하며 우월감이나 열등감을 느끼는 모습이라든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그에 영향을 받는 습성이라든가, 재미와 행복을 추구한다든가 하는 부분 말이다. 그런 면에서 인간은 대개 다 비슷한지도 모른다. 체제나 이념이나 사회문화에 따라 조금씩의 차이는 생기겠지만 그 최종적인 방향은 결국 모두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책에서는 최종적으로는 통일을 목표로 하는 것 같은 대목이 몇 엿보이지만 통일까지 가지 않더라도 이대로 남북 간의 전쟁 위협이 완전히 사라지고, 통행이 자유롭게 되어서 하루라도 빨리 평양에 가서 고기밥을 먹어보고 싶다.
“뇌물에 취한 간부는 이제 담배나 술 같은 뇌물 수수나 음주 접대쯤은 일상사로 여긴다. 군조차 뇌물로 유지되는 북한은 자본주의보다 더 자본주의적인 사회다.” -p.105
“욕망은 이념보다 훨씬 강하다” -p.203
“최하층 여성에게는 초보적인 인권마저 보장되지 않는다. 그들은 인권이라는 개념이 있다는 것 자체를 모르고, 먹고살 다른 방도가 없으니 이렇게 사는 것이라 생각한다. 매춘에 이용되는 여성 대부분이 이렇게 산다.” -p.311
“북한에서 권력은 대를 이어 세습된다. 김씨 일가의 정권만 세습되는 것이 아니라 간부 집 자식은 간부 집 자식대로 아버지가 밀어주는 것만큼 ‘큰다’. 그렇게 큰 지식은 권력을 휘두르며 부자가 되고, 자기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자기 자식을 밀어준다. 물리적인 파괴가 없는 한 이 세습 구조는 허물어질 수 없다.
권력과 돈이면 안 되는 일이 없다는 점에서 북한은 그 어떤 자본주의 사회보다 더 자본주의적이며 그 어쩐 권위주의 사회보다 더 권위주의적이다. 이런 사회를 우리는 조선민주주의공화국이라 부르는 것이다. 나아가 북한을 그들의 주장대로 사회주의로 보아서도 안된다. 북한 당국도 이베는 ‘국가예산제’의 국영 기업소에 의존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그래서 돈을 벌 수 있는 기관은 자체적으로 벌어먹고 살라는 지시를 내렸고, 지금까지 ‘비사회주의적 현상’이라고 비판하고 단속하고 통제하던 것들을 얼버무리며 넘기기 시작했다.” -p.367-368
“북한이 신용의 중요성을 진정으로 깨달으려면 아직도 가야할 길이 멀다. 그 전에 법규를 철저히 지키는 법치의 개념부터 체득해야 할 것이다.” -p.372-3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