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같이 있어>를 읽고
시를 좋아한다. 요즘은 잘 읽지 않지만. (한 때는 많이 읽었다.) 그런데 좋아하는 시를 소개하면서도 시집 자체를 읽고 평을 쓴 적은 없었는데, 시와 시집은 상당히 별개의 존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같은 시인이라도 시집마다 느낌이 다르고, 한 시집에 실린 그 수많은 시의 느낌이 또 다르고 하니 어떤 시집에 대한 평을 하는 것 자체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박상수 시인의 <오늘 같이 있어>는 좀 특별하다. 제목에 이끌려 아무 생각 없이 주문했다가 정말이지 홀딱 반해버리고 말았다. 이토록 재기발랄하고 위트 넘치는 시를 찾아낸 스스로가 너무 대견해 도저히 자랑을 하지 않고 배길 수 없었다. 여러분 제가 찾아낸 이 시집 좀 보세요!!!
박상수 시인은 지극히 일상적이고 평범한 순간들을 포착하여, 그 안의 미묘한 감정들을 시로 녹여낸다. 이를테면 부탁할 사람이 너 밖에 없어, 하는 친구의 애원에 어딘가에 갔더니 이미 나 말고도 사람이 수두룩 빽빽인 경우라든가, 오랜만에 만난 동창이 짜증은 나지만 딱히 반박하긴 곤란한 은근 슬쩍 긁는 말을 하는 순간이라든가, 회사에서 상사나 선배가 은근슬쩍 성추행과 성희롱을 해와서 선배에게 상담했더니 너 참 피곤한 애다 하고 타박을 듣는 순간이라든가. 그는 우리가, 아마 그 중에서도 주로 여성들이, 살면서 한두번씩 경험하거나 느껴봤음직한 순간을 생생하게 재현한다.
물론 주인공들은 그러한 ‘빡치는’ 혹은 ‘짜증나는’ 상황에서 무력하게만 남아있지 않는다. 마음에 안 드는 말을 하는 동창에게는 “누구세요? 제가 안면인식장애가 있어서” 라고 되묻기도 하고, 한도 끝도 없이 자기 이야기만 늘어놓는 사장을 앞에 두고선 몽골 초원을 그리며 대놓고 딴 생각을 하기도 , 사장의 딸을 보고 못생겼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지하철에서 달라붙는 아저씨에게는 손톱을 세워 양 손으로 팔을 감싸 보복하기도! 근본적인 개선이나 해결을 할 수 없는 지극히 미미한 저항들이지만, 그렇기에 더 현실감이 있고 생생하게 와 닿았던 부분이다.
놀라운 것은 이 시인이 남성이라는 사실이다. 시적 화자가 주로, 아니 전부 여성이라서 처음에는 당연히 남성 이름을 가진 여성 시인이라고 생각했다. 시인에게 홀딱 반해버려 뒤져보는데 사진 속에 웬 아저씨가....! 중년의 남성이 어떻게 이런 시를 쓸 수 있는지 신기할 정도이다.
한편으로는 최근의 20대 여성의 심리는 20대 남성들의 그것과는 또 차이점이 있다는 것이 매우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그러니까 오늘날 20대 초반의 남성들이 주로 패배감과 무력감, 어떤 박탈감에 시달리는 군상으로 주로 묘사된다면, 여성들은 그 와중에서도 뭐랄까 좀 더 영악하게 적응하거나 무력한 가운데 이를 갈면서 순응하는 듯한 양상을 띄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더 약한 존재가 더 약아지는 것은 한편으로는 당연하지 싶기도 하고.
주인공들은 영악하기도 하고, 나약하기도 하고, 못됐기도 하고, 쓸쓸하기도 하고, 몹시 찌질하기도 한데, 그래서 더 좋았다. 찌질하다는 건 말 그대로 찌질할 뿐이지만, 때로는 그래서 아름답기도 하다. 시집 첫 페이지의 작가의 말 또한 너무도 마음에 남는다. “우린 너무 아름다워서 꼭 껴안고 살아가야해”
<송별회>
어쩌다 이런 날 걸려들었을까?
손님들이 다 떠난 가게, 셔터를 내리고 우리는 둘러앉았지 주거니 받거니 잔을 비우다가 매니저 아저씨는 폰을 꺼내 들었어, 됐다고, 글쎄 엄청 됐다고 웃어줬는데도 내 옆자리로 왔지 딸 사진을 들이대면서 한 번만 봐댈래, 못생겼지? 그 말을 자기 입으로 하면서
정말 미안해, 아가야! 뜯어보니까 네네 아빠를......호되게도 닮았구나......마음이 너무 아파서 아저씨 술잔을 채워드렸지 아저씨는 엉덩이를 붙여 앉았어 이대로 사진첩을 모두 털 생각일까, 오늘의 주인공 건너편 여자 알바 애는 자기 폰이랑 합체한 지 오래
계곡이 제일 싫어, 벌레가 많지
맞어!
게다가 물건들이 다 떠내려가잖아?
맞아 맞아!!
우린 제법 말이 통했는데......제발 같이 남아달라고, 오늘 같이 안 남아주면 무슨 일을 당할지도 모른다고, 네가 애원해서 남았지만, 이 아저씨, 왜 나한테만 달라붙을까, 이번엔 아내 얘기를 쏟아내며 젖어갔다 메이드룩이라도 입어야 할까 봐, 세상에! 어쩜! 어떻게 그런 사람이랑 살아요! 맞춰줄수록 증발되는 영혼, 머릿속에 시뮬레이션을 돌렸어......몽골 대초원......가도 가도 끝이 없는 벌판......오직 홀로인 나여......나까지 이계로 넘어가려니까 아저씨는 갑자기 바지를 벗기 시작했지
악!!!
쇼크 받아서, 펄쩍 뛰어서, 곧 떠날 알바 애한테 달라붙었어 매니저 아저씨는 길게 한숨을 쉬었지 앉으라고 우리들한테 손짓을 하더니 이번에는 자기 바짓단을 걷기 시작했어 저게 뭐야, 종아리에, 털 난 회충 같은 것들이 뒤엉켜서는!
내가 말야, 응, 이렇게 열심히 살았어
양쪽 바짓단을 다 걷어 올리고, 고개를 파묻고 울다가, 아저씨는 벌떡 일어나서 원샷했지 먹는 거보다 흘리는 게 더 많아, 여기가 무슨 동물농장도 아니고......저게 대체 뭔데? 이제 떠날 여자애가 검색한 걸 보여줬지 종일 서서 있는 사람이 걸리는 병......우리가 무슨 죄가 있다고 이러는 걸까, 그냥 우린 이 가게에서 일하는 것뿐인데
열심히 살아라, 이것들아! 응? 열심히 살라고!!
아저씨 눈에 빨간불이 들어왔지 저러다가 거품 물고 승천할 것 같아, 열심히 살라는 사람이 제일 무서워......세컨드 쇼크를 먹기 전에 우리는 도망쳐 나왔지 버스 정류장까지 숨도 안 쉬고 달렸어
달리다가 털썩, 바닥에 제대로 주저앉아버렸지 곧 떠날 여자애가 되돌아와서는 내 어깨에 손을 얹었어 숨을 몰아쉬면서 나를 내려다봤지 빨리 가자, 너 잡히고 싶어? 묻는 그 애를 노려봤어 일어서서 그 애를 밀어버렸다 그리고는 걷기 시작했지 그 애랑 완전 반대쪽으로
나만
내일 여기를 또 와야 한다니
견딜 수가 없었어.
<무한 리필>
너 고기 좋아해?
오늘 하루 두 번이나 만났는데, 그냥 헤어질 수 없었지, 이젠 내가 먼저 가겠다는 말도 못하고…… 아메리칸 레스토랑 스타일인 줄 알았는데, 네가 갑자기 물었어 고기, 고기라……
회식하고 집에 가다 버스에서 잠든 적이 있지 깨보니 주변엔 아무도 없고, 기사 아저씨도 없는데, 어디서 고기 냄새가 나는 거야 침샘이 폭발했지 내 옷에서 나는 냄새였어
우리는 먹었지 목살이랑, 삼겹살이랑, 계속 가져다 먹었어 먹자골목에서 네가 찍은 집, 구두 벗고 들어가기 싫다니까 깔깔깔 네가 하이파이브를 해줬지…
신을 벗으면 고기랑 너무 멀어지잖아
불판을 여섯 번이나 갈면서, 말도 없이 먹었다 양파, 고기, 마늘, 고기, 쌈장, 고기…… 올릴 수 있는 건 다 올려서 씹었어
들려?
응?
우리 살찌는 소리
정말이네, 털보 언니가 미소 지으며 다운 패딩 입혀주는 느낌, 그래, 난 좀비 언니들이 떼로 와서 기모 레깅스랑 펠트 워머를 같이 입혀주나봐, 무서워, 우리 얼른 먹어서 이 무서운 것들을 다 없애버리자
둘이서 칠 인분은 먹었나봐. 된장국에 공깃밥까지는 먹으려다 그건 못했지 너는 젓가락을 덜덜 떨며 말했다 못살아, 왜 이것밖에 못 먹는 거야…… 맘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구나…… 그니까, 먹은 것보다 못 먹은 게 무한이라서 무한 리필인 건가, 나도 같이 울었어
모공들이 다 열려버려서, 우린 기름종이를 나누어 가졌지 립밤도 다시 발랐어 그래도 한 정거장쯤은 걸을까? 미안해 얘들아, 천국에 못 간 돼지들, 걔네들이 아직도 붙어 있나봐, 밤거리를 걸었지만 숨이 차서, 반 정거장도 못 걸었지, 포기하자 다 포기하고 , 택시를 잡아타자
불빛 찬란한 밤거리
이렇게 달릴 때가 제일 빛나지
다들 걸어가는데 우리만 달려가니까
우리만 앞으로 나가는 것 같으니까
연두부처럼 맘이 풀려서는 내가 물었어
무슨 생각해?
음, 구역질나게 배부르고, …… 멍해서, 좋다는 생각
멍한 것 뒤에는 더 멍한 게 있을까 아님 아무 것도 없는 걸까, 뭐가 더 좋은 걸까? 우리는 계속 달렸지 입을 벌리고 차창 바람을 먹으며, 에코처럼, 네가 물었어
넌 무슨 생각 하는데?
아까 남긴 고기 생각
내릴 때가 되니까 네가 붙어 앉았지,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뭐라고 속삭였어 분홍색 면봉이 귓바퀴를 들락날락, 근데 무슨 말인지 안 들리잖아, 내 손을 잡고, 빤히 보면서, 네 입술을 움직였지
가지 마
오늘
같이 있자.
<명함 없는 애>
취한 사람, 취한 사람, 또 취한 사람…… 지나가는 사람들만 쳐다보려니 재미가 없었지, 할 게 없어서 꺼내봤어 오늘 받은 금테 명함들, 아, 이게 진짜 성공의 냄새지! 맥주를 홀짝이며 한 장씩 땅에 흘려버렸어
아직. 안. 왔니?
눈이 풀린 채로, 언니는 중얼거렸지 아예 정신을 놓은 줄 알았는데 살아 있었구나! 아직이야 언니, 내 대답에 그래, 오면 깨워줘, 말하며 다시 코를 골았지 나는 언니 손등을 몇번 두드려줬어
새벽 네시, 편의점 테이블에 동기 언니랑 둘만 앉아 있었어, 고마웠지, 정신 잃고 엎드려 있어도 거기 있어줘서 고마워, 아까는 더 고마웠지, 언니 번개에, 하나둘 도착한 동기애들이 술 몇 잔에 금세 필 받아서는 배틀을 시작했어
놀랐네, 층마다 수면실이랑 발 마사지기가
우린 장례식장에 수저랑 그릇 세트가 나와 회사 로고가 찍혀서!
나 있는 데서는 서울 타워가 그냥 보인단다
명함 있는 애들 얘기를 들으며 나, 빠져들었지, 치킨 생각에…… 멍하니 앉아 있으려니까 다들 그랬어
너는 왜 아무 말도 없어, 무슨 안 좋은 일 있어?
살짝 미소 지으며, 그럴 리가, 말하니까 동기들은 다시 얘기를 이어나갔지 지난번에는 말야, 아이디 카드 걸고 회사 근처에서 담배 피우다가 깨졌지 뭐야, 와, 너희도 금연 필수? 아니, 한 손을 주머니에 넣고 있었다고…… 와하하하, 내 표정은 점점 진지해져만 갔지, 나는 또 빠져들었어, 이번에는 족발…… 족발은 말야, 할일 없을 때가 아니라 열 일 제쳐놓고 먹을 때가 최고지, 생각만으로도 다 먹은 것처럼 울렁거려서 화장실로 갔지 언니가 뒤따라 들어와서는 어깨를 두드려줬어 미안해, 너 술 사주는 자린데 이상한 애들만 왔구나…… 내가 활짝 웃으며 노 데미지, 화답하니까 언니는 슬픈 얼굴로 말했어
근데 너, 그애들 올 때마다 수저 세팅해주더라, 물티슈까지…… 너 그런 애 아니잖아?
누가 때린 것도 아닌데, 거기서 무너졌지 훌쩍이면서 내가 물었어 나 뭐 생각하고 있는지도 다 보여?
그럼 보이지, 아주 슬픈 생각……
방청객 마인드로는, 더이상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먼저 일어섰지 놀란 애들을 놔두고, 언니랑 같이 일어섰어 그리고 편의점, 우린 맥주를 더 먹었지 언니가 쓰러질 때까지 더 먹었어 어디선가 치킨 냄새가 나고…… 치킨 냄새만 맡으면 왜 난 눈물이 날까, 혼잣말을 하려니까 언니는 엎드린 채로 대답을 해줬어
고마운. 거지. 네가 시키면. 언제든. 오잖아.
마침내 대리 아저씨가 도착했지 언니를 부축해 언니 차에 태우니까 언니가 정신을 좀 차렸지 언니 차 바꿨구나? 내가 말하니까 언니는 웃으며 끄덕였어 내 볼을 토닥이다가 나를 안아줬지 그러고는 내 손에 뭘 주었다
언니가 떠나고 손을 펼쳐보았어 오만 원짜리 두 장…… 언니…… 나는 언니가 사라진 쪽을 바라봤지
깜짝 놀랐어
나도 모르게 언니 복을 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