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드의 물고기 책>을 읽고
리처드 플래너건의 <굴드의 물고기 책>을 읽었다. 도중에 몇번씩이나 포기할 뻔 했으므로 사실 읽어’냈’다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지도 모른다. 상당히 난해하고 어지럽다. 낯선 지명, 수많은 등장인물, 풍부한 어휘로 조합된 복잡한 문장은 적응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리며, 의식의 흐름에 충실한 넘치는 사유는 매우 버겁게 느껴진다.
예를 들어 주인공인 굴드가 “지금 내 창자가 완전히 맛이 가버려서 대단히 아쉬운 순간에 나를 배신하고 말았다. 한때 내 장은 물을 좍좍 쏟아내는 대신 제대로 비워냈으며, 내 앞에는 ‘국민 예술가’로서의 창창한 미래가, 내 밑에는 필요할 때 방어 무기로 활용할 수 있는 실한 대변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내 뱃속은 죽어가던 기계 파괴범의 이빨보다도 더 꽉 악물려 있고, 내가 그리는 허접한 물고기가 두렵기만 하고, 지난 나흘간 바늘구멍으로 똥을 눈데다 오늘은 팝조이가 왔을 때 그에게 내던질 굳은 똥을 한 덩어리도 생산해내지 못했다.” 라고 말하는 대목을 보면, 그냥 변비 걸렸다고 간결하게 말하면 어디가 어떻게 되냐 싶은 생각이 든다. 거의 모든 문장이 이런 식이므로 상당한 독서력을 요하는 결코 쉽지 않은 소설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복잡하고 난해한 소설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읽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간단하다. 무척 아름답고, 재미 이상의 어떤 감동을 주기 때문이다. 동시에 단순한 상태를 복잡하고 예술적으로 묘사할 수 있는 작가의 능력에 경탄을 느끼게 되기도.
실업 후 백수처럼 지내던 ‘나’는 오래된 가구를 손봐서 고가구로 둔갑시켜 판매하는 일을 시작하고, 하루는 낡은 가구의 서랍 속에서 기묘한 책을 발견한다. 여러가지 물고기의 그림과 설명이 그려진 책으로 여백에 온갖 글씨가 빽빽하게 적혀있다. 엉망진창에 순서도 알 수 없고 난삽하기 그지 없는 이상한 이야기에 심취하게 된 나는 어느날 술집에 갔다가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 책을 분실하게 되고, 미련을 버리지 못해 괴로워하다가 내용을 기억나는대로 옮겨적기로 한다. 그리고, 이야기가 시작된다.
굴드의 물고기 책은 19세기 영국의 식민지였던 테즈메이니아가 배경이다. 죄수들 중에서도 가장 악질적인 이들이 끌려가던 악명 높은 유형지였던 그 곳. 술집에 시시껄렁한 그림들을 그려주며 살아가던 굴드는 생각없이 저지른 실수로 인해 테즈메이니아의 세라섬으로 끌려가게 된다. 끔찍한 노역과 고문에 시달리며 하루 하루 살아가던 굴드 앞에 어느날 죄수들을 담당하던 의사가 등장하여 물고기를 그림으로 옮기는 작업을 지시한다. 굴드는 살아 숨쉬는 물고기를 그리면서 그것이 만만치 않은 작업임을 깨닫게 되는데.....
서문과 후기를 제외하고 총 12개의 장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각각의 장이 특정한 물고기의 이름을 하고 있다. 매 장마다 해당 물고기를 그리는 작업을 지시받고, 도저히 그릴 수 없어서 고통스러워하던 굴드에 대한 내용이 대부분이다. 그렇게 괴로워하던 굴드는 어떠한 일련의 사건-주로 누군가의 죽음과 같은 매우 끔찍한- 에 영감을 받아 극적으로 그림을 완성한다. 각각의 그림이 그려짐과 동시에 전체적인 이야기가 조금씩 진행된다. 마치 자잘한 톱니바퀴가 돌아갈 때마다 거대한 쳇바퀴가 조금씩 움직이는 것처럼. 그 과정이 매우 드라마틱하면서도 설득력 있게, 끔찍하지만 예술적인 의미로는 아름답게 전개되는 터라, 어지럽고 난해한 문장에도 불구하고 책을 놓을 수 없게 만든다.
제국주의의 악을 낱낱하게 고발하는 듯한 이 소설을 읽다보면 어디에서도 읽어본 적 없는 기상천외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어디에선가 분명 들어봤다는 기시감을 느끼게 되는데, 그것은 결국 인간의 본성이 모두 똑같기 때문이지 싶다. 타인을 착취하고, 차별하고, 지배하고, 이용하는 동시에, 사랑하고, 보살피고, 희생을 하는 인간들. 그들을 보다보면 우리가 예술을 사랑하는 이유, 고통러움에도 그것을 놓을 수 없는 이유에 대해, 그리고 예술은 결국 모두 맞닿고 이어져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또한 그림을 그리지 못해 괴로워하고, 그러다가 극적으로 작업에 성공하고, 그러면서 그림 실력이 나아지고, 그러할수록 점차 예술 그 자체, 즉 물고기에 사로잡히는 듯한 굴드의 이야기에서는 예술이 주는 행복과 고통, 최근 들어 자주 생각하는 재능의 기쁨과 슬픔에 대해 떠올리게 된다. 오랜 시간을 투자해, 꽤 공을 들여서 읽어’내’야 하는 소설이지만, 그만큼 가치가 있었던, 매우 아름다운 이야기였다.
“나는 고통이 너무 두렵다. 나는 수치를 모른다. 내가 동료를 고자질한 적이 없겠는가? 나는 친구이자 밀고자였다. 나는 그들을 좋아했기에 그들이 내 거짓 밀고로 끌려가서 채찍을 맞았을 때 대신 울어주었다. 나는 살아남았다. 이는 나쁘고 부도덕한 짓이었다. 고작 음식이나 물감 부스러기를 얻으려고 영혼을 팔았을 때, 나는 그들의 등껍질을 벗기는 채찍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필요한 것을 손에 넣기 위해서라면 배신을 서슴지 않았다. 나는 감방 안의 고약한 똥덩어리였다. 내게서는 동료 죄수들의 입냄새가 났다. 내게서는 그들의 썩어빠진 삶에서 풍기는 시큼한 악취가 났다. 나는 역겨운 바퀴벌레였다. 나는 끝없이 근질거리는 불결한 이였다. 나는 오스트레일리아였다. 나는 태어나기도 전에 죽어가고 있었다. 나는 예수였다. 나는 죄인이었다. 나는 성인이었다. 나는 육신이었고, 육신의 욕망과 육신의 결합과 죽음과 사랑은 내 눈에 전부 똑같이 부패했고 똑같이 아름다웠다. 나는 그들의 부서지고 죽어가는 몸을 얼싸안았다. 나는 그들의 곪은 종기에 입을 맞췄다. 나는 궤양과 썩어가는 농포로 뒤덮인 그들의 야윈 정강이를 씻겨주었다. 나는 그 고름이었고, 영이었고, 하느님이었고, 심지어 나 자신에게도 해석 불가능한 알 수 없는 존재였다. 그 때문에 얼마나 나 자신을 증오했던가. 내가 사랑했고 나 자신이기도 한 우주를 얼마나 시험해보고 싶었던가. 꿈속에서 왜 내가 바다를 가르며 날았는지, 깨어나보니 왜 나는 방금 갈아엎은 토탄 냄새를 풍기는 땅이었는지 얼마나 알고 싶었던가. 아무도 내 성난 탄식에 답하지 못했고, 왜 내가 이 삶을 겪어야 하느냐는 농담을 듣지 못했다. 나는 하느님이었고, 고름이었고, 나였던 것은 모조리 ‘너’였고, ‘너’는 ‘거룩’했고, ‘너’의 발, ‘너’의 내장, ‘너’의 불두덩, ‘너’의 겨드랑이, ‘너’의 냄새와 ‘너’의 소리와 맛, ‘너’의 타락한 ‘아름다움’, 나는 ‘너’의 이미지 속에서 ‘신성’했고, 나는 ‘너’였고, 나는 더 이상 이 드넓은 땅을 갈망하지 않았으니, 왜 어떠한 말도 내가 이토록 아프고 쓰린지, 왜 이별을 고하고 있었는지를 전하지 않는가?” - p. 286-287
“물고기를 그리는 과정이 그렇게 고통스럽고 힘겨웠던 것은 물고기가 죽어가고 내 모습이 그들과 달라서가 아니라, 내 모습이 바뀌기 시작하려면 나 또한 죽어야 하기 때문이었음을 어떻게 짐작할 수 있었겠는가? 그 모든 오랜 시간이 나를 변신시키고 있었음을, 내가 붓으로 무수한 그림을 창조하고 있었던 게 아니라 내 그림의 무수한 실을 뽑아 하나의 고치를 짓고 있었음을 어떻게 알 수 있었겠는가?” -p.333
“만약 거짓말쟁이와 위조범, 매춘부와 밀고자, 살인범 죄수와 도둑을 신뢰할 수 없다면 당신은 이 나라를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면 우리 모두가 권력과 나름의 타협을 하며, 우리 대부분은 약간의 평화와 고요를 얻기 위해 우리 형제자매를 팔아넘길 터이기 때문이다. 윤리적으로 비겁한 삶을 살도록 훈련받았으면서도 항상 우리는 ‘자연’의 반항아라며 자위한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무엇에 대해서도 화를 내거나 흥분해본 적이 없다. 우리는 애버리지니를 쏘아 죽이고 얻은 땅에서 유순히 풀을 뜯다가 결국 도살되는 양떼와 똑같다.” -p.423
“그들 모두가 이곳을 날조해왔다. 그 어떤 일도 기억하는 일에 비하면 쉽기 때문이다. 그들은 여기서 백여 년간 벌어진 일들을 망각하고, 늙은 덴마크인이 했듯이 이곳을 상상할 것이다. 왜냐면 그 어떤 이야기도, 우리에게 이런 짓을 저지른 주범이 영국인이 아닌 우리 자신이며, 죄수가 죄수를 매질하고 흑인을 향해 오줌을 싸고 서로를 몰래 감시했으며, 흑인 남자들이 개를 얻기 위해 흑인 여자를 팔아넘기고 탈주한 죄수를 창으로 찔러 죽였으며, 백인 물개잡이들이 흑인 여자를 죽이고 강간했으며, 흑인 여자들은 그렇게 나온 아이를 죽였다는 딱한 진실보다는 나을 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두가지. 이 둘을 나는 도저히 화합시키지 못하고, 그것이 내 몸을 둘로 찢어놓는다. 세상이 너무나 끔찍하다는 인식, 삶이 너무나 특별하다는 감각-이 두가지 감정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사람이 물고기가 될 수 있을까? 나의 신비를, 이 질문을, 이 고통을, 이 선과 악을, 이 사랑과 증오를, 이 삶을 풀기 위해 이렇게 멀리까지 찾아온 그대 잠수부들이여, 나를 위해서 이것을 해결하고, 내 이야기를 헤아리고, 나를 이 삶과 결합시켜서, 이것이 내 본성의 불가분한 일부가 아니라고 말해달라 - 제발....
왜냐면 나는 이 세계와 조화되지 않기 때문이다. 조화되길 원했지만 그러지 못했기에, 이 세계를 물고기 책으로 다시 써서 내가 아는 유일한 방법으로 바로잡고자 했다.” - p.433-4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