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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혜 Oct 07. 2018

재밌다고들 하지만 한 번도 읽기 힘든 책

재밌다고들 하지만 나는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일을 읽고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의 <재밌다고들 하지만 나는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일>을 읽었다.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대문호급(?)으로 평가받는다고 하는, 젊은 나이에 자살하여 아쉽게도 많은 작품을 남기진 않았다고 하는 작가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의 에세이(기고문) 9편을 추려서 묶은 책이다.

많은 서평이 ‘서평’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이렇게 어려운 책을 읽은 나의 엄청난 지적 수준”, “이토록 흥미진진한 스토리를 읽고 자극받아 생각난 나의 일화”, “이처럼 예술적인 서사에 공감하기에 충분한 나의 섬세한 감수성” 혹은 “이런 텍스트를 기반으로 내가 느낀 엄청난 통찰력” 등의 방향에 초점이 맞추어져 불필요하게 길게 쓰여져 있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 사람들이 타인의 서평을 통해 알고 싶은 것은 단순하다. 그래서 재미가 있다는 건지, 없다는 건지. 돈과 시간을 들일만큼 가치가 있는 책인지, 아닌지. 그걸 알고 있기에 나 역시 최대한 간결하게 감상을 쓰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물론 실패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래서 자기 부정이 되지 않도록 구구절절 덧붙이기 전에 이 책이 어떤지 한마디로 먼저 말하자면, 무지막지하게 지루하고 어려운 동시에 엄청나게 흥미진진하고 재미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매우 이상한 말이지만 사실이다.

읽으면서 지루하다고 느껴지는 이유로는 일단 각주가 엄청나게 많고 길다는 것이 있다. 그렇게나 많은 각주들이 단순한 각주가 아니라 또 하나의 짧은 글이나 다름 없다. 어떤 각주는 그 내용이 무려 3페이지에 이른다. 다른 책처럼 단순히 부연설명을 하는 정도에 그쳐서 그냥 스킵해도 되는 것이 아니다. 이어지는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읽고 넘어가야만 한다. 따라서 나처럼 각주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매우 곤란을 겪을 수가 있다.

또한 작가의 스타일에 익숙해지기까지 상당히 시간이 걸린다는 문제도 있다. 예전에 홍상수 영화를 잘 모를 때 있었던 일인데, 극장에 앉아서 그의 영화를 보는데 저게 뭔 소리야 하고 인상을 쓰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혼자 미친듯이 폭소하는 사람이 있었다. 아마 홍상수의 오랜 팬이었겠지. 홍상수 영화는 한편만 봐서는 전혀 웃기지가 않다. 그의 다른 영화들까지 모두 섭렵한 후 반복되는 어떤 특징에 익숙해져야 한다. 익숙해지고 나면 비로소 재미를 느끼게 된다.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역시 고유의 스타일과 특유의 유머 코드가 있는데, 익숙해지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문장이 길고 복잡하며 글 자체가 엄청나게 길다는 문제점도 있는데, 이 때문에 어지간히 독서력이 있는 사람이 아니면 아마 끝까지 읽기 힘들것이다. 이러한 여러가지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지적 허영심과 자긍심 역시 갖추어야 한다. 이 책을 쉽사리 재미있다고 추천하기 어려운 이유이다.

특히 9편의 에세이 중 표제작인 <재밌다고들 하지만 내가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일>은 크루즈 여행기로 에세이 한 편이 무려 100페이지가 넘는다. 읽는 사람 입장에서는 크루즈 여행에서 무슨 흥미로운 일이 있었고 거기서 어떤 느낌이 들었는지에 대해 쓰여있기를 기대하기 마련인데, 그런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주변 정황이나 크루즈 산업이라든가 온갖 것에 대한 세세한 묘사가 끝도 없이 등장한다. 이를테면 “우리는 망치처럼 생겨서 다들 펠라티오 하듯이 고개를 까딱거리는 유정 탑들이 흩어진 널따란 들판을 지난다. 그 너머 수평선에는 반들거리는 회색 손톱을 깎아놓는 조각 같은 것이 있다. 그것이 바다인 모양이다. 버스 안에서는 여러 언어가 들린다. 버스가 턱이나 기차선로를 넘을 때마다 모두의 목에 걸린 수많은 카메라가 단체로 달그락달그락거려서 엄청 시끄럽다. 나는 어떤 종류의 카메라도 갖고 오지 않았으며, 이 사실에 비뚤어진 자부심을 느낀다.”와 같은 식이다.

따라서 처음에는 불평만 많고 잘난 척 하고 주변을 끊임없이 관찰하고 평가하는 아주 피곤한 아저씨로만 느껴진다. 역시나 서평에서 독자가 기대하는 바와 같이 됐고, 그러니까 재미가 있었냐고 없었냐고! 처럼 본론으로 바로 이어지기를 바라는데 도무지 지금 이 이야기를 하는 목적이 나올 기미가 안 보인다. 그러나 익숙해지고 나면 그 특유의 냉소와, 이 정도로 집요한 인간이 세상에 또 있을까 싶을 정도의 예리하고 철저한 관찰력을 통해 묘사되는 세계에 경탄이 섞인 폭소를 터뜨리게 된다.

이 책은 어떤 면에서 윌리엄 포크너의 <소리와 분노>를 연상시킨다. 소리와 분노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동시에 다 읽기까지 가장 고생을 했던 책이기도 했는데, 읽으면서는 한없이 지루하고, 뭔 말인지 알 수도 없는 소리를 끝도 없이 늘어놓기에 읽다 말고 “작작 좀 해라 제발!” 이라는 소리가 튀어나올 뻔 하기도 하고, 서술의 형태가 계속해서 바뀌며 하여간 이걸 내가 왜 읽고 앉았지? 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 무수히 많았지만, 다 읽고 난 후 갑자기 어떤 감동과 여운이 물밀듯이, 미친듯이, 한꺼번에, 몰아치듯 다가오게 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 책 역시 에세이란 말은 좀 부적절하지 않나 싶을 정도로 길고, 장황하고, 구구절절하며, 내용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기대하는 에세이가 아니라 학술적이고, 논쟁적이며, 전문적이기에 읽는 이를 진빠지게 만들다가도, 끝나는 시점에서 갑자기 아, 이 얘기를 하려고 그토록 길게 사전준비를 했던 것이로구나 하고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순간들을 만나게 해준다.

9편의 에세이가 모두 좋았지만, 그 중에서도 <권위와 미국 영어 어법>, <랍스터를 생각해봐>, <재미의 본질>은 굉장했다. 상당히 어렵고, 지루하고, 매우 길지만, 한편으로는 매우 유익하고, 엄청난 여운과 통찰을 주는 재미있는 책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읽을지 말지, 선택은 각자 알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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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와 미국 영어 어법> 편에 나오는 좌파들의 ‘정치적으로 올바른 언어’에 관한 대목.

“요컨대 정치적으로 올바른 영어는 일종의 검열로 기능하고, 검열은 늘 기성 체제에 이바지한다.”

“현실적인 문제로는, 어린 자식이 넷 있고 일 년에 1만 2천 달러를 버는 사람이 과연 자신을 ‘가난한’ 사람이라고 부르지 않고 사려 깊게도 ‘경제적으로 불리한’ 사람이라고 부르는 사회에서 더 힘이 날지, 착취를 덜 당하는 느낌일지 나는 의문이다. 내가 그라면, 정치적으로 올바른 용어가 오히려 모욕으로 느껴질 것 같다. 그것이 생색내는 표현이어서가 아니다(물론 그런 표현이기도 하다). 위선적이고 이기적인 표현이라서다. 그리고 자주 생색의 대상이 되어본 사람들에게는 그런 태도를 감지하는 무의식적 안테나가 있는 법이다. ‘경제적으로 불리한’ 사람이나 ‘신체 능력이 다른’ 사람 같은 완곡어법의 기본적 위선이 무엇인가 하면, 정치적으로 올바른 영어 옹호자들은 이런 용어에 깃든 연민과 너그러움으로 혜택을 받는 대상이 가난한 사람들과 휠체어에 탄 사람들이라고 믿지만 사실 그 믿음에는 누구나 알고 있되 무서운 어휘 테이프 광고 외에는 아무도 언급하지 않는 한 가지 현실이 빠져 있다는 것이다. 그 현실이란, 우리가 특정 어휘를 사용하는 동기에는 자신에 관한 정보를 소통하려는 욕망이 어느 정도 늘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많은 유행어가 그렇듯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영어도 사실은 주로 화자의 미덕을 - 양심적인 평등주의, 모든 사람의 존엄에 대한 관심, 언어의 정치적 함의를 아는 세련됨 등을 - 알리고 칭송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따라서 새롭게 명명된 개인이나 집단에게 도움이 되기보다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용어를 사용하는 사람 자신의 개인적 이익에 더 도움이 된다.”

“내가 이 사례를 일반적이고 단순화한 방식으로나마 굳이 말한 것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영어에 영향을 미친 좌파의 허영이 실제로는 좌파 자신의 대의에 해롭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다. 진보주의자들은 ‘남들과 달리 너그럽고 동정심 있는 사람’의 이미지를 포기하지 못하는 바람에, 재분배 논증을 좀 더 실제적이고 현실 정치적인 방식으로 프레이밍할 기회를 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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