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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혜 Dec 08. 2018

‘좋은 여자’와 ‘미친년’ 사이

<삶을 똑바로 마주하고>를 읽고

지인이 추천할만한 책이 없냐고 묻기에 아직 읽어보진 않았지만 장바구니에 담아둔 채로 계속 염두에 두고 있었던 책을 꼽았다. 최현숙의 <삶을 똑바로 마주하고>. 구술생애사 작가이자 진보활동가인 최현숙씨는 24년간 결혼생활을 하다가 어느날 여성이 좋아졌다고 돌연 커밍아웃을 하며 이혼을 했다. 그 뒤부터는 애인과 함께 살다가 헤어지면 또 홀로 지내기도 하며 다양한 형태의 삶을 살았다. 2008년에는 총선에 출마하기도 했다. <삶을 똑바로 마주하고>는 그녀가 매체에 그간 기고했던 글을 모은 에세이집이다. 평소에도 도전을 좋아하고 용기가 있는 지인에게 어울릴 것 같아 추천을 했었는데, 엊그제 직접 읽어보다가 부리나케 연락해야만 했다. 추천 취소예요. 아마 안 좋아할 것 같아요.

직접 읽어보니 호불호가 상당히 갈릴만한 책이다. 논조는 대단히 강하고, 문장은 다소 거칠게 느껴지며, 글을 쓸 때 대부분의 사람이 하기 마련인 기본적인 필터링 따위가 전혀 없다. 음 그러니까 말하자면, 최근에 몸이 안 좋다는 이야기에 누가 섹스를 너무 많이 한 것 아니냐는 질문을 하자 연애를 시작한지 얼마 안되어 섹스를 많이 한 것은 맞지만 그것 때문은 아니고 갱년기 증상이었다고 언급한다거나, 여성 노인의 성생활에 대해 그려낸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는데 ‘꼴렸다거나’, 뭐 이런 내용이 가감없이 나온다. 그나마 나의 머리와 손을 거쳐 한 번 정돈된 것이 이러하고, 실제 표현은 더욱 생생하다.


물론 섹스가 다루지 못할 주제는 절대 아니지만, 예상과 너무 다른 내용들이라 좀 놀랐다고 해야하나. 아마도 이토록이나 생생하고 정제되지 않은 날것의 목소리(선정적이란 표현보다는 적나라하다는 것이 더 어울릴 것 같다)를 듣는 것이 오랜만이기 때문에 더 그렇게 느껴졌던 것 같다. 본인 스스로 ‘좋은 여자’와 ‘미친년’ 사이를 널뛰고 있다고 하는데, 그 말이 와닿는다!!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도 정치적인 주장이 상당히 강한데, 해당 부분이 평소 나의 생각과 좀 달라서 불편함을 느꼈던 것도 같다. 아마도 나의 페친들 중 어떤 이들이라면 읽다가 매우 화를 냈을지도.ㅋㅋ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읽게된 것은 나의, 보통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구석구석의 이야기가 담겨있기 때문이었다. “사람으로 태어나 사느라고 모두 애쓴다.”는 그녀의 어머니의 말처럼 그 자신의 마음 깊숙한 곳의 이야기와 평소에 접하기 어려웠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점이 좋았다. ‘폐경기’라는 용어에 대한 의견이나 고부갈등을 바라보는 시각 등 여성주의 이슈를 대하는 것 또한 기존의 페미니스트들과 사뭇 다른 방향이라 신선하게 느껴졌다.

여러모로 이토록 용감하고 치열한 사람이 또 있을까 싶다. 1957년생. 생각해보면 그 연배에 결혼생활을 무려 24년이나 하고서 중간에 커밍아웃을 하고 나올 수 있었다는 자체가 엄청난 기백이다. 우리 엄마와 같은 나이인데. 그만큼 삶에 대한 열정과 호기심이 강하고 용기 있는 그녀임에도 아이들과 관련한 대목을 읽을 때는 감춰두었던 여리고 약한 부분이 드러난다. 그러고보면 자녀가 성소수자인 경우에 대한 이야기는 많지만 부모가 성소수자인 경우의 이야기는 거의 들어보지 못했다. 아들들의 마음과, 그 아들들을 바라보는 그녀의 마음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어린 시절 떠돌이로 살고 싶었다. 만난 사람들과 어울리며 떠돌 돈과 밥을 벌기 위해 잠시 머물다가, 또 떠나며 살고 싶었다. 태어난 가족과 24년, 내가 만든 가족과 24년을 살고, 이후 14년간은 대체로 2년마다 이주를 하고 있다. 잘 떠돌기 위해서는 짐 없이 한 칸 방에 혼자 사는 것이 좋고, 구경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 구경꾼이 되려면 호기심과 더불어 자기 시선이 있으면 된다. 문을 열고 나와 사람과 새상을 구경하고, 문을 닫고 들어앉아 구멍 하나를 벼려 사람과 세상을 기록한다.” -p.6

“‘좋은 여자’, 특히 ‘좋은 엄마’란 막중한 이데올로기의 문제다. 당사자 여성뿐 아니라 모든 사람마다 해석이 제각각이며, 한 사람 안에서도 이성과 감성이 서로 배반하는 소리를 내기 일쑤다. 나 역시 내 생애 동안 그 해석을 계속 이동해왔고, 앞으로도 얼마만큼은 계속 이동해갈 것이다. (...) 만 예순을 한 해 넘기고 자녀들이 37세와 34세인 지금도 그런 꿈을 꾸는 것은 ‘좋은 여자’, 그중에서도 특히 ‘좋은 엄마’에 관한 스트레스나 콤플렉스가 내 속에 지독히 뿌리 깊게 남아 있다는 증거다. 내면이 그렇다는 것은 일상의 경험이 그렇다는 것이다. ‘좋은 여자’와 ‘미친년’사이를 널뛴 기억들. 혹은 지금도 여전히 내 일상 한 귀퉁이에 그 ‘좋은 여자’와 ‘미친년’이 웅크리고 숨어 있다.” -p.16

“죄책감은 훈련되고 학습된 (사육된) 수치심일 수 있다.” -p.17

“이질감. 오로지 감정적이기만 할 수 있는 사람들에 다한 이질감 혹은 이물감이다. 모두가, 거의
대부분이 저러는데, 나는 그렇지 않음에서 오는 거리감이다. 이 느낌은 당연하다. 이질이고 이물이다. 다르다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불안 역시 당연한 느낌이자 상태다. 불안은 자기와 다른 무엇을 스치는 순간 모든 생명체가 갖는 자기 보존 본능이다. 피하지 않고 대면하는 것이 최선이다. 그 불안을 응시하며 스스로 걸어 들어가고 스스로 걸어 나오면서 사람은 성숙해질 수 있다. 피하는 것은 오히려 미숙이거나 퇴행이다.” -p.18, <‘좋은 여자’와 ‘미친년’ 사이>

“나는, 노숙인을 두려워한다.
나는, 노숙인을 혐오한다.
나는, 글에서 만나는 노숙인은 심지어 편까지 드는데, 길에서 만나는 노숙인은 피하고 본다.
나는, 두려움과 혐오를 티 내지 않고 감춰서, 문제에 휘말리지 않는다.
나는, 나 대신 남에게 위험 가능성이 옮겨지는 것에 대해 다행이라고 느낀다. 예순의 페미니스트 여성이 십대 중반의 여성에게 위험을 밀어낸다.
나는, 내 안녕이 확보되는 사람만 만나고자 한다.
나는, 멀었다.” -p.40, <두려움과 혐오를 티 내비 않고 감춰서 문제에 휘말리지 않은 날에 대한 되새김질>

“미움은 잘만 풀면 자기 삶을 만드는 힘이 된다. 고부 갈등을 부계가족 내 여성 간의 불화와 시기로만 보는 것은 협소하다. 각자를 지키는 힘도 되었고, 복종이 아닌 연민과 성찰의 마음도 키워주었다.” -p.82, <내 삶은 거럴 우예 다 말로 합니꺼?>

“문제의 핵심은 독신이어서 더 성스럽고 신스럽다고 포장된 남자들이, 크고 작은 조직의 대장 자리를 모두 차지하고 앉아 있는 천주교 조직 자체다. 그 남자들이 없으면 제사(미사)조차 못 지내는 퇴행적이고 자폐적인 성차별적 집단이며, ‘아버지’ 하느님과 ‘아들’ 예수를 내세워 남성 권력 카르텔을 대물림했다고 21세기에도 우기는 희귀한 조직이다.” -p.114, <한만삼을 빼돌린 형들 조직>

“‘폐경기’라는 용어가 문제적이라고들 한다. 물론 ‘완경기’는 여성의 나이듦을 긍정적으로 설명하는 좋은 용어다. 하지만 나는 ‘폐경기’라는 용어가 부정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닫히거나 끝나는 것은 단지 현상으로, 그 자체는 부정도 긍정도 담고 있지 않다. 닫힘과 끝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선 자체가 정상 이데올로기에 갇혀 있다는 생각이다. 늙음과 죽음은 당연히 오는 것이며, 오는 김에 잘 겪어 좋은 것을 추려내면 된다.” -p.132, <그래 갱년기야, 내 몸 안에서 놀아라>

“내가 그녀에게 바라는 것은, 그녀가 너무 어렵지 않게 죽음에 닿는 것이다. 이미 많이 어려워졌지만 더 심하게 어렵지는 않기를, 스스로를 비참하게 느끼며 존재하지는 않기를 바란다.” -p.204, <엄마의 해체를 관찰하며>

“‘자식의 도리’, ‘혈연의 도리’, ‘생명에 대한 도리’ 등 천부적이라나 징그럽다나 하는 도리들에서, 나는 어떤 긍과 부를, 거짓과 참을 구분해낼 것인가? 개인과 개인, 개인과 사회 사이의 모순과 갈등과 권력관계 속에서, 갈수록 불가항력이 되는 빈과 부의 차별과 불공정 속에서, 자와 타의 뒤엉킴과 거리 석에서, 젊은 시절의 기여와 돌봄 베풂과 늙은 시절의 무능과 돌봄 받음 속에서, 한 사람이 죽어가는 데 드는 물적-심적 비용에는, 죽음에 닿을 때까지 자신과 타인이 지불하는 모든 비용에는 어떤 윤리와 공공성이 있는 것인가? 있어야 하는가?” -p.205, <엄마의 해체를 관찰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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