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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혜 Dec 08. 2018

귀신들의 대화

<바르도의 링컨>을 읽고

조지 손더스의 <바르도의 링컨>을 읽었다. 2017년에 맨부커상을 수상하고 평단으로부터 온갖 찬사를 들은 작품인데다가 인터넷 서점 리뷰에 달린 독자들의 반응도 매우 좋아서 기대가 컸다. 그런데 읽다보니 이게 무슨? 비평가들은 그렇다치고 일반독자들이 이걸 재미있어 했다고?? 정말??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뭐라는거야 하고 중얼중얼하면서 꾸역꾸역 100페이지 가량을 읽다가, 깨달았다. 무슨 상황인지. 첫페이지로 돌아가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그제야 내용이 머리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웬만한 소설들은 아무 정보 없이 그냥 읽는게 재미있다. 그러나 이 작품의 경우 사전 정보 없이 읽다보면 나처럼 헤매게 될 가능성이 있는데, 일단 직접적인 화자(소위 말하는 1인칭, 2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과 같은)가 단 한차례도 등장하지 않고 오로지 인물들의 대화에 의지해서 내용이 이어진다. 게다가 그 인물이 수시로 바뀐다. 지시문만 없다 뿐이지 희곡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이다. 게다가 인물들이 뭔 말을 하는지 대체 알아들을 수가 없는데 이것은 책을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실제로도 그들이 사리에 안 맞는 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름 아닌 귀신...아니 영혼이므로. 정신 나간 영혼들이 자기들끼리 하는 맥락없는 대화를 들으면서 내용을 따라가야 하는 셈인데, 낯설고 이상하게 느껴지는게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역사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알 수밖에 없는 그 이름,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링컨에게는 아들이 세명 있었는데, 막내 아들이 11살에 병에 걸려 죽었다고 한다. 아들을 잃은 뒤 링컨 대통령의 상심은 엄청나서 한밤중에 홀로 아들이 묻힌 공동묘지를 찾아오기도 여러번이었다고. 작가인 조지 손더스는 이 이야기에서 착안하여 묘지를 떠돌고 있는 귀신 영혼들의 이야기를 그려낸다. 바르도의 링컨에서 ‘바르도’는 사후 세계와 현실 세계의 경계에 있는 공간을 의미하며 일반적인 경우 죽은 뒤 49일동안 이 바르도의 세계에 머문다고 한다. 하지만 이 소설에 등장하는 영혼들은 모두 제각각의 이유로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기에 성불(...)하지 못하고 49일이 지나고서도 묘지를 떠돌아 다니고 있다. 책을 번역한 정영목 번역가는 미국판 <신과 함께>라고 평했는데, 참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낯설지만 일단 이 형식에 익숙해지면 매우 재미있다. 아무래도 영혼이다 보니 살아있는 사람들과는 다르다. 사고가 죽을 당시의 특정 시점에 고정되어 있다. 죽은 방식에 따라 모습도 다들 기괴하다. 대들보가 성기에 내려앉아 죽은 사람의 경우 알몸인데 성기의 사이즈가....음...자세한 내용은 생략. 동성에 대한 사랑을 비관하여 죽은 이의 경우 눈알이 막 수백개씩 달려있으며 어떤 이는 떠돌아다닌지 너무 오래되어 회색 줄과 같은 가느다란 형체만이 남아있기도 하다. 그 과정에서 제각기의 캐릭터를 지닌 귀신 영혼이 들려주는 생전의 이야기들이 하나하나 흥미롭다.

물론 그러한 제각기의 사연들은 실은 모두 곁다리이고 메인 줄거리는 책의 제목이자 소설을 쓴 주된 모티브인 링컨 대통령과 그의 아들 윌리 링컨의 이야기이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심정만큼 끔찍한 것이 없지만 또 자칫하면 신파로 표현될 수 있는 부분을 이 소설은 매우 영리하게 풀어낸다. 다름 아닌 영혼들의 입을 통해서. 영혼들은 여러가지 이유로 링컨 대통령의 몸에 들어가는데, 그렇게 한다고 우리의 상식(?)처럼 빙의가 되는 것은 아니고, 당사자의 심정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상태가 된다. 사랑하는 어린 아들을 잃은, 남북 전쟁의 한가운데에서 고뇌하는, 링컨 대통령의 속마음을 유령의 입으로 듣는 장면이 매우 인상적이다.

작가인 조지 손더스는 이 작품을 쓰는데 무려 5년이 걸렸다고 한다. 다 쓰고 나서도 본인 외에 이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지 걱정했다는데....익숙해지기까지 시간이 걸리지만 일단 발동(?)이 걸리면 매우 재미있다. 게다가 희곡처럼 구멍(?)이 숭숭 뚫려있어 페이지가 상당히 빨리 넘어가는 것이 장점이라면 장점이다. 500페이지이지만 텍스트의 분량으로만 따지면 아마 200페이지 내외의 소설과도 비슷할 듯. 호화 캐스팅의 오디오북으로도 유명하다. 찾아보니 벤 스틸러, 줄리안 무어, 그리고 작가 본인 등이 출연했다.


밖에서는 올빼미가 소리를 질렀습니다.
나는 우리 옷에서 올라오는 냄새를 의식하게 되었습니다. 리넨, 땀, 보리.
여기에 다시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링컨 씨는 그런 생각을 하더군요.
그런데 여기 와 있어.
마지막으로 한 번만 보려고.
그러고 나서 병자-상자 앞에 시골사람-쭈그리기를 하고 앉았습니다.
아이의 작은 얼굴을 다시 보려고. 작은 손을 다시 보려고. 여기 있구나. 늘 여기 있을 거야. 바로 이렇게. 웃음기 없이. 영원히 없겠지. 입은 꾹 다물고. 잠을 자는 것처럼 보이지 않아 (아니야). 이 아이는 입을 벌리고 자고 꿈을 꿀 때면 얼굴에서는 여러 표정이 장난을 치고 또 가끔 실없는 소리를 몇 마디 내뱉기도 했어.
나사로 같은 사람이 정말로 있었다면, 당시에 유효했던 조건들이 지금 여기서 유효하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을 텐데. -p.347

아이는 무에서 와서, 형태를 띠고, 사랑을 받고, 언제든 무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어.
다만 그렇게 빨리 돌아갈 거란 생각을 못했던 거지. -p.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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