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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혜 Dec 06. 2018

지구 정반대에서의 일기

<한국에 삽니다>를 읽고

오래전 일본 친구가 놀러왔을 때의 일이다. 여기 저기 돌아다니다가 버스를 탔는데 갑자기 그가 이런 말을 했다. 왜 한국 남자들은 다 똑같은 옷을 입고다녀? 무슨 소리냐고 물었더니, 왜 죄다 체크무늬 셔츠에 면바지를 입고 백팩을 메고 있느냐는 것이다. 에이, 아니야 하면서 주변을 둘러보는데 진짜로 죄다 체크무늬 셔츠에 면바지, 그리고 어김없이 백팩을 메고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참고로 대학가를 주로 도는 750번 버스였다.) 같은 동아시아 국가  출신에 비슷한 문화를 공유한다는 일본인 역시 결국은 외국인인 것이고, 외국인의 눈에는 해당 문화의 특성이나 자국과 다르게 튀는 지점이 바로 보이는구나 싶은 생각을 했었다.

콜럼비아 작가인 안드레스 솔라노는 10여년 전 번역원의 초빙으로 한국에 방문했다가 한국어 강사였던 이수정씨를 만나 결혼하게 된다. 그리고 두 사람은 콜럼비아에 건너갔다가 다시 한국에 들어와 생활한다. 아내는 한국어 강사로, 그는 (프리랜서 작가라고는 하지만) 반 백수 상태로. <한국에 삽니다>는 그가 한국에 두번째로 들어온 뒤, 이태원에 집을 얻고, 거기 살면서 보고 듣고 느낀 점을 기록한 책이다. 초기에는 일거리가 없어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하기도 하고, KBS에서 라디오 스페인어 디제이의 대타로 활동하기도 한다. 그 와중에 틈틈이 글을 쓰거나 강의를 하며 생활비를 벌고. 콜럼비아에서는 이 책으로 문학상을 수상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에 소개되는 것은 처음이다.

애초에 외국인들이 바라보는 한국은 흥미로울 수밖에 없는 주제이다. 한국인에게는 당연한 일상이, 아니 의식조차 못하는 어떤 부분이 그들에게는 당연하지 않고, 그 간극은 우리에게 재미를 준다. <미녀들의 수다>나 <비정상 회담>같은 프로그램이 꾸준히 인기를 얻는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다만 <한국에 삽니다>는 기존의 외국인들이 등장하는 프로그램이나 기행문(?)등과 다르게 “내가 본 한국”에서 끝나지 않고 “한국에 살고 있는 나 자신”으로까지 이어진다. 콜럼비아의 반대쪽에 있는 낯선 곳. 그곳에서 철저한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자신.

워낙에 흥미로울 수밖에 없는 주제인데다가, 작가가 매우 유머러스하고 시니컬한 덕분에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특히 그가 살았던, 여전히 살고 있는, 이태원은 내가 유년시절을 보낸 공간으로, 나에게는 더 특별하게 와닿았던 부분이기도 하고, 한국의 성매매 문화를 바라보는 시선이나 에로 비디오 등의 ‘특징’을 파악하는 부분에서는 작가 특유의 예리함이 느껴져서 매우 감탄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중간중간 깜짝 놀랄만한 대목들이 있다. 길에서 마주친 낯선 여성을 보고 낭만적인 상상을 하는 부분이라든지, 과거에 어떤 여성과 모텔에 갔던 경험을 말한다든지, 아내와 혹시라도 바람을 피게 될 가능성을 두고 나눈 대화라든지 등등. 그도 그럴 것이 번역을 아내인 이수정씨가 직접 했기 때문이다. 물론 부부사이는 두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일이기에 독자인 나로서는 뭐 할 말이 없지만서도, 이런 부분까지 이렇게 솔직하다니 하면서 헉 하고 놀라는 나는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또한 한국에 살고 있는, 명색이 작가이지만 한국어를 못하므로 스페인어로 번역된 작품만 읽었던 지라 그가 아는 한국작품이나 한국작가는 많지 않은데, 한동안 말이 많았던 고은 시인과의 에피소드가 나온다. 그런데 그게 또 참으로 일관성이 있다는 것이...부산 국제 영화제에 갔다가 김기덕 감독을 만난 이야기도.옆에 서 있는데 이상한 냄새가 났다고 한다. ㅋㅋ 하필이면 왜 그런(....) 사람들만 만난 것인지는 모르겠다. 참고로 책에서 아내가 본인보고 일본 배우인 오다기리 죠를 닮았다고 이야기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찾아보니 정말 꽤 닮아서 오- 싶었음. 무척 재미있지만, 마냥 가볍지만은 않아서 여러모로 추천하고싶은 책이다.


저자 안드레스 솔라노



아무 생각 없이 민희의 볼에 입을 맞추며 작별 인사를 했다. 한국에선 아주 이상한 행동이다. 친구들 사이에서도차도. 장모님과 처음 작별 인사를 할 때 똑같이 했는데, 그때 장모님의 놀란 얼굴이란. 여기서는 포옹도 하지 않는다. 공손한 고개 인사, 손을 머리 위로 들기, 미소와 함께 어깨 두드리기가 전부여야 한다. 입맞춤은 절대 없다. 그러나 내 잘못은 아니다. -p.28

내 한국어 실력은 유아기를 조금 벗어난 수준이다. 술집에서 맥주를 주문하고 재떨이를 부탁하는 수준의 아기. 아주 가끔 복잡한 길거리나 지하철 문 잎에서 두려움을 잊고 입을 연다. 어쩌다가 배운 말도 안 되는 문장이 뇌에 들러붙어 식당의 식탁이나 의자 아래에 붙은 껌처럼 비밀스러운 삶을 산다. 예를 들어 이런 문장들 말이다.
“죽을 시간 있어요?” -p.29

내 역할이 제자와 관계를 맺는 외국인 교수라는 걸 그가 영어로 설명했을 때, 데뷔 무대가 이렇게 극단적이어도 되나 하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무명에서 불명예로 직행. “오케이, 하겠습니다”라고 응답했을 때까지만 해도 진짜로 벌어질 일에 대해선 예상치 못했다. (....) 첫 컷에서 목소리가 떨리는 게 느껴졌다. 감추려고 노력했지만 소용없었다. 대사를 끝내자 감독은 박장대소했다. 야구 모자를 돌려 쓴 뚱뚱한 촬영감독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속으로 저주를 퍼부었다. 감독은 내게 자신감을 가지고 자연스럽게 연기해보라고 말했다. 같은 장면을 다섯 번 정도 반복했다. 다음 장면에서는 여학생 뒤로 다가가야 했다. 등에 내 가슴을 딱 붙이고 다시 더러운 말들을 내뱉어야 했다. 원칙적으론 아까보다 긴장이 풀리는 게 맞다. 나는 지금 한국에서 영화를 촬영하고 있다! 더 잃을 것이 없다! 하나, 둘, 셋, 액션. 엉망진창이었다. “성폭행을 시도하라고! 어루만지지 말고!” 감독이 소리쳤다. -p.35

한 코미디언이 온갖 곳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텔레비전 쇼에 나오는 그와 그의 무리다. 그들은 모든 종류의 광고판에 나타난다. 조미료, 세탁기, 기저귀, 생명보험 등. 조금만 더 실험적인 광고주가 있었다면 그들을 생리대 광고에 썼을 판이다. 충분히 많은 돈을 버는게 분명했지만, 성에 차지 않는지 각자 따로 여러 상품에 얼굴을 비춘다. 쌀, 김치냉장고, 자동차 윤활유, 화장실 청소 용품 등등. 1년에 3일밖에 휴가가 없는데 그마저도 제대로 보내지 못하는 컴퓨터 앞 지박령 같은 한국 회사원들보다 더 오랜 시간 노동을 하는 게 분명하다. -p.59

이 판화 컬렉션이 대중에게 전체 공개되는 건 처음이라고 한다. 이전까지는 전라를 포함해 섹스와 관련된 기획은 한국 사회에서 극단적 주의를 요했기 때문이다. 사실, 주의를 요구한다기보다는 이중적인 도덕성에 가깝다. 보티첼리의 ‘비너스’를 텔레비전에서 보여줄 때는 음부를 모자이크 처리하면서, 단란주점이나 30분 키스에 돈을 내는 키스방을 비롯한 성매매와 관련된 홍보 카드들은 길바닥에 넘쳐난다. -p.52

수정을 알기 전에 만났던 한 한국 여자와 모텔에 간 적이 있는데, 집채만 한 플라스마 텔레비전이 있었다. 한국 포르노 영화가 나올 때까지 채널을 돌렸다. 일본 에로와 마찬가지로 중요 부위는 가려져 있었다. 진짜 이상한 건 모든 장면에 등장하는 여자들이 자고 있거나 술에 취한 도중에 섹스를 강요당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또 많은 커플들이 섹스하기 전이나 하고 난 후, 소주를 마시면서 혹은 이야기를 나누다가 서로 뺨을 때렸다. 외국에서 산 경험이 있고 전혀 보수적이지 않던 그때 그 여자는 저 영화만 저런 건지 아니면 반복되는 패턴인 건지 나에게 설명해주지 못했다. 그 친구는 한국 에로 영화를 처음 본 것이었다. -p.53

그러다가 매년 3월 초 한국과 미국이 연합 훈련을 시행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치 이를 닦는 것처럼 연례행사로서 매년 해야만 하는 것인데, 이때마다 북한 정부는 “제국주의의 공세와 허수아비 같은 남한 정부의 비겁함을 향해” 최대치의 경고를 보낸다. 어찌보면 남한사람들은 군사 비행기와 군함들이 움직이는 걸 보면서, 그리고 평양으로부터 귀 찢어질 듯한 선포를 들으면서 봄이 도래했음을 공식적으로 아는 것이다. 아무튼, 드디어 조금 따뜻해졌는데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겠는가? -p.73-74

나는 멀리서 들려오는 총소리에 익숙해지고 싶지 않다. 물론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안다. 나는 콜롬비아 사람이고, 90년대 보고타의 고등학교에서 폭탄 테러에 대비한 모의 훈련을 한 뒤 록 콘서트에 가곤 했고, 대통령 후보가 암살당했다는 뉴스를 보고서도 친구들과 공원에서 술을 마시는 그런 곳에서 평범한 삶을 살던 소년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한국 사람들을 이해하고 전쟁의 위협이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이들의 일상도 이해한다. -p.76-77

이 모든 것들의 주변에는 아줌마들이 있었다. 버섯 군락지 같은 하위문화로 가득한 일본과는 또 달리, 한국에서 발견한 이 집단은 자신들만의 규칙과 자신들만의 차림새와 자신들만의 욕설을 고수한다. 아줌마가 되는 것이란 세상을 살아가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해남에서 목격한 세 명의 승객들은 아줌마로서의 자격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형형색색의 바람막이와 둥그런 고무 굽이 피곤을 줄여주는 신발, 짧은 파마머리, 거기에 절대로 빠질 수 없는, 한국에서만 발견되는 마치 신분증과 같은 아이템을 장착하고 있었다. 바로 선캡이었다. -p.125

지난 몇 주간 너무 많은 한국 범죄 영화를 보았다. 몇 시간을 스크린 앞에서 보낸 덕분에 한국어도 몇 마디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욕 말이다. 어제는 나도 모르게 한국 건달이 쓸 법한 욕을 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양파를 튀기던 중 기름 한 방울이 튀었는데, 너무도 자연스럽게 소리쳐버렸다. 씨발! -p.138

몇 년 전 한 여배우가 남편을 속이고 팝페라 가수와 외도를 한 혐의로 징역 8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형을 선고하면서 유교 문화로부터 내려온 사회적 질서, 즉 가족이라는 제도를 보호하기 위해 간통죄가 있음을 강조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엔 같은 죄목으로 잡혀간 남편들은 드문 것 같다. 어찌하였든, 한국에서의 불륜이란 단순한 외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첩을 두는 정도의, 혼인 외 따로 살림 비슷한 것이어야 함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으면 매춘이 불법인 이 나라에서 눈만 돌리면 보이는 매춘 여성들의 존재를 설명할 길이 없다. -p.144

20층을 올라가는 동안 자신의 존재에 대해 지나치게 의식하는 이 기분이 너무도 끔찍하다. 한국에서  이방인으로 살다 보면, 어떨 땐, 납으로 된 옷을 입은 것만큼 무겁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콜롬비아에 살았을 때 그토록 바라던 것이다. 반대편 땅의 끝에 존재하는 것. 주름 속에 존재하는 것. 타인이 된 것 같은 기분 말이다. -p.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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