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부탁>을 읽고
수능이 끝나고 난이도 관련하여 논란이 많았다. 특히나 언어영역 31번의 경우 가장 어려웠던 문제로 꼽히면서 한동안 화제가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언어가 아닌 물리 문제라고 이야기하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그 정도도 읽어내지 못하면 난독증이 있는 것이라며 우리나라 사람들의 실질적 문맹률을 준엄히 꾸짖기도 했다. 물론 많은 한국인이 실질적 문맹인 것은 맞지만(포탈에 실린 기사의 댓글을 보라) 31번 문제를 예시로 드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개인적으로 31번 문제의 지문을 보고 상당히 ‘나쁜’ 글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문제의 난이도와는 별개의 이야기이다.
<초등학교 교육 과정>에서는 글쓰기의 본질을 두고 이러한 설명을 한다. “쓰기는 쓰기 과정에서의 문제를 해결하며 의미를 구성하고 사회적으로 소통하는 행위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글의 기준도 이와 상통한다. 1) 의미의 전달이 명료하고, 2) 진실성이 있고, 3) 타인이 생각해보지 못한 지점을 이야기하는가의 여부.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지만, 적어도 글쓰기와 읽기에 있어서 ‘소통’이라는 목적이 잊혀져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수능의 목적은 학업성취도를 평가하는 것이고, 수많은 학생들 사이에서 변별력을 갖추려면 어렵고 난해한 문제 또한 필요한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어렵고 난해한 문제가 반드시 배배 꼰 나쁜 문장을 통해서 출제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읽기와 쓰기를 배우기 위해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만, 정작 그 본질과는 상당히 떨어져 있는 경우가 많다. 어려운 이야기를 하면 괜히 유식하거나 똑똑한 사람으로 비추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고, 글 좀 쓴다고 자신하는 사람들 중에 일부러 배배 꼰 이상한 문장으로 이야기하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본다. 쉽고 단순한 문장은 ‘쉬운 글’로 폄하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쉽고 단순한 문장으로 쓰여졌다고 하여, 읽기 쉽다고 하여, 그것이 ‘쉬운’ 글이 되는 것은 아니다.
황현산 선생의 <사소한 부탁>은 좋은 글이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교본과도 같은 책이라고 할 수 있다. 2013년부터 돌아가시기 전인 2017년까지 선생이 이곳 저곳에 기고한 칼럼 및 평론을 모아놓은 책이다. 읽다보면 어떻게 이렇게 읽기 쉽고 편안한 글을 쓸 수 있는지 감탄하게 된다. 문장은 짧고 단순하며, 대부분 아주 쉬운 단어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모든 단어가 제각기 반드시 있어야 할 자리에 위치해 있어 거슬림이 없다. 문장과 문장, 문단과 문단은 물 흐르듯이 유기적으로 연결된다. 이와 같은 자연스러운 흐름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한 편의 글을 탄생시킨다.
그러나 읽기 쉬운 글이라고 쉽게 쓰여진 것은 아니다. 책에 담긴 글들을 읽으며, 피카소의 유명한 에피소드가 떠올랐다. 어느날 공원에 있던 피카소에게 한 여성이 다가와 자신을 그려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그러자 피카소는 5분 정도 시간을 들여 초상화를 그려주고는 500만원을 요구했다고. 5분 쓴거 가지고 너무하는거 아니냐고 항의하는 여성에게 피카소는 지금 사용한 것은 5분이지만, 이렇게 그릴 수 있게 되기까지 50년을 노력했다고 대답했다 한다. 이처럼 명료하고 아름다운 글을 쓰게 되기까지의 사유와 성찰에 대해 생각해보니, 그 깊이가 차마 짐작도 하기 어려울만큼 어마어마하게 느껴졌다.
하여간에 책을 읽을 때는 기억에 남는 좋은 문장을 메모해두곤 하는데, 받아적을 문장이 너무 많아서 괴로웠던, 그런 책이다. 날카롭고 다정하고 그러면서도 품위가 있는 글. 읽을수록 글쓴이의 부재를 아쉬워하게 되는 그런 글들이었다. 책의 말미에 실린 각종 시집과 소설책에 관한 평론들은 다른 글들보다 조금 어렵기도 하고 평론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라면 생소할 수 있지만, 그리고 책 전체적인 느낌과 조금 맞지 않는다는 아쉬움이 남기도 하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충분히 읽어볼 가치가 있다. 특히나 어떠한 형태로든 글을 쓰고 있고, 글을 쓰고 싶은 사람들이라면.
인성교육이란 폭넓게 말하면 인문학 교육이고, 인문학이란 결국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하려는 생각을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기르는 공부다. 사람은 산업 역군이기 전에 사람이고 국가의 장성이기 전에 사람이다. 어떤 정책이나 정치적 이념에 맞게 사람을 교양하려는 시도는 벌써 사람을 배반한다. 사람이 국가나 제도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나 제도가 사람을 위해 있다는 것은 지극히 명백한 진실이고, 그래서 잊어버리기 쉬운 진실이다. -p.113, <인성 교육>
한 인간의 내적 삶에는 그가 포함된 사회의 온갖 감정의 추이가 모두 압축되어 있다. 한 사회에는 거기 몸담은 한 인간의 감정이 옅지만 넓게 희석되어 있다. 한 인간의 마음속에 뿌리를 내린 슬픔은 이 세상의 역사에도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믿어야 할 일이다. 한 인간의 고뇌가 세상의 고통이며, 세상의 불행이 한 인간의 슬픔이다. 그 점에서도 인간은 역사적 동물이다. -p.169, <슬픔의 뿌리>
모든 인간은 자기 안에 타자를 품고 산다. 자기이면서 자기인 줄 모르는 자기, 자기라고 인정하기 싫은 자기가 자기 안에 있다는 말이다. 이 자기 안의 타자는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는 우리의 의지를 훼방하지만, 많은 창조자의 예에서 보듯이 때로는 의식과 의지가 이룰 수 없는 것을 이 타자가 이루어내기도 한다. 이 점은 국가와 같은 거대 집단에서도 마찬가지다. ‘명석한 독재’가 정연하고 잘 계산된 가능성의 기치를 내걸고 실패할 때, 반항하는 사회적 타자들의 들쑥날쑥한 정신은 명석한 정신의 계산 밖으로 밀려났던 무한대의 가능성을 여전히 끌어안고 있다. 미래의 희망이 사회적 주체보다 사회적 타자에게서 기대되는 이유도, 민주주의가 가장 훌륭한 정치체계인 이유도 여기 있다. -p.173, <두 개의 시간>
불행한 일을 당하면 누구나 그 불행을 책임져야 할 사람을 찾아내고 싶어한다. 탓할 사람을 찾아내지 못한 불행은 지금 눈앞에 닥친 불행보다도 더 고통스럽다. 미국 사회에서 깊은 절망에 빠져 있는 중하류층 백인들에게 샌더스는 그 책임이 그들에게사 돈을 빼앗아간 월가의 부자들에게 있다고 말하고, 트럼프는 그들에게서 일자리를 빼앗아간 이민자들에게 있다고 말한다. 비슷한 처지에 있는 한국의 젊은 남자들은 잘나가는 여자들과 페미니스트들에게 그 책임을 돌리려 한다. 그러고는 다시 왜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여성혐오의 혐의를 둘러써야 하느냐고 묻는다. 물론 그 혐오는 혐오가 아니라고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설명을 거치고 나면 말은 얼마나 힘을 잃는가. 여전히 바뀌지 않은 남성 중심 사회에서 우리가 어머니에게, 아내에게, 직장의 여성 동료에게, 길거리에서 만나는 여성에게, 심지어는 만나지도 못할 여자들에게 특별히 기대하는 ‘여자다움’이 사실상 모두 ‘여성혐오’에 해당한다. 나는 한 사람의 번역가지만 ‘여성혐오’라는 번역어의 운명을 가늠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 고통의 시대에 더 많은 고통을 받는 사람들의 불행을 그 오해 속에 묻어버리려는 태도가 비겁하다는 것은 명백하게 말할 수 있다. -p.185, <‘여성혐오’라는 말의 번역론>
문학과 예술이 한 시대의 윤리에 지배되는 것도 아니고, 그 윤리를 위해 봉사하는 것도 아니라는 말은 빈말도 헛말도 아니다. 그러나 이 말은 문학과 예술이 비윤리적이어야 한가는 말이 아니며, 윤리적 탈선을 진보적 윤리관으로 포장하는 데에 사용될 수 있는 말도 아니다. 문학은 한 시대의 윤리적 인습에 굴복하거나 봉사하지 않기에, 그 윤리의 뿌리와 현재적 의의를 성찰하는 여유를 확보한다. 그래서 문학은 근본적으로 윤리적이며 생생하게 윤리적이다. 윤리적 탈선이 권력의 위계에 이른다면 거기에서는 윤리의 뿌리도 생생함도 찾을 수 없다. -p.188, <문단 내 성추행과 등단 비리>
그들이 나치에 협력하였다는 것은 중요하다. 그것은 남자만의 세계가 남성적 폭력의 세계이며, 그 대대적인 폭력이 여성혐오의 극단적 확장이라는 것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자는 늘 실권을 장악하여 왔다. 권력을 얻고 누리기 위해서는 또 다른 권력이 필요하다. 권력에 대한 끝없는 갈망은 그 남성적 세계의 외부를 대상화하기 마련인데, 그 대상화된 세계가 이번에는 남자만의 세계를 승인하고 만다. 한 세계를 구성하기 위해서 여자를 수동적인 존재로 만들고, 그 수동적 존재들을 통해서 남성적 세계의 적극성이 확인된다는 말인데, 남자다운 세계는 남자답지 않은 세계를 끝없이 생산할 때만 존속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거기에 바로 남자다운 세계의 아이러니가 있다. -p.213, <풍속에 관해 글쓰기>
그러나 영원히 변함없는 사실이 있다. 살해된 여자들은 말할 수 있는 입이 없지만 남자 살인자들은 사랑의 서사건 증오의 서사건 자신의 서사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서사는 어느 나라 어느 남자를 막론하고 늘 똑같다. 남자에게 여자는 그가 가장 가까이에서 만나는 사회의 얼굴이다. 어렸을 때는 사회가 요구하는 것을 어머니가 대신해서 전달하고, 어른이 되어서는 사회가 요구하는 바를 아내가 대신해서 요구한다. 남자를 붙잡고 잔소리하는 여자나 거꾸로 남자에게서 해방되려는 여자나 본질적으로 그 요구 사항은 같다. 남자는 저 ‘명령하는 사회’를 자기 힘으로 파괴할 수는 없지만 여자는 만만해서 죽일 수 있다. - p.217, <희생자의 서사>
건강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며 미래 세계를 환상으로라도 본다는 것은 아직 오지 않은 그 세상을 마음속에서 살고 있다는 뜻이다. 진보주의를 삶의 방식으로만 말한다면 불행한 세계에서 행복하게 살기다. 한 사람의 진보주의자가 미래의 삶을 선취하여 이 세상에서 벌써 행복하게 살지 않는다면 그는 그 미래의 삶에 대한 확신과 미래 세계의 건설 동력을 어디서 얻을 것인가. 그의 존재는 이 불행한 세상에 점처럼 찍혀 있는 행복의 해방구와 같다. -p.257, <미래의 기억>
아는 것이 많고 문장이 유창하다고 해서 시인이나 소설가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인간만이, 마음속의 처절한 상처를 염소처럼 무심한 표정으로 말할 수 있는 인간만이 시인이 되고 소설가가 된다. 그래서 시와 소설의 진실도 아름다움도 인간의 처절함과 염소의 무심함 사이에서 결정된다. -p.312, <편집자 소설과 염소>
미당의 문학적 공로와 정치적 행적을 구분하자는 말도 있지만 그 구분은 불가능한 일이다. 비중이 크건 작건 그의 정치는 그의 문학적 영광을 등에 업은 것이어서 그에게서 그 경계가 뚜렷하지 않을 뿐더러 자신의 문학을 자신의 정치에 이용한 사람은, 아니 최소한 그렇게 이용당하도록 협조한 사람은 바로 미당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히려 미당을 옹호하기 위해서도, 비판하기 위해서도 그의 전모를 알고 그를 하나로 묶어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미당의 정치적 과오는 하나같이 우리의 역사적 비극과 연결돼 있다. 그 접점에서 미당은 옹호되고 비판돼야 한다. 미당의 과오를 그의 문학과 연결시켜 비판하고 그 결과를 역사적으로 정리하자는 것은 그의 업적을 폄하하자거나, 그의 명예에 먹칠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 고뇌의, 혹은 그 비겁함의 짐을 역사의 이름으로 함께 나누어 져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근대 문학이 그렇듯이 미당은 안타깝게도 흠집 많고 일그러진 진주지만 또한 안타깝게 여전히 빛나는 진주다. -p.330, <미당의 ‘그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