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기로 태어나서>
‘노동에세이’. 한승태의 <고기로 태어나서>에 붙어있는 부제이다. 닭, 돼지, 개 농장에서 일하며 동물들의 삶을 지켜본 기록에 대한 책으로 알고 있었는데 르포나 고발이 아닌 노동에세이라니, 왜일까. 표지를 펼치고 첫 페이지를 넘기기 전에 잠깐 그런 생각을 했었다.
다 읽고 난 뒤 생각해보니 그런 부제가 붙은 이유를 이해할 것만 같다. 본래 동물학대와 착취의 현장을 알리는 글을 쓰기 위해 의도적으로 양계장과 양돈장, 개 농장을 돌아다니며 취업을 했던 저자는 실제 일을 시작하자 처음의 원대한 포부, 동물들의 열악한 실상을 파악하고 이를 고발하고 동물들의 처우를 개선시키는,와는 백만광년쯤 떨어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악독한 자본가에 피도 눈물도 없는 동물학대범일 것만 같았던 농장주들은 대개가 근면성실한, 그럼에도 일한만큼도 제대로 수익을 올리기 어려운 구조에서 살아가는 한낱 부품과도 같은 사람들일 뿐이었으며, 불쌍하고 숭고하게만 느껴질 것 같았던 동물들 역시, 직접적인 돌봄과 노동의 목적물이 되자 공포나 혐오의 대상으로 전락해 버린다. 저자는 프로젝트를 시작하기 전 온갖 동물 농장을 돌며 동물을 긍휼히 여기고 동물권에 대해 민감한 의식을 가지길 기대했지만 정작 얻게된 결과는 ‘무감각함’이었다.
또한 저자가 농장에서 일하면서 무수히 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함께 생활했던 기록은 그야말로 인간의 ‘다면성’과 ‘입체성’을 보여주는 표본과도 같은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이주노동자를 혐오하는 사장은 젊은 시절 학생운동을 열심히 한, 5.18 당시 광주에 가려다가 실패한 사람으로 그러한 이력을 바탕으로 삼청교육대에 다녀왔다고 나온다. 한 집단의 인권을 탄압하는 사람이 다른 집단의 인권을 위해서는 누구보다 문제의식을 가지고 열렬히 희생할 수도 있는 것이다.
또 다른 아저씨는 이주노동자에 대해 차별 발언을 일삼지만 우연히 캄보디아인 아내와 결혼한 뒤, 그녀가 당한 부당한 대우에 맞서 누구보다 열심히 싸운다. 정작 이주노동자들을 차별하지 말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아무것도 못하는 사이, 차별과 혐오의 발언을 일삼던 사람들이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기대를 배반하는 아이러니한 사건이 책 속에서 수도 없이 일어난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이 책은 동물을 죽이지 말라거나, 육식을 하지 말라거나, 혹은 동물권이나 동물복지를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책은 아니다. 말 그대로 살아있는 동물들이 고기가 되기까지 농장에서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그 과정에서 사람은 어떤 일을 하는지가 상세히 그려지는데, 그것이 꽤나 끔찍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끔찍하지 않다. 결국 육식을 하는 1인인 나는 어쩌면 효율적이고 비용을 절감하기 위한 모든 과정을 낱낱이 알게 되면서 오히려 납득을 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 찜찜함 또한 남는다. 그건 이 책이 공장식 축산 자체의 문제점을 지적하거나, 육식을 하지 말자고 주장하거나, 동물을 보호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대신, 그 과정에서 망가져가는 개개인의 인간을 그려내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찜찜함이 이 책의 진정한 가치라고 생각한다.
더불어 저자의 뛰어난 유머감각은 이런 책을 읽으면서 재미를 느껴도 되는걸까 할만큼 큰 재미를 준다. 내용적인 측면을 떠나 읽는 재미를. 2018년에 읽었던 마지막 책인데, 정말 훌륭한 책이었다. 그 해의 책으로 꼽을 수 있을만큼. ⭐️⭐️⭐️⭐️⭐️
동정심도 그저 호감을 표현하는 방식 중 하나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닭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대신 이것들을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짓밟은 다음 저 산 너머로 차버리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만약 내가 이 닭들에 대해서 책으로 읽었다면, 누군가에게서 전해 들었다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들은 바로 내 눈앞에 있었고 너무나도 역겨워 보였기 때문에 혐오하고 두려워하는 것 말고는 다른 태도를 취할 수가 없었다. 케이지란 도구는 갇힌 쪽이나 가둔 쪽 모두에게서 최악의 자질을 이끌어 내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p.19
이빨이 잘생긴 남자가 이상형인 여성이 몇이나 될까 추측하는 동안 아저씨들은 자신의 치아 상태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씹을 때 크든 작든 고통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부분 어금니에 문제가 있어서 아주 약하게 씹거나 앞니로 씹었다. (....) 나는 치과에서 일하는 친척을 둔 덕분에 어릴 때부터 싼 가격으로 꾸준하게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그때까지 나는 내가 매번 제일 먼저 식사를 마치는 이유가 단순히 먹성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아저씨들은 이빨에 생긴 문제는 참을 수 있을 만한 불치병처럼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어서 좀처럼 병원에 가려고 하질 않았다. -p.58-59
내가 씁쓸했던 건 그들이 독재자를 옹호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하나같이 너무나 성실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부화장뿐 아니라 내가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후로 마주친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것이었다. 아저씨들은 혀를 내두를 정도로 열심히 일했다. 고용주나 직원이나 마찬가지였다. 휴식 시간도 상관없이 일하고 퇴근 시간도 없다시피 일하고 일주일에 하루쯤 쉴 만한데 놀면 뭐하냐며 일했다. 그리고 (적어도 내가 보기엔) 일한 것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보상을 받았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신들이 누리는 그리 대단할 것 없는 풍요가 다른 누군가의 덕택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p.66
이것이 컨베이어 벨트 작업의 가장 파괴적인 영향력이 아닐까 싶은데, 일을 하다 보면 그냥 아무 느낌이 없어진다. 내 손으로 하는 행동인데 어떠한 실재감도 느껴지지 않는다. 수백 마리일 때는 병아리들이 지나가는 거지만 수천 마리일 때는 삑삑대는 인형들이 지나가는 거고 수만마리일 때는 노란 털 뭉치들이 지나갈 뿐이다. 컨베이어 벨트에는 어떤 감정이건 그것이 얼마나 강렬했건 순식간에 무뎌지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p.88
가축 전염병이 발생하면 수백만 마리의 동물들이 생매장당한다. 매몰 처분을 하게 되면 땅을 파고 동물들을 쏟아붓고 다시 흙으로 덮는다. 이런 광경은 치솟는 고깃값에 대한 우려와 함께 사람들의 동정심을 자극한다. 땅속에 파묻힌 동물에 대한 관심은 개평마냥 찔끔찔끔 표현되는데 이마저도 현실과 동떨어지는 인식이라는 소리를 듣곤 한다. 하지만 그런 동물들이 약간의 관심이라도 받을 수 있는 것은 그들은 판매 가능한 상품이기 때문이다.
산란계 수평아리들에게 매몰 처분은 매일같이 일어나는 일이다. 그것은 쓰레기차가 여러분이 집 앞에 내놓은 쓰레기 봉지를 수거해 매립지에 쏟아붓는 것만큼이나 규칙적이고 또 지속적으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병아리들에겐 방송사의 카메라가 찾아가는 일도 없고 어떠한 경악도 우려도 이끌어내지 못한다. 이 병아리들도 똑같이 비명을 지르고 살려고 발버둥 치지만 말이다. 상품 가치가 없는 것은 연민의 대상도 되지 못하는 것이다. -p.93-94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제임스 본드가 하는 식으로 뒤에서 목을 잡고 비틀었는데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다음엔 손가락으로 숨을 막았다. 병아리들은 다리를 몸 위로 끌어 올려 어설프게 날카로운 발톱으로 손을 긁어댔다. 손을 풀 수밖에 없었다. 아파서는 아니었다. 그 느낀을 참을 수가 없었다. 손가락만 한 병아리가 어떻게든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그 느낌을. 비천할 정도로 나약한 존재들의 저항이 때로는 효과를 거두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들의 저항은 피부가 아니라 양심에 상처를 남기는 것이다. -p.100
내 일이 닭을 키우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거야말로 착각이었다. 이 곳에서 나의 보다 구체적인 역할은 닭을 죽이는 거다. (....) 병아리가 아무리 작아도 목이 아무리 부드럽게 찢어진다고 해도 살아 있는 동물을 죽인다는 느낌이 사라지진 않는다. -p.120
조금씩 전문 용어가 가지고 있는 마법 같은 힘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병아리들을 ‘처리’할 때는 죽인다. 잡는다고 하는 대신 불량품을 도태시킨자고 중얼거린다. 하자가 생긴 물건을 처리하는 거다. 이건 도태다. 도태, 도태, 도태. 어느 순간엔 정말 닭을 죽이는 것이 문서를 파쇄하거나 삼각 김밥을 폐기하는 것처럼 사무적으로 와닿을 때가 있다. -p.121
팀장은 내가 농장을 돌아다니면서 만난 사람들 중 가장 모성애가 강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더 흥미로웠다. 그녀는 작업 중에도 틈만 나면 자식들 얘기들 들려주고 내가 안쓰럽다며 일주일에 한두 번씩 반찬이나 국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게다가 그녀는 숙소에서 작은 몰티즈 한 마리를 기르고 있었다. 그런 팀장이 (비쩍 마른 몰티즈보다 100배는 더 귀여워 보이는) 자돈을 아무런 동요 없이 죽이는 걸 보면 일이란 것이 사람을 얼마나 무뎌지게 만드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p.187
자돈들이 가청 주파수의 한계치에 다다를 만큼 소리를 지를 때는 거세할 때다. 거세를 하는 이유는 카스트라토 합창단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웅취’라고 부르는 수컷 특유의 비린내를 줄이고 육질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서다. 꼬리나 이빨 자르기는 돼지를 위해서 필요할 수 있다고 항변해볼 여지가 조금은 있지만 거세는 오직 고기의 맛을 좋게 하려고 실시한다. -p.204
결국 차별은 혐오로 시작해서 사랑으로 완성된다. ‘다른’ 존재에 대한 혐오와 ‘우리 편’에 대한 사랑. 농장장이 어떤 식으로 남에게 비춰지든 간에 그가 나에 대한 호의에서 그렇게 행동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우리는 겨우 3일 전에 알게 됐을 뿐이지만 그에게는 그것이 ‘같은’ 한국 사람에 대한 도리였다. -p.218
차별에 구체적인 형태를 제공하는 것은 혐오지만 그것에 끈질긴 생명력을 부여하는 것은 사랑이다. 게다가 그런 사랑을 통해 얻은 이익을 거절하겠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등의 원칙에 공감하지만 자신이 혜택을 누릴 가능성이 명백한 경우엔 노골적으로 차별을 요구하기도 한다. 문제를 어찌해볼 도리가 없을 장도로 복집하게 만드는 것도 이런 지점이다. -p.218
사람들에게 그들의 혐오가 잘못되었다고 말하면 입을 삐죽거리고 속으로는 딴소리를 할지언정 고개를 끄덕이는 시늉이라도 하지 않을 수 없다. 반면에 그들의 사랑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거센 항의가 터져 나온다. 뒤틀리고 날이 서 있긴 하지만 그것 역시 사랑임에는 틀림없기 때문이다. -p.218
관리자가 구체적으로 반복해서 주의를 주지 않으면 직원들은 대개 돼지를 때렸다. 그들이 특별히 악랄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해야 힘이 덜 들고 조금이라도 빨리 일을 끝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나도 그게 잘못됐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빨리 끝마치고 쉬고 싶다는 생각에 무시해버렸다. -p.226
사장처럼 온화한 사람이 전기 충격기로 돼지를 찌르는 모습이 잘 그려지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 씨 이저씨나 강 부장이 조금이라도 폭력적이거나 거친 사람인 것은 아니었다. 그들에게 전기 충격기는 돼지라는 상품을 다루는 방식의 하나일 뿐이었다. 여기에 이곳 돼지 삶의 아이러니가 숨어 있었다. -p.262
강경의 사장은 돈밖에 모르는 인간이었다. 그에게는 사람보다 상품이 더 중요했다. 그는 우리가 절대 돼지를 때리지 못하게 했다. 상품에 흠집이 생기면 안 되니까. 그가 감시하는 동안뿐이긴 했지만 어쨌거나 농장의 원칙은 그랬다. 하지만 횡성의 사장은 사람을 물건처럼 대하지 않았다. 그가 물건처럼 다루는 것은 돼지뿐이었다. 그는 진심에서 우리가 너무 힘들게 일하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에 돼지를 때리는 것도 전기 충격기를 쓰는 것도 막지 않았다. 전자는 법적 책임을 피할 수만 있다면 누구든지 두들겨 팰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돼지에게 생채기 하나 생기지 않게 했다. 후자는 뺨을 얻어맞으면 자기가 뭘 잘못했나부터 고민할 사람이었지만 돼지에게 전기 충격 주는 걸 마다하지 않았다. -p.262-263
어느 과학자의 말을 바꿔서 표현해보자면 생명관에 상관없이 좋은 사람은 동물을 아끼고 악한 사람은 동물을 학대한다. 그런데 좋은 사람이 동물을 학대하는 경우, 그것은 대부분 동물은 물건이라는 믿음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p.263
나는 첫날부터 마음속으로 그를 얼마나 경멸했던가? 하지만 그는 꼬리와 뿔을 감춘 악마가 아니었다. 그는 내가 농장을 전전하며 만난 사람들 중에서 유일하게 용산 참사를 이야기하며 철거민 편을 든 사람이었다. 그의 이야기에는 연민이 느껴지는 대목도 공감이 가는 부분도 있었다. 나는 그가 불행한 사건을 저지르지 않고 재기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그가 다시 일어서기 위해 그 많은 개들을 짓밟아야만 했는지를 확신할 수 없었다. -p.336-337
“개 키우는 게 다 그런 거지 뭐.”
그 대답은 아무런 노력도 들이지 않고 흘러나왔기 때문에 더욱더 확신에 차 있는 듯이 들렸다. 내 자신이 쓸데없는 참견쟁이처럼 느껴졌다. 이곳의 물을 마시고 이곳의 쌀을 먹는 사람들이 괜찮다고 하지 않는가? 그런데 내가 뭐라고 그게 더럽고 끔찓하다고 난리란 말인가? 나는 주어진 조건 안에서 최선을 다해 생계를 꾸려가는 사람들을 이론서 한 귀퉁이에서나 찾을 수 있을 법한 기준을 가지고 폄하하고 있는 걸까? ‘다 그런 거지’라는 말속엔 내 비난보다 훨씬 더 거대한 존재에게 호소하는 울림이 있었다. 나는 대꾸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p.355
나는 비윤리적인 고기는 있어도 야만적인 고기가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개고기도 음식의 하나일 뿐이다. 개는 고래처럼 멸종 위기의 동물도 아니고 다른 한편으론 돼지도 개만큼 지능이 높고 사회성이 발달되어 있다. (그 사회관계 안에 인간이 포함되어 있지 않을 뿐이다.)
그렇지만 먹을 수 있다고 해서 반드시 먹어야 하는 건 아니다. 개고기는 긴 세월을 이어온 전통이지만 이를 구축해온 환경이 바뀌면 전통도 변하는 법이다. -p.454
나는 인간이 자연을 이용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는 선을 식탁의 영역에서 개고기에 그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닭이나 돼지와 달리 개고기는 일부 연령층에서만 소비하며 그 시기도 1년 중 여름에 집중되어 있다. 이러한 특징은 개고기에서 일반적인 식량의 맥락이 사라졌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개는 오직 맛, 미각의 쾌락을 위해 죽인다는 뜻이다. -p.455
닭이나 돼지는 얼마든지 먹어도 좋지만 개만큼은 안 된다는 말이 아니다. “뭔가 하나만 특별히 여기는 것은 위선 아니냐는 말을 들었어요. 하지만 모든 일에 관여하는 것은 불가능하죠. 모든 비극에 참여하려 했다간 역으로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한 가지만이라도 관여할 수 있으면 되는 겁니다.” 당장 모두가 채식을 할 수 있는게 아니라면 식량 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낮고 생물학적으로든 문화적으로든 인간과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는 동물부터 고기가 되는 운명에서 구제하자는 주장이 위선적이라는 비판을 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 우리가 이런저런 윤리나 논리에 대해 고민하는 이유는 모두에게 공평하게 잔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야기하는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서가 아닌가? -p.455
동물들과 마주하며 지냈던 시간은 나를 약자의 고통에 민감한 사람으로 만들지 않았다. 반대로 나는 무감각해졌다. 지난 몇 년간 내 삶을 관통한 가장 일관된 정서는 분명 ‘무감각함’일 것이다. - p.4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