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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혜 Jan 12. 2019

단정한 외로움에 대하여

<그대는 할 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를 읽고

허수경 작가, 흔히들 허수경 시인이라고 많이 부르지만 소설, 산문, 동화 등 여러 장르에 걸쳐 다양한 글을 썼으므로 실은 작가라는 말이 더 맞지 않나 싶다, 의 글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다. 누군가 인용한 구절을 스치듯 본 적은 있으나. 작년에 그녀가 병환으로 세상을 떠난 뒤, 모처럼 대대적으로 홍보하는 그녀의 책 몇 권을 주문해서 책장에 꽂아두었었다. 그러고선 언젠가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면서도 좀처럼 시간을 내지 못했었다. 가끔씩 오며 가며 생각날 때마다 한 두페이지 들여다보는 정도. 결국은 시집 보다 산문을 먼저 읽는다.

<그대는 할 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는 산문이라기보다는 시에 가까운, 말하자면 산문시에 가까운 짧은 글 150여편이 묶여져있다. 독일에서 생활하면서 적었던 기록인데, 어떤 글은 짤막한 일기 같고, 어떤 글은 그대로 시 같으며, 어떤 것은 단편소설 같기도 하다. 전체적으로 정갈하고 단정한 외로움이 묻어나는 글들을 읽으며 생각했다. 오랜 시간 이국을 떠돌던 그녀의 마음을. 외로움에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그 낯선 고독을 향해 계속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읽으면서 계속 박준 시인을 떠올렸는데, 말미에 박준 시인의 추천사가 실려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영혼의 빛깔이 비슷한 사람들끼리는 어떤 식으로든 표시가 나는 것인지.


⭐️⭐️⭐️



22. 이건 죽고 사는 문젠데

마당이 있는 집에서 살게 된 이후로 여름이면 올빼미를 본다. 녀석은 어둑어둑해지면 나타나서 마당 앞에 서 있는 나뭇가지에 한 반시간 정도 앉아 있다가 간다. 사냥을 나온 길이리라. 녀석이 앉아서 두리번두리번하고 있으면 나는 마음이 초조해진다. 이 마당에는 쥐도 몇 마리 사는데 그 쥐들이 제발 꽁꽁 숨기를, 그리고 올빼미가 그 쥐들을 발견하지 않기를 바라는 거다. 그러나 우리집 마당까지 먼길을 사냥 나온 배고픈 올빼미도 불쌍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과연 누구의 편을 들어야 하는가. 이건 죽고 사는 문젠데........ -p.51

23. 가소로운 욕심

기숙사에 살 때, 내 방에서 내려다보이는 풀밭으로 토끼들이 자주 나타나곤 했다.

어느 날 저녁, 시간이 없어서 저녁밥은 못하고 당근 오이나 잘라서 먹자, 하고 당근 껍질을 벗기다가 녀석들을 보았다. 나는 당근을 던져주었다. 오물오물 단방에 먹어치웠다. 그후로 자주 나타나서 내가 당근을 던져주면 오물오물 먹었다. 이제는 당근이 집에 없는 날에도 나타나서는 내 방 앞 잔디밭을 어슬렁거렸다. 따로 당근을 사들고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아무도 나를 기다리지 않는 기숙사로, 비록 당근 때문이지만 찾아오는 녀석들이 참 예뻐서 나도 모르게 욕심을 내고 말았으니.... 녀석들 중 두 마리의 목에다 리본을 달아준 거다. 한 녀석에게는 푸른색을, 한 녀석에게는 붉은색을. 여름 내내 우리는 참 친해졌다. 용하게도 녀석들은 언제나 리본을 달고 나에게로 왔다. 껑충거리면서도 잃어버리지 않았나보다. 어느 날 나는 기숙사 주차장에서 차에 치인 토끼를 보았다. 그리고 푸른 리본도 보았다. 나는 또 욕심을 내다가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이다. 내 것이라고 표시하기, 얼마나 가소로운 욕심이었는가, 마치 누군가를 사랑할 때, 내 것이라고 표시되기를 바랐던 그때의 눈먼 나처럼..... p.52-53


65. 고마웠다, 그 생애의 어떤 시간

그때, 나는 묻는다. 왜 너는 나에게 그렇게 차가웠는가. 그러면 너는 나에게 물을 것이다. 그때, 너는 왜 나에게 그렇게 뜨거웠는가. 서로 차갑거나 뜨겁거나, 그때 서로 어긋나거나 만나거나 안거나 뒹굴거나 그럴 때, 서로의 가슴이 이를테면 사슴처럼 저 너른 우주의 밭을 돌아 서로에게로 갈 때, 차갑거나 뜨겁거나 그럴 때, 미워하거나 사랑하거나 그럴 때, 나는 내가 태어나서 어떤 시간을 느낄 수 있었던 것만이 고맙다. -p.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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