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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혜 Jan 10. 2019

한국 남성을 이해하기

<한국, 남자>를 읽고

최태섭의 <한국, 남자>는 그 제목과 모 인터넷 서점의 마케팅으로 무척 논란이 되었던 책이지만, 한국의 성차별 문화를 비판하기 위한, 즉 페미니즘 서적은 아니다. 물론 제목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한국 남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긴 하나 그들 개개인을 탓하기보다는 구조적인 원인을 찾는데 초점을 맞춘다. 그들이 어떤 시대 역사적인 상황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는가를 분석하고 살피는 사회학 서적에 가깝다.

가부장제와 미소지니는 한국 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특성이지만 한국의 그것에는 보다 특수한 지점이 있다. 이것은 비슷한 정서와 문화를 공유하는 일본이나 중국과도 또 다르다. 한국의 여성혐오는 유교문화를 거쳐 식민지배, 전쟁 및 분단이라는 특수상황, 그로 인한 징병제도가 현존하는 문제와 결합되어 나타난다. 현재와 같은 세대간의 갈등, 첨예한 성대결 구도 역시 근본 원인은 짧은 시간 안에 격심한 변화를 겪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나는 혹자가 말하듯이 여성이 절대적인 약자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여성문제가 가장 시급한 사회문제라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남성들 개개인이 겪었을법한 부조리와 불합리, 착취와 결핍 역시 인정한다. 한국 사회가 겪어온 격심한 변화의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희생되었고, 그 중 여성 못지않게 고통받았던 남성들의 수가 적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 다만 문제는 그처럼 국가와 기득권으로부터 착취당한 것에 대한 남성들의 반동이 여성들에 대한 반감 혹은 여성들에게 보상을 기대하는 방식으로 구현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또한 군대 및 여러 인권문제에 있어서 변화에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 또한 예비역 및 같은 남성들의 목소리라는 것 역시 아이러니한 부분이다.

돈에 관한 유명한 실험이 있다. A와 B, 두 사람을 모아서 한 명에게 만원을 준 다음 다른 한 사람과 나누어 가지라고 말한다. 이 때 A는 B에게 얼마를 주어도 상관 없다. 단 B가 제시된 금액을 거부할 경우 A와 B 둘 다 한푼도 받을 수 없다. 실험결과, A가 B에게 준 금액의 평균은 4000원이었다고 한다. 얼마를 주어도 상관없음에도 무려 40%에 달하는 금액을 나누어 준 것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2500원 이하의 금액을 제안받은 사람들의 경우 대다수가 거부했다는 것이다. 100원을 받든 2000원을 받든 어쨌든 안 받는 것보다는 이득임에도 불구하고. 불평등한 분배보다는 차라리 다 같이 X되어 버리겠다는 믿음. 인간의 비합리성을 설명하기 위한 예시로 자주 활용되는 이 실험에서 나는 종종 한국의 여러 문제를 떠올린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이 책은 한국 남성들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해하기 위한 책에 가깝다. 이해하면 동의는 하지 않더라도 미워하지 않을 수 있으므로. 나는 사실 많은 한국 남성들의 마음을 이해한다. 신입사원 시절 처음 만난 나에게 인사 대신 어우 난 여대 나온 애들은 다 싸이코 같던데, 라고 말했던 그 대리를 이해한다. 그는 학생시절 열혈 운동권으로 노동문제를 논하는데 걸핏하면 성폭력 문제 등으로 태클을 걸던 여대 운동권 학생에게 뜨겁게 데인 경험이 있을지 모른다. 지금 노동문제랑 학생운동 문제가 중요한데 여기가 어디라고 시도 때도 없이 성폭력 하지 말라고 나대던 그 미친년이 그의 머릿속에 깊이 남아있었을 것이다. 처음 만난 25살짜리 신입사원에게 싸이코니 미친년이니 욕을 할 만큼 그의 마음에 깊은 상처가 남아있을지 모른다.

일주일 3회씩 있었던 회식에 한 번은 집에 일이 있어서 참석 못할 거 같다고 했더니 야 여자도 없이 어떻게 술을 먹냐 라고 했던 그 팀장을 이해한다. 그는 회사에서는 과로로 시달리지만 자신의 노고를 알아주는 이도 없고 집에 가본들 아내와 딸아이에게는 본 척 만 척 구박을 당하며 기댈 것은 술 뿐인데 그나마도 파탄난 인성 덕에 만나줄 친구가 없어 회사의 부하직원들만이 유일한 희망이지만 칙칙하게 남자들끼리 술을 먹는 건 차라리 안 먹고 말지 차마 못할 짓이므로 반드시 여자 신입사원이 끼어 있어야 하는데 거기에서 빠지겠다고 말한다는 건 아무리 일주일 3회 회식 중 단 하루라고 한들 용인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룸살롱 안다니냐는 질문에 우리 애들이 있는데 그런데 뭐하러 가요 라고 말했던 국가대표 스포츠 팀 감독의 말을 이해하듯이 그의 말을 이해한다.

명절 때 자신의 집에서 일을 거들지 않았다고 딸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다며 우리 부모님을 비난하던 구남친을 이해한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었어도 여자랑 남자랑 같을 수가 없는데 본인은 전화는 커녕 인사도 드린 적 없지만 여자친구는 반드시 신정에 집에 와서 전을 부쳐야 제대로 가정교육을 받은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싹수가 노랗고 싸가지와 예의범절을 말아먹은 것이라 믿었던,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이트 비용과 집값은 반드시 반반으로 해야 만 했던 그의 가풍을 이해한다.

사실 큰 틀에서 생각하면 그들도 불쌍하다 싶다. 여성혐오가 남성들 개개인의 인성에서만 비롯된 문제는 아닐 것이므로.


⭐️⭐️⭐️
그것이 계급적인 것이든, 혹은 남성성에 대한 경쟁에서 패배한 것이든, 연애와 섹스의 시장으로부터 배척당한 것이든 간에, 이 전쟁에 끼어드는 제1의 동인은 단연코 결핍이다. 나머지 침묵하는 다수는 그런 결핍된 남자들이 벌이는 쇼를 즐기고 그것이 만들어낸 이득들은 공유하되, 책임을 나누지는 않는다. -p.12 한국 사회 남성들의 오래되고 집단적인 트라우마인 군 복무의 경험 역시 남성들에게 제약으로 인식된다. 군 복무는 2년에 가까운 시간을 별다른 사회적 보상 없이 의무로서 허비해야 하는 시간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다양한 폭력과 위험에 노출되며, 특정한 관점과 의견을 강제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은 분명 문제적이지만, 이에 대한 남성들의 불만이 주로 또래의 여성들을 향한다는 것 역시 문제적이다. -p.14-15 재미있는 것은 여성들을 포함하여 많은 사회운동 주체들이 진행해온 징병제 개선 운동(혹은 모병제 전환 운동)이 남성 일반에게 인기를 끈 적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다. 병영 인권화 조치에 대해 가장 많은 비난을 쏟아내는 집단은 다름 아닌 예비역들이다. 그래서 이 문제를 전향적으로 풀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어떤 장단에 발을 맞춰야 할지 알 수 없는 엇박자의 상황이 이어지게 된다. -p.15 1990년대 후반 일본 역시 변화의 한가운데로 빨려 들어가면서 젊은 세대의 남성을 중심으로 불안정성에 노출되는 일이 집중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때 등장한 것이 이른바 프리터, 니트 등에 대한 사회적 담론인데, 후토시는 이것이 구조작인 문제를 어른이 되지 못한 개인의 문제로 환원하려는 전략의 일환이었다고 본다. 가령 그 이전부터 대다수의 기혼 여성은 시간제로만 일을 하고 있었지만, 아무런 사회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젊은 남성들이 시간제 근로로 대거 진입하자 이른바 프리터, 니트가 문제시되기 시작했다. 즉 이것은 생계 부양자여야 하는 성인 남성들이 그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며, 나아가 이것이 기존의 남성성, 남자다움이라는 가치를 흔들 것이라는 불안의 표출이라는 것이다.   -p.41 상이군인은 대한민국이라는 신생 국가가 만들어낸 남성성의 현실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남성들은 국가 폭력, 전쟁, 빈곤에 의해 희생 당했다. 그리고 국가는 이에 대해 무능하거나 무책임한 모습만을 보였다. 상이군인들은 국가를 위해 희생했다는 대의를 불구가 된 몸과 마음의 위안으로 삼고자 했지만, 국가는 그마저도 허락하지 않았다. -p.111 이미 호주제, 그리고 징병제는 여성을 사회의 이등 시민으로 만드는 법적인 질서였다. 그러나 1950년대의 여성 혐오는 여기서 더 나아가 국가를 위해 전쟁과 노동에 몸 바칠 남성을 주조해내기 위해 그것의 대척점에 있는 존재로서 비국민이자 비남성인 부도덕한 여성의 상을 만들어내려 했다. 양공주, 자유 부인, 유엔 마담, 아프레걸, 전쟁미망인 등에 대한 넘쳐나는 비난과 억측들, 여성의 도리에 대해서 훈계하는 남성 지식인들, 여성의 사회 진출에 대해 쏟아지는 우려의 논평들은 남자의 불안과 고통에 대한 죄를, 그것의 원인인 냉전 체제와 국가에 묻는 대신 여성에게 떠안기는 것이었다. -p.114 (군인들은) 작전에 투입되고 나서는 극한의 상황에 놓였다. 식사와 수면이 부족했고, 피곤에 절어 있었다. 폭력 진압으로 시위가 격렬해질수록 역으로 군인들이 느끼는 위협도 커졌다. 이들은 진압 중 사망한 동료들 때문에 공포에 질리고 격앙되었다. 그리고 지휘 체계는 이들을 보호하지도, 이들의 행동을 막지도 않았다. 오히려 더 잔인하게 광주의 시민들을 무찌를 것을 종용했다. (...)
이들은 자신들을 극한의 상황으로 몰아넣고, 상황에 대한 정보를 조작하고, 거기에 더해 목숨을 위협했던 신군부의 기만전술에 의해 잘못된 판단을 했다. 신군부의 의도를 몰랐던 대부분의 병사들은 사건이 지나간 이후에나 자신이 신군부의 권력 쟁탈을 위해 손에 피를 묻혀야 했던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순간에 멈추지 못했고, 결국 죄 없는 인명을 살상한 말단의 가해자가 되었.
그리고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한국 사회가 근대 이후 주조하고자 했던 남성성의 어떤 ‘완성’이다. 한국 사회는 단 한 번도 명령에 의문을 갖는 남자들을 바란 적이 없었다. 공장과 전장에서, 명령에 순응하고 몸이 부서질 때까지 헌신하는 강건한 육체들을 원했을 뿐이다. 이것을 뒷받침하는 것은 한국 사회가 처해 있는 악조건들이었다. 식민 치하를 지나 내전을 거쳐 절대 빈곤으로부터 출발한 한국이 근대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모두가 참고 희생해야 한다는 논리다. -p.135 20세 이상의 모든 남성에 대한 징병권을 국가가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강력한 ‘생체 권력’의 현시가 아닐 수 없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는 신체적인 장애가 있거나 특정한 사회적 조건에 처해 있지 않으면 병역을 거부하거나 대안을 선택할 수 없다는 점에서 더 그렇다. 군부 정권은 병역 의무를 통치의 도구로 십분 활용해왔다. 군대는 신체적 훈육에 못지않게 특정한 이데올로기와 각색된 역사들을 교육하는 데 힘썼다. 한국의 군대에서 ‘남성성 이념과 역사 인식 - 여성 및 비군인에 대한 인식’은 하나의 조합 쌍으로 존재한다. 또 신군부가 자행했던 것처럼 사법적인 처벌이 아니면서도 인신을 구속하는 한편, 의무라는 이름하에 세뇌에 가까운 전향 공작을 벌이기에 적합했던 공간이기도 하다. -p.140-141 대부분 학생운동권 조직들의 입장은 여성운동이 ‘부문 운동’이자, ‘부차적 모순’이라는 것이었다. 즉 여성 해방은 그에 선행하는 민족 혹은 계급 해방이 도래하고 난 이후에 해결할 문제라거나, 혹은 자연스럽게 해결될 문제라는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때문에 여성주의적 고민이나 문제 제기는 무시되거나, 운동을 분열시킨다는 이유로 비난받았다. 이외에도 여성적인 것으로 여겨졌던 많은 것들이 체제 순응적이고 투쟁에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로 비난받았고, 여성의 몸은 훼손되어 빼앗긴 민족이나 민중을 상징하거나, 서구 문화로부터 전파된 환락적고, 불건전한 문화를 상징하는 식으로 이용되었다. 언제나 투쟁의 중심을 상징하는 것은 굵은 팔뚝을 지닌 남성 지식인, 대학생, 노동자, 농민이었다. -p.142-143 20세기 끝자락의 남성성은 휘청거리고 머뭇거렸으나, 그것은 남성성의 해체를 불러오는 위기가 아니었다. 오히려 번화한 환경에 맞춰서 어떤 남성성을 새롭게 만들어낼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에 가까웠다. 어떤 것들은 폐기되고 수정되었으나 남성성의 헤게모니 자체는 해체되지 않았다. 남성 내부의 분화가 새로이 살 자와 죽을 자를 심판하였으되, 여전히 여성에 대한 억압과 차별을 바꾸려는 시도는 남성들 내부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가부장제에 대한 부담을 토로하면서도 가부장제를 혁파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p.182 이후 군 가산점제 부활은 정치 세력과 국방부가 심심하면 꺼내드는 카드가 되었다. 국방부의 입장에서는 꺼내 들기만 하면 다른 실질적인 보상 조치에 대한 요구를 모두 잠재우고 성 대결로 몰아갈 수 있는 논점 일탈의 카드가 되었다. 정치 세력에게는 꺼내들면 군 복무에 대한 보상에 노력하고 있으며, 안보를 중시하는 정당/정치인이라는 이미지를 얻을 수 있는 포퓰리즘 카드가 되었다. 그러나 국방부와 정당들이 죽은 군 가산점을 열심히 매만지고 젊은 남성들이 동조하며 사회적 소란을 피워대는 동안 바뀐 것은 없었고, 여전히 군 복무자에 대한 실질적 보상 논의는 진척되지 못했다. -p.192 즉 군대를 모델로 설계된 한국의 조직들 속에서, 징병제하의 군대를 거쳐온 남자들이, 성차별로 인해 여성 관리자나 경영자가 거의 없는 조직을 이끌어가면서 군대식 문화를 답습하고, 그것이 곧 조직의 중심 문화가 되는 순환이 지속되어온 것이다. -p.194 그러므로 이 문제의 해법은 결국 군의 더 철저한 민주화이고, 인권을 부수적이고 어색한 개념으로 생각하는 병영 문화를 뜯어고치는 것이다. 극한의 상황에 몰아넣고 스트레스를 줘야 전투력이 강해진다는 통념은 그 신빙성도 확실치 않거니와 민주주의 사회에 어울리지 않는다. 한국 남자들이 빠져 있는 이 집단적인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해결하지 못하면, 한국의 남성성은 지금의 ‘남자 문제’를 그러안은 채 고착되어 있을 것이다. 군의 개선도, 사회의 진보도 어려움은 물론이다. -p.200 가장 먼저 등장한 여성 혐오의 표상은 ‘꼴페미’였다. 꼴페미는 군 가산점 논쟁을 벌이던 남성들이 군 가산점 폐지 찬성을 주장했던 여성들에게 붙인 이름이다. (...) 이들은 ‘남녀평등’을 추구하는 ‘진정한 페미니즘’과는 다르게 여성 상위를 주장하는 ‘변질된 페미니즘’을 신봉하는 이들이라고 주장되었다. 군 복무와 출산을 앞두고 사회적 효용성을 비교하는 것이나, ‘권리만 챙기고 의무는 다하지 않는’같은 익숙한 주장들도 이미 만연해 있었다. -p.201 하지만 꼴페미로 지칭되는 존재는 수적으로 따지면 많지 않았다. 이 단어는 그 의도만 따지면 어떤 극단을 지칭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고, 온라인 게시판에서 논쟁을 벌이는 대상을 향해서 사용되던 용어였다. 꼴페미와 꼴페미가 아닌 자에 대한 구분이 존재했고, 그 구분을 위해서 이 단어가 사용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p.201 된장녀에 대한 불만의 핵심은 그들의 사치와 허영이 아니라, 남자들의 성의에 응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이 정도’ 했으면 넘어와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에 대한 분노다. 많은 남자들이 이성 간의 관계를 돈을 넣으면 섹스가 나오는 자판기로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된장녀는 일종의 고장 난 자판기인 셈이다. -p.208 왜 모실 생각도 없으면서 애꿎은 여자들을 상전 취급하고 있을까? 여기에 결부되는 것은 이들이 여자가 편하게 산다고 말하는 가장 큰 근거인 ‘성’이다. 자신들을 포함하여 남자들은 모두 여성의 성을 원하기 때문에 그것을 거래하면 편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야기는 단순히 사회경제적인 지위에서 여성이 우위에 있기 때문에 질시하는 것이 아니게 된다. 오히려 이 ‘항의’가 뜻하는 바는 여성들의 성이 너무 ‘비싸다’라는 뜻에 가깝다. 비싸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에서 그렇다. ‘막장’이자 ‘잉여’인 우리(남자)들에 비해 비싸고, 내가 그것을 얻기에도 너무 비싸다는 뜻이다. -p.218 이것이 궁극적인 문제다. 마스크를 쓰고 여성들의 시위에 나가 분탕질을 치는 것도, 염산을 뿌리겠다고 협박 글을 올리는 것도, 이퀄리즘을 주장하고 총여학생회를 없애자고 선동하는 것도 이 남자들을 아무 곳으로도 데려가지 않는다. 그러니 이제 결정해야 한다. 어디로 갈 것인가 형제여? -p.270 모든 지배 체제가 그렇듯이 이 문제에는 억압자뿐만 아니라 피억압자들 역시 연루되어 있다. 수많은 남성들뿐만 아니라 여성들, 때로는 성 소수자들 역시 이 시스템과 지배를 유지하는 데 이용당하고, 참여한다. 그러므로 나 혼자 착한 남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의 불편함과 한계를 끌어안되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는 인간이 되어야 한.
궁극적으로 우리는 기존의 성별 질서로부터 벗어난 성적 주체를 세울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우리는 진정한 남자, 진정한 여자, 진정한 성 소수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들이 의미를 상실하고 아무런 구분점이 되지 않는 상태를 향해야 한다. 이는 모두 천편일률적인 무성적 존재가 되자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각자의 성적 지향과 성적 실천을 존중하고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며, 폭력이나 강제가 아닌 한에서는 재단하거나 비난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p.276-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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