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장아장 정치부13│북한 수소폭탄 핵폭탄 그리고 조선로동당과 새누리당
또 그녀였다.
뱃속 깊은 곳에서 쥐어 짜낸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목울대를 넘나드는 비브라토에 한이 섞여있었다. 분홍색 저고리를 입고 짐짓 비장한 표정으로 미국을 훈계하는 그녀는 이제 칠순이 넘었다. 세종로 정부청사 6층. 통일부 기자실에 들어서자마자 그녀의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기자실은 마치 독서실처럼 칸막이로 나뉘어 있었다. 기자들은 칸칸마다 빼곡히 들어앉아 저마다 급히 속보를 쓰고 있었다. 북한이 핵실험을 했다고.
이날(1월 6일) 조선중앙 TV는 북한이 수소탄 시험에 성공했다고 보도했다. 정부는 모르고 있었다. 나는 생전 처음 통일부 기자실이란 곳에 들어가 어미 잃은 길고양이 마냥 멀뚱멀뚱 앉아있었다. 본디 야당 출입기자인 나는 오전까지만 해도 국회 더불어민주당 대변인실에 있었다. 더민주 김성수 대변인이 "북한이 핵실험했으니까 오늘 야당 기사 다 잘리겠다. 기자들 가서 쉬어요"라고 농을 던졌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야당 기자들이 "오늘 통일부가 바쁘겠데" "아냐 국방부가 더 바쁘겠네" 주거니 받으니 야당 아닌 타부서에 대한 연민의 정을 표시했다.
깔깔깔 다들 한 판 푸지게 웃고 대변인실을 나오는 순간, 나는 '파견'지시를 받았다. 같은 자리에서 웃고 있던 모 경제지 기자도 파견 통보를 받았다. 이곳저곳에서 파견자가 속출했다. 다들 짐을 싸들고 통일부로 이동했다. 회사마다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언론사 정치부는 '청와대' '국회' '통일부' '외교부' '국방부' 등을 담당한다. 때문에 통일부나 외교부 등에 큰 일이 생기면 국회 기자가 파견 갈 수도 있다. 기자들 말로 번안하자면 나는 이날 '총'을 맞았다. 내 담당 분야 외에 다른 분야에 급한 사건이 터져 파견 가는 걸 기자들은 '총 맞았다'고 표현한다.
전체주의적인 키치 왕국에서 대답은 미리 주어져 있으며, 모든 새로운 질문은 배제된다. 따라서 전체주의 키치의 진정한 적대자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인 셈이다. 질문이란 이면에 숨은 것을 볼 수 있도록 무대장치의 화폭을 찢는 칼과 같은 것이다.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p411
총을 맞아 통일부로 간 나는 조선중앙 TV의 전설적인 앵커 리춘히의 옥음을 들었다. 고저를 넘나드는 그녀의 파워 아나운싱은 시종일관 진지했고 진지해서 웃겼다. 눈을 부릅뜬 채 미국을 "잔악한 날강도 무리" "침략의 원흉" "미제 침략자"라고 맹비난하는 모습은, 쿤데라의 말을 빌리자면 '전체주의적 키치'였다. 단호한 리춘히의 말투는 한 치의 의심이나 질문을 용납치 않았다. 한반도 북쪽에서는 그녀가 복식호흡으로 뱉어낸 문장들이 진실이었다. 어떤 조선의 인민이 그녀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정부 성명'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토론을 요구한다면 아오지 탄광행은 떼어 놓은 당상이다. 불충한 인민은 진폐증에 걸려 서서히 죽어갈 것이 분명했다.
이런 상황에서 리춘히가 북한의 핵폭탄을 "정의의 수소탄"이라고 샤우팅 하는 건 그저 코미디일 뿐이었다. 진지한 표정과 엄숙한 말투로 "공화국이 정의의 수소탄을 틀어쥔 것은 주권국가의 합법적인 자위적 권리"라고 말하는 건 전두환이 "정의 사회 구현"을 외친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사당역 구석구석 박혀있는 모텔들이 제 아무리 플라스틱 조각으로 궁전 모양 지붕을 씌운 들 그걸 궁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는 리춘히의 키치를 아주 탁월하게 표현했는데, ‘미시즈 밤바스틱(Mrs Bombastic·허풍 아줌마)’이라고했다.
북한의 수소탄 시험 다음날, 원유철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우리나라가 '핵' 개발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북한의 공포와 파멸의 핵에 맞서 우리도 자위권 차원의 '평화의 핵'을 가질 때가 됐다"고 말했다. 나는 원 원내대표와 리춘히의 차이점이 무엇일까 궁금해졌다. 리춘히는 "미국과 맞서고 있는 우리 공화국이 '정의의 수소탄'을 틀어쥔 것은 자위적 권리"라고 했다. 남과 북 모두 '전체주의적 키치' 경쟁에 빠져들었다. 새누리당은 조선로동당과 한 치도 다르지 않은 말을 똑같이 반복했다. 원 원내대표도 리춘히만큼 진지한 표정으로 '평화의 핵'이라는 형용모순을 마치 진실인양 꾸며냈다.
비트겐슈타인은 어떤 '단어'의 사전적인 뜻 말고 실제 '용도'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그 '단어'를 여러 문장에 대입해보면 된다고 했다. 새누리당 원유철 원내대표 말대로 '평화의 핵'이란 표현이 가능하다면 '평화의 강간' '정의의 폭행' '아름다운 똥 구더기' 등도 충분히 논리적인 말이 된다. 평화를 위해 핵을 보유할 수 있다는 말은, 누군가가 평화를 지키기 위해 강간을 저질렀다면 그를 용서해줘야 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여기에서 '평화'란 단어는 사전적 의미로 쓰인 것이 아니라 그저 폭력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붙었다.
쉽게 생각해보며 된다. '궁전 모텔'이 궁전인가 모텔인가. 평화의 핵은 평화인가 그냥 핵폭탄인가. 원 원내대표에게는 리춘히가 말한 '정의의 수소탄'이 '수소폭탄'이 아니라 '정의'로 보이는지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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