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석과 생활, 2018 WINTER VOL.63 기고
12월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지면 구세군이 흔드는 종소리가 곳곳에 울려 퍼진다. 함박눈이라도 내리는 날이면 소복하게 쌓인 이불 같은 눈 위로 종소리가 녹아들어 연인들의 맞잡은 두 손에 온기를 더한다. 연인과의 사랑뿐이랴.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그들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게 되는 때이기도 하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 제일은 사랑이라.
-고린도전서 13:13-
1986년에 개봉한 롤랑 조페 감독의 “더 미션”이라는 영화를 보면 주인공이 사랑을 강조하는 고린도전서의 한 구절을 읊조리는 장면이 나온다. 예수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남미의 오지까지 위험을 무릅쓰고 선교를 떠난 예수회 선교사들의 이야기를 영화로 구성한 것인데, 원주민들과 함께 유럽 제국주의에 맞서면서 영화가 끝이 난다. 그들이 보여준 원주민들에 대한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가 몸소 실천했던 낮은 자들을 향한 그것이었다.
언제 한 번 전주 여행을 떠났다가 전동성당 앞에 서서 고린도전서의 저 구절을 읊조린 적이 있다. 나는 교회를 다니지 않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우리 모두가 지향해야 하는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의 유교가 제시하지 못했던 ‘낮은 자들에 대한 사랑’이라는 그의 가르침이 조선땅에 자리잡기 시작했던 현장. 전동성당이 자리한 곳은 1791년 신유박해 당시 천주교 신자였던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가 우리나라 최초로 순교했던 곳이다. 그곳에 1914년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의 프와넬 신부에 의하여 전동성당이 지어진 것이다. 로마네스크 양식과 비잔틴 양식이 혼재된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역사적, 건축학적으로 가치가 있어 문화재로 보호되고 있다.
우리나라 천주교의 역사는 세계에서 독보적인 사례로 꼽힌다. 선교에 의해서가 아닌 자생적으로 천주교가 자리 잡은 유일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16~17세기 종교개혁에 맞서서 탄생한 예수회는 아시아 선교에 적극적이어서 청나라까지 진출하여 선교에 힘쓰고 있었다. 이때, 성리학에 한계를 느끼며 실학을 배우기 위해 청나라로 유학하던 학자들이 천주교를 접하게 되었고 이들에 의하여 천주학, 서학 등의 이름으로 조선에 소개되기 시작한다. 당시 청나라에 머물던 예수회 아담 신부와 병자호란 때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와 접촉했던 기록도 있다. 이런 인연으로 천주교는 연구의 대상에서 몇몇 실학자들을 중심으로 신앙의 대상으로 자리 잡았으며 민중들에게도 퍼져 나가기 시작한다. 그들 스스로 교회를 세우고 교리를 배우고 임의로 주교와 신부를 뽑아 신앙 활동을 했다고 한다.
이런 행위가 교리에 어긋하는 것을 알고 부랴부랴 청나라 베이징 교구에 신부 파견을 요청했다. 이 소식은 프랑스 파리까지 전해져 프랑스 외방선교회의 선교사들이 조선으로 입국하면서 본격적으로 천주교가 뿌리내리게 되었다. 조선땅에서 프랑스 선교사들이 겪은 고통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소년 김대건을 마카오에 유학시켜 신부로 키운 베드로 모방 신부를 포함하여 많은 선교사들이 힘들다 못해 처절하게 선교활동을 했다고 한다.
물론 선교사 파견과 선교활동 이면에는 열강들의 정치적인 목적도 있었다. 그러나 머나먼 타국으로 자진하여 건너와 힘없는 백성들에게 조건 없는 사랑을 베풀었던 선교사들의 마음만은 진심이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경기전 앞에 서서 길 건너 전동성당을 바라보니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젊은 학생들, 많은 연인들이 성당 앞에서 즐겁게 사진을 찍고 있었다. 조선의 건국자 이성계의 뿌리가 되는 전주에서, 또 이성계의 어진을 봉안한 경기전 바로 길 건너편에서 조선의 근간을 뒤흔드는 순교 사건이 발생하고 성당이 세워졌다는 사실에서 새삼 역사의 아이러니함을 느낀다. 저곳을 거치는 많은 사람들이 전동성당이 세워진 의미를 알까. 조선 백성들과 함께 동고동락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했던 그들의 마음, 이 겨울을 따뜻하게 할 ‘사랑’만은 가슴에 품고 돌아가길 빌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에서 안도현의 시 한 편을 찾아 읽었다. 항상 사랑하고 베풀며 살자고 다짐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미루고 애써 못 본 척하는 나에게 이 시가 구세군의 종소리처럼 들려온다.
우리가 눈발이라면
허공에서 쭈빗쭈빗 흩날리는
진눈깨비는 되지 말자.
세상이 바람 불고 춥고 어둡다 해도
사람이 사는 마을,
가장 낮은 곳으로 따뜻한 함박눈이 되어 내리자.
우리가 눈발이라면
잠 못 든 이의 창문가에서는 편지가 되고
그이의 깊고 붉은 상처 위에 돋는 새살이 되자.
- 우리가 눈발이라면, 안도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