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묵은 달빛에 취하다, 경주

투석과 생활, 2017 SPRING VOL.56 기고

by 강승익

두 해전, 일주일에 걸쳐 교토 곳곳을 여행했던 나는, 잘 정돈된 골목을 누비는 기쁨과 멋진 문화재들을 배경으로 종일 셔터를 누를 수밖에 없는 매력에 빠져있었다. 어느 여인에 대한 짝사랑에 빠진 것처럼 옛 도시 교토로부터의 사랑을 갈구하던 내가 돌아오자마자 찾은 곳이 경주였다. 이루지 못한 사랑은 다른 사랑으로 잊으라고 했던가! 우리 역사상 유일하게 3번이나 여왕이 등극한 이력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내게는 늘 여인의 이미지로 존재하는 신라를 떠올리고 또 사랑을 갈구하기 위해 다시 경주로 향한 것이다. 경주의 옛 이름은 서라벌이다. 신라의 명운이 다해 후삼국으로 분열된 시대, 천년 왕조의 마지막을 예감한 56대 경순왕이 많은 신하들의 통곡을 뒤로하고, 고려 태조 왕건에게 귀순하여 나라를 바친 사건(935년)이 있었다. 이에 감격한 왕건이 새로이 내린 서라벌의 이름이 바로 경사스러운 고을이라는 뜻의 ‘경주’인 것이다.


경주는 기원전 57년 신라 건국을 시작으로 992년 간 존속한 수도였고, 2017년 지금까지 약 2천 년의 문명이 퇴적되어 있는 역사의 지층이다.


이른 아침 기차를 타고 신경주역에서 내려 시내로 차를 타고 들어가면 제일 먼저 남산을 찾고는 한다. 해발 500m가 채 안 되는 높지 않은 산이지만, 신라인들이 조성한 그들만의 유토피아! 바로 불국토로 여겼던 산이다. 금오산과 고위산을 통칭하여 남산이라고 부르며 아직까지도 계곡과 능선 곳곳에 석탑과 불상 백수십 기가 산재해있고 오래된 폐사지도 셀 수 없이 많이 남아있다. 아침 햇살을 맞으며 남산 서쪽의 주요 유적을 따라 월성지구 방향으로 걷기 시작한다. 남산에서 경주의 중심인 월성지구까지 2~3시간이면 완주할 수 있는 8km 남짓의 꽤 긴 거리지만 그 길에는 신라 천년 역사가 진하게 녹아있기에 걷는 의미가 있다. 박혁거세 탄생설화가 깃든 ‘나정’,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한 6 촌장을 모시는 사당 ‘양산재’, 신라의 종말을 상징하는 ‘포석정’을 거닐며 신라의 시작과 끝을 동시에 경험할 수 있다. 지금은 산이 되고 어느 농가의 논이 되어버린 옛 절터도 있는데 그중 가장 사연 깊은 천관사지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다. 김유신 장군의 화랑 시절, 잠시 정을 나누었던 천관녀와 관계를 끊고 대의를 위한 길을 걷기로 다짐을 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외출 후 귀가하던 길에 타고 있던 말 위에서 잠시 잠이 들었다가 눈을 떠보니 항상 찾던 천관녀 집 앞이었다는 것이다. 이후 정신을 차린 김유신 장군이 맨 발로 뛰어나온 천관녀를 외면하고 말 목을 잘라 죽여버렸다는 일화는 너무나도 유명하다. 이 일에 충격받은 천관녀는 실연의 아픔을 앓다가 결국 목숨을 끊게 되는데 훗날 그녀를 기리기 위해 살던 집 자리에 천관사라는 절을 세웠다고 하며 그 자리가 천관사 지인 것이다. 이렇게 천수백 년 전의 이야기를 상상하며 걷다 보면 정오 무렵 월성지구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을 수 있다.



점심을 먹고 휴식을 취했다가 월성 지구의 인왕동 고분 사이를 걸어본다. 서쪽 선도산을 병품 삼아 싱그러운 빛을 뿜어내는 고분들의 능선을 바라보며 잔잔하게 불어오는 봄날의 바람을 맞아보라! 푸른색 비단을 길게 펼쳐 바람에 날리면 이와 같은 모습일까? 죽은 자가 묻힌 무덤임에도 불구하고 부드럽고 따뜻하고 포근한 어머니의 품처럼 느껴진다. 너른 풀밭 위 나무 그늘을 찾아 돗자리 펴고 누워 책을 읽어도 좋고, 짧은 낮잠을 청해도 좋다. 시간이 멈춰 어떤 게으름도 허락될 것 같은 자유로운 시간을 만끽할 수 있다. 시간이 남는다면 천천히 걸어 분황사도 가볼만하다. 향기로운 황제라는 뜻을 가진 분황사는 제27대 선덕여왕이 창건한 절이다. 나비 없는 모란꽃 그림을 선물로 보내 향기 없는 꽃이라며 희롱했던 당나라 황제에게 기죽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향기로운 황제라 칭하며 사찰을 지어 권위를 세운 선덕여왕의 여장부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이처럼 곳곳에 스며든 신라의 옛이야기를 꺼내어 보는 것이 경주 여행의 큰 재미다.



기왕에 찾는 경주라면 4월 중 보름달이 가득 차오르는 날짜에 맞춰 가는 것이 좋다. 휴식을 취하다가 보름달이 덩그러니 떠오르면 인왕동 고분군 가까운 곳에 위치한 초승달 모양의 왕벚꽃 흐드러진 둔덕으로 향해보자. 그곳은 신라 옛 궁성 자리인 월성터다. 늘 각지고 반듯한 모양의 궁궐 구조를 정석으로 여겨져 왔던 시대에 초승달 모양의 궁궐을 세우고 월성이라 이름 붙이니, 신라인들의 창의적이고 독특한 미감을 짐작할 만하다. 달의 궁궐이라,, 햇빛을 받아 역사가 되고 달빛을 받아 전설이 된다 했던가? 유독 신라만이 고구려, 백제와는 다르게 신비롭고 전설 속 나라로 다가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뿐인가? 월성 둘레길을 따라 반대편으로 넘어가면 월성을 휘감고 지나 형산강으로 흘러들어가는 큰 개천인 남천을 만날 수 있다. 이 남천에서 피어난 물안개가 월성을 고요히 감싸 안으며 달빛 아래 빛나는 모습은 가히 천하일품이다. 물안개 자욱한 이 월성지구 일대를 거닐며 보름달 뜬 밤공기를 크게 들이켜보라! 벚꽃향기와 함께 신라 천년의 역사가 또렷하게 그리고 고스란히 가슴속으로 밀려들어오는 그 감격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것이다.


물안개 자욱한 이 월성지구 일대를 거닐며 보름달 뜬 밤공기를 크게 들이켜보라!


유유히 흘러가는 시간 속의 모든 존재는 흔적을 남기기 남기기 마련이다. 흔적이 쌓여 다른 흔적을 덮어버리고 때론 융화되어 새로운 흔적으로 재생하기도 하는, 창조와 소멸과 재탄생의 반복 속에 한 페이지를 우리는 살고 있다. 경주를 찾아 고요히 눈 내리던 순백색 도화지 같은, 지난겨울 감추어 두었던 삶의 한 페이지를 펼쳐보자. 곧 따뜻한 나무색, 신선한 초록색과 노란 달빛이 만물이 소생하는 봄을 그리기 시작할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때 묻지 않은 순수한 도시! 지친 심신을 위로하고 활기찬 에너지를 충전하고 싶을 때면, 주말 기차를 타고 서라벌을 찾아 봄의 화가가 되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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