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석과 생활, 2017 SUMMER VOL.57 기고
중국 동북지역에는 길림성과 흑룡강성을 가로지르는 송화강이라는 큰 강이 있다. 시기는 불분명하지만 기원전 2세기경, 해모수라는 인물이 스스로 천제라 칭하고 부여라는 나라를 건국했다. 이 부여라는 나라에서 주몽 세력이 갈라져 나와 세운 국가가 고구려이고, 고구려 건국 세력 내 정치싸움에서 밀린 소서노 세력이 남하하여 한강 유역(정확히는 서울 송파구, 하남시 일대)에 도읍하고 세운 나라가 백제라는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백제 700여 년의 역사 중, 이 한강유역에 도읍하고 존속했던 기간이 500여 년으로 가장 길다. 당연히 백제 역사의 흔적도 가장 많이 남아있는 지역이 한강유역, 즉 서울 송파구와 하남시 일대여야 하지만 문화유적에 대한 보존 인식이 없던 시절의 난개발로 인하여 몇 가지 유적을 제외하고 대부분 사라진 상태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백제 후기 200여 년간 도읍이었던 공주와 부여에 그 흔적이 많이 남아있어 여행을 다녀오게 되었다.
공주에는 백제 역사를 대표하는 유적 2곳 있는데, 바로 공산성과 무령왕릉이다. 공주 버스터미널에서 내려 시내버스를 타고 10분 남짓이면 공산성 앞에 도착할 수 있다. 성이 크지 않고 성벽 위로 산책로를 조성하여 공주시민은 물론 관광객들에게도 가볍게 산책할 수 있는 휴식처로서 적합하다. 또 금강을 북쪽에 끼고 있어서 그 풍경이 아름답고 시원한 강바람이 항시 불어와 더운 여름날 찾기에 좋다. 높은 능선에 자리 잡은 어느 누각에 올라 백제의 옛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공산성은 백제왕의 거처이자 임시수도이다.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정책으로 한강유역을 빼앗기고 백제 개로왕이 전사하자 그의 아들 22대 문주왕이 급하게 피난정부를 꾸려 자리 잡은 곳이다. 백제라는 나라의 규모에 맞지 않게 작고 비좁은 땅에 왕의 거처를 마련한 흔적이 당시의 급박한 상황을 말해주는 듯하다.
이 곳에서 약 70여 년 간을 머무르며 전쟁으로 흩어진 민심과 국력을 회복하는데 전력을 다하는데, 그 과정이 순탄치 않았다. 어느 조직에서나 위기가 닥치게 되면 여러 이해관계들이 충돌하며 내부 분열이 일어나기 마련인데, 이 시기의 백제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전쟁에 패배하여 국력이 꺾이고 왕권이 추락한 백제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그 방향을 두고 왕과 귀족들의 정치적 의견 대립이 극심했던 것이다. 문주왕을 비롯하여 삼근왕, 동성왕에 이르기까지 3명의 왕이 연달아 암살당하는 사건이 공산성 안에서 벌어진다. 이렇게 백제가 내부 결속을 다지지 못한 채 망해버릴 수도 있는 위태로운 상황 속에서 내치를 안정시켜 다시금 백제에 날개를 달아준 왕이 25대 무령왕이다. 왕실의 혈통이지만 일본에서 태어나고 성장하여 국내 사정에는 밝지 못할 수도 있는 인물을 왕으로 전격 추대하여 국난을 타개한 것이다. 자신들의 이익과 논리 속에 매몰되어 위태로운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지 않고, 보다 새롭고 다른 관점에서 접근하여 위기를 극복하려 노력했던 대목인 것이다.
이 무령왕의 왕릉은 공산성과 가까운 왕실 묘역인 송산리 고분군에서 우연한 계기로 발견되었는데, 그 무덤양식에서 백제의 국가비전과 국난을 극복한 원동력의 실마리를 엿볼 수 있었다. 하나는 무덤양식인데 중국 양나라의 벽돌무덤양식을 취하고 있다. 바다 건너 선진국들과 교류를 하며 줄 것은 주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는 실리외교를 펼친 증거이다. 또 동남아시아산 유리구슬과 같은 수입 유물들도 다수 발견되었는데, 항해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에 동남아의 나라들과 교역했다는 것은 백제가 글로벌 외교를 지향했고 이를 바탕으로 국력을 키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른 하나는 매지권이다. 땅의 신에게 무령왕의 묘지를 산다는 일종의 계약서인데, 돈다발과 함께 발견된 매지권은 자연을 정복 대상이 아닌 공존의 대상으로 인식했던, 백제인들이 지닌 문명 가치관의 상징으로 평가된다. 21세기를 사는 현대 문명인들 중에 이렇게 순수한 도덕성을 겸비한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소나무가 울창한 송산리 고분군을 한 바퀴 돌며 생각에 잠겼다. 고분군 입구 앞 전시실에 상세 모형을 꾸며 무령왕릉에 대해 자세한 해설을 하고 있으니 참고하길 바란다.
이와 같은 국난 극복기를 거쳐 무령왕의 아들인 26대 성왕 대에 이르러서야 임시수도를 떠나 새로운 백제를 견인해 갈, 새 수도를 모색하게 된다. 바로 부여인 것이다. 부여는 공주와 30여 km 떨어진 가까운 곳에 위치한 땅이다. 공주와 마찬가지로 백마강(부여에서는 예부터 금강을 백마강이라고 부른다)이 휘감아 돌아 방어하기에 좋고 서해바다로 뻗어 나가기에도 좋은, 수도로서 손색이 없는 땅이다. 부여에 도읍을 새로 하고 나서야 백제인들은 억눌린 감정을 토해내듯이 학문을 발전시키고, 문화예술적인 감각을 유감없이 발휘하게 된다. 이를 증명할 4곳의 대표 유적지가 있는데, 그 첫 번째는 부소산성과 관북리 유적으로서 백제 왕궁과 관청 시설이 있었던 자리로 추정되는 곳이다. 이 곳에서는 도로 유적이 발견되었으며 부여가 바둑판식의 계획도시였음을 알 수 있게 해 준 중요한 유적이다. 그중 왕궁에서 궁남지라는 남쪽의 큰 연못까지 이어지는 중앙 도로는 지금까지도 도로로 사용되고 있어 긴 시간에 걸친 생활공간의 연속성을 느끼게 한다. 두 번째는 정림사지이다. 정림사지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석탑으로 평가받는 정림사지 5층 석탑이 있으며, 미학적으로도 가치가 높다. 특히 당나라 소정방이 660년에 부여를 점령한 후, 석탑 탑신부에 승전기념비문을 새기는데 그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다. ‘대당평백제국비명’이라는 글자가 선명하여, 백제 멸망의 순간이 가슴 아리게 다가온다.
셋째는 부여 나성이다. 조선 시대 한양 도성과 같이 수도를 감싸는 방어형 성벽인데, 동아시아에서 출현한 외곽성의 가장 이른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그만큼 백제인들은 도시건축에 있어서도 트렌드를 좇는 감각이 탁월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넷째는 능산리 고분군이다. 부여 나성 바로 바깥쪽에 위치한 왕실과 귀족들의 장례를 치렀던 무덤군이다. 백제 무덤양식의 변천사를 연구하는 귀중한 유적이며, 이 부근에서 발견된 왕실 제사용품으로 쓰였던 ‘백제 금동대향로’는 직접 보지 않고서는 설명이 무의미한, 백제 디자인의 선진성을 보여주는 걸작 중의 걸작이다. 현재 국립 부여박물관에서 전시 중이다. 이렇듯 백제 문명의 완성은 이 부여에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변국에 사신을 여럿 보내어 새롭게 태어난 백제를 선전하고 외교를 맺었고, 일본에 불교를 전파하는 등 선진문물 제공에 힘썼으며 문명의 고도화를 이룩해나간다. 특히 부여에는 관북리 유적과 가까운 위치에 ‘구드래’라는 이름의 오래된 나루터가 있어서 이를 통해 많은 나라의 사신들이 오고 갔다고 전해진다. 일본에서는 지금도 백제를 ‘구다라’라고 발음하는 이유를 여기서 찾는 학자들이 많다. 또 ‘시시하다’라는 말을 일본어로 ‘구다라 나이’라고 하는데, ‘백제의 것이 아니라서 시시하다’라는 뜻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많아 백제 문물의 선진성을 짐작해볼 수 있다. 이 구드래나루터에서 백마강을 유람하는 황포돛배를 관광상품으로 운영하는데, 금강변의 경치를 즐기기에 매우 좋다. 황포돛배를 타고 부소산을 뒤편으로 돌아 낙화암을 바라보면 눈 앞에 펼쳐지는 동양화 한 폭에 탄성이 절로 나올 것이다.
2015년에는 공주와 부여의 유적들이 세계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되어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으며, 이에 대응하여 가족 나들이 또는 산책하기에 좋은 코스로 상당 부분 개발되어 있다. 무더운 여름날, 시원한 강바람이 함께하는 공주나 부여를 여행하며, 복잡한 세계정세 속에서도 새로운 비전을 부단히 모색하고 실현해나갔던 역동적이고 개방적인 백제를 만나보는 것은 어떨까?
유적, 유물들을 하나씩 천천히 더듬어가다 보면 우리나라가 세계인들이 선망하는 문화예술강국으로 발전할 수 있게 한 그 DNA가 다른 곳에서 온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