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안에 내재된 의미나 상징... 그런건 사실 뭐 그리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게 아니라 바로 그 의미가 드러나게 하는, 의미가 감흥이 되게 하고 감동이 되게 하는, 작가의 의도가 전달되게 하는, '구성'의 영역이다. 제 아무리 멋진 상징도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데에 실패한다면 쓸데없는 공허한 캐치프레이즈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를 만들때에도.
시를 쓸때도.
건축을 하거나 디자인을 할때에도
이것은 매양 마찬가지이다.
(똥파리에서 뭐 영화적 의미가 대단한건 아니지 않나?)
그래서
영화에 이어 이번엔 그림이야기.
이것! 그 유명한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김정희가 정치적 누명으로 억울하게 귀양살이를 하던 시절의 그림이다.
세도가였던 시절 주변에 그 많던 사람들은 흩어져 없는데, 지금의 형편없는 처지에도 불구하고 변치않는 우정을 지키는 사랑하는 제자에게 준 그림이기도 하고.
사실 세한도는 그림보다는 그 옆의 문구와 한셋트로 평가를 하는 것이 정당한 것이긴 하지만 부족한 필력과 실력으로. 그림만을 두고 보기로 한다.
그래도. 그림만 놓고 보아도 이상한 점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 우선은 첫째로. '잘 그린' 그림이 아니다. 상식적으로 우리가 예상하는 풍경화로서의 원칙따윈 없다. 그저 나무 4그루와 집 한채가 전부이다. 이상하고 초라한 집을 '자신의 처지'에. 주변의 나무들은 변치 않는 그대의 우정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한다.
나무는 어떻게 좀 그린 것 긑은데 집을 보면. 대체 이건 집을 그란 거라고 해야 할지 그리다가 만 것 같다고 해야 할지....오히려 잘 그렸다고 하는 것은 이런 것 아닐까.
겸재정선의 인왕재색도. 작은 집한채가 울창한 숲과 나무들로 둘러쌓여 있다. 집과 나무라는 점에서 세한도를 구성하는 요소와 다르지 않다. 얼핏, 세한도의 배경이야기. '나는 볼품없지만 너는 영원히 변치 않는 구나'라는 상징을 대입해도 괜찮을 만한 구성으로도 보여지기도 한다.
겸재의 그림에서 집은 풍경의 일부이다. 화면의 주변에 있으며 중앙은 산세로 채워져 있다. 추사의 그림은 그렇지 않다. 중앙은 집이고 주변이 나무이다. 겸재의 그림에선 집이 주변에. 추사의 그림에선 집이 중앙에, 크기도 굉장히 크다. 자기는 보잘 것 없다고 하면서 외려 중심을 차지한다
계속해서 이상한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휘적 휘적 대충 그려갈긴 집
세세한 터치로 상세하게 그려진 나무들.
표현방식의 상이함이 우선 그렇다.
더욱 흥미를 끄는 것은 그 둘의 관계에 있다.
그림의 오른쪽을 보자.
집은 마치 건축의 아이소메트릭 도면에서 처럼 그 끝이 한쪽으로 길게 늘려져 있다. 당겨진 끝 역시도 그림안에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마치 제도사가 힘주어 도면을 그리듯이 단단하게 지면과의 결구를 분명히 한다.
그림의 앞에서 뒤까지 곧장 늘어진 분명한 벽. 그리고 그 앞에 서있는 나무 두그루.
여기서 집은 그 스스로 '입방체'임을 분명하게 내세우고 있다. 나무는? 글쎄 좀 다른 듯 하다. 통상의 경우라면 집의 기울어진 면에 맞추어 오른쪽 끝의 나무가 그림의 뒤로 조금 물러가는 것이 맞겠지. (집의 왼쪽 두번째 나무처럼). 그런데 오히려 그런 기대를 저버리기나 하듯이 아예 가장 큰 크기로 앞줄에서 버티고 있다. 이것봐라?
3차원의 입체(집) vs 2차원의 평면(나무들)
이 둘은 한 그림에 있지만 서로 다른 공간안에 존재한다. 이제 집의 왼편을 보자. 얼씨구 이젠 그 반대다. 집은 애써 평평한데 나무들은 구태여 뒷줄과 앞줄로 배치되어 있다.
그것 참. 같은 그림안에 있어도 이렇게 충돌하는 나무와 집. 대립하는 너와 나.
(다음으로 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