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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준 Aug 30. 2022

풍요 속의 빈곤_과문함과 빈곤한 독서에 대한 변명

무언가를 음미하고 싶다면

내가 가장 질 높은 독서를 했던 시기는 언제였던가? 나는 군대 훈련소 시절을 꼽는다. 훈련소 내무반의 아담한 책꽂이에는 스무여 권 남짓한 책이 비치돼 있었고, 나는 피천득 수필집과 시집 각 1권, 반야심경까지 모두 3권의 책을 읽었다. 어느 하나 평소 같으면 손을 대지 않았을 법한 책들이었다. 주말 개인용품 정비할 때나 저녁에 틈날 때 머리에 담아둔 구절들을 훈련소에서 모포 불침번을 설 때, 훈련 도중 장시간 멍청히 대기할 때, 쓸모없어 보이는 반공교육의 틈바구니 속에서 되씹고 되씹는 식이었다.


이런 독서법은 당시의 나에게는 이례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입대를 기점으로 해서 독서:사색의 비율이 9:1에서 1:9로 급격하게 바뀐 것이었기 때문이다. 불과 1~2주 전까지만 해도 수업에서 요구되는 방대한 읽기자료에 치이던 나는, 2달 남짓한 기간 동안 수십 페이지에 불과한 책 단 3권을 곱씹었다.


청소년 시절에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그 아날로그 시절엔 요즘과는 달리 이성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헐벗은(?) 언니들의 사진 한두장을 친구들에게 애걸해 어렵사리 구한 다음에는 이리 돌려보고 저리 돌려보고, 마음 속에 담아두고 다시 소환해보고, 그 사진으로 각종 상상을 펼쳐보고...  클릭만으로 무한대에 가까운 야동야사를 접할 수 있는 요즘 청소년들이 그 세대보다 더 풍족한 사생활을 만끽하고 있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추정한다.


음미. 어떤 사물 또는 개념의 속 내용을 새겨서 느끼거나 생각한다는 뜻이다. 이리보고 저리보고 돌려보고, 냄새도 맡았다가 맛도 봤다가, 깨물어도 보고 핥아도 보고 하는 것이다. 그러는 과정에서 어떤 대상의 참맛을 깨치게 된다. 앞선 두 사례에서 봤듯이 음미의 수준에 이르기 위한 중요한 전제조건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니라 향유할 대상의 양을 파격적으로 줄이는 것이다.  


감수성이라는 말 자체가 ‘느끼고 수용할 수 있는 성질’을 의미한다면, 느끼는 것은 기본적으로 '일 대 일'의 관계에서 가장 이상적으로 이뤄진다. '일(나) 대 다(대상)'라는 관계의 양적 불균형은 감수성에는 적합하지 않은 것이다. '일 대 다'의 관계에서는 '내가 보는 것이 다 보이는 것이 아니고, 내가 듣고 있는다고 해서 다 들리는 것이 아닐(示而不見 聽而不聞)' 수 있다.


음식을 생존이 아닌 감상의 대상으로 삼는 식당에서 서빙 하는 음식이 쥐꼬리만큼인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미식가들은 결코 폭식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한편의 영화,  한권의 책, 한곡의 음악을 반복해서 감상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오랜 시간 공을 들여야 깊이 숨겨진 진가를 느껴볼 수 있는 작품들이 많다.


허나 오늘날 넘쳐나는 자극들은 오히려 우리의 감수성을, 음미할 수 있는 기회를 오히려 앗아가고 있다. 인간의 감수성은 너무나 많은 글이나 정보를 접하는 과정 속에 무디어지기 마련이다. 집중력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다. 주마간산식 감상에 감수성에 길들 리 없다. 한곡의 음악을, 한편의 영화를, 한권의 책을 충분히 음미하기엔 '죽기전에 꼭 봐야할 000 리스트'가 너무 길다.


학문의 세계도 본질은 다르지 않다. 잠시 한눈 팔면 쏟아져 나오는 신간에 이리저리 치이고, 학계의 연구추세를 따라잡으려면 읽어야 한 논문이 태산이다. 다독 또는 속독이 미덕인 이유다. 창의적 관점이 나오기 어렵다. 다독이나 속독이 그 자체로 나쁜 것은 아니겠으나 그것이 자칫 '음독(음미하며 읽기)' 내지는 '숙독(생각하며 깊이 읽기)'의 결여로 이어진다면 사회학적 상상력, 또는 미적 인문학적 감수성에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논어에서 공자는 "배우기만 하고 스스로 생각을 안하면 맹목적이되고, 혼자 생각하기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로워진다(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라고 했지만, 역시 남이 쓴 글을 읽는 수동적 수용 과정으로서 '배움(學)'과 그에 대한 능동적 자기화의 과정인 '사색(思)' 가운데 주도권은 '사색'에 있을 수밖에 없다. 특히나 특정한 분야에서 내공이 깊어지고 주체적 역량이 드러나는 단계에 이르려면 말이다. 배움이 단순한 정보의 입력에 중점이 가 있는 활동이라면, 사색은 그 정보를 나름대로 해석하고 새로운 맥락으로 연결시키는 자기화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정보가 범람하는 요즘 시대에 오히려 독서의 참맛을 잃어버리게 되지는 않을까 우려한다.


책 한 권을 우습게 보지 말. 오늘날 우리가 읽는 책 한권 속에는 근대 이전에 살았던 한 개인이(매우 지적인 개인라고 해도) 평생 축적한 정보랑 보다 더 많은 무엇이 담겨있을지 모른다. 정확한 통계를 구하기는 어렵겠지만  2000년대 사는 사람이 한 생애 동안 접하는 문자의 양은 1500년에 살았던 사람에 비해 수십 수백배는 많 것이다. 하지만 늘어난 정보량만큼 우리가 더 큰 혜안을 갖게 된 것은 아닐 것이다. 


'나는 부처님의 말씀을 이렇게 들었다(如是我聞)'으로 시작하는 불경, '공자님이 말씀하시길(子曰)'로 시작하는 유교경전, 또 예수의 말씀을 담고 있는 초기복음서 등은 모두 오랜 암송의 시간을 거쳐 문자화되었다. 인류 지혜의 정수를 담고 있다는 이들 주요 경전들이 암송되어 내려왔다는 점은 이들 경전이 담고 있는 정보량이 많지 않았다는 사실의 방증이다. 많지 않은 문자적 정보들이 다양한 사람들의 삶의 맥락과 만나면서 이렇게 저렇게 해석되고 그 해석의 과정에서 새로운 의미를 낳을 수 있었다. 이렇게 보면 정보의 양이 적었기 때문에 오히려 더 쉽게 전승될 수 있었고, 더 많은 해석과 수용의 여지를 낳았으며, 결과적으로 더욱 널리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것이라고 해석해볼 수 있다. 

 

주마간산 식으로 너무 많은 책을 보기 보다는 좋은 책 한권을 깊이 음미하며 읽는 습관을 갖고 싶다. 때로 풍요가 빈곤이고, 결핍이 미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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