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수성의 거세, 그리고 야만으로의 회귀
끊임없이 살육을 감행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전장에서 군인이 살아남는 방법은 적군의 고통에 둔감해지는 것이다. 예리하게 날이 선 동물적 생존본능에 따르는 것이 생존의 확률을 높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앳된 적군의 두려운 표정에 멈칫하면 내가 죽는다. 공자가 인간다움의 근본으로 꼽았던 측은지심, 남을 긍휼이 여기는 마음은 남을 밟고 올라서야 살 수 있는 승자독식의 사회에서 생존에 걸림돌이 될 뿐이다. 사회에 팽배한 불의에, 타인의 고통에 둔감할수록 더욱 잘 살 수 있으니 말이다. 생존 경쟁이 강한 사회일수록, 타인의 고통을 예민하게 인지하는 감각기관은 잘라내 버리는 것이 생존에 유리하다.
내로남불식 이중잣대를 사용하는데 부끄럽지 않아야 하고, 오랜 인간관계를 금전적 이익으로 전환하는데 능해야 하며, 옮고그름을 떠나 도움이 되는 사람들의 청탁과 부탁을 해결하는 것을 즐겨야 한다. 오랫동안 연락을 끊고 살았던 지인의 번호를 찾아 물건을 사줄 것을 부탁하는데 이래도 되나 하는 미안함과 민망함으로 망설이는 사람은 유능한 영업사원이 되기 힘들다. 오죽하면 '후흑학'(심흑면후: 마음은 검게하고 얼굴을 두껍게 하는 것)이 난세의 처세술로 각광받겠는가. 오늘날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낯두꺼움(厚顔無恥)은 강자의 미덕이자 생존 무기가 되었다.
오늘 다시 내 주변에, 조직 내에, 사회에 득실거리는 생존 기계들의 면면을 떠올려 본다. 그들 역시 반복된 상처로 인해 감수성에 굳은살이 박힌 불쌍한 존재일까, 아니면 생존하기 위해 감수성이라는 촉수를 잘라낸 영리한 존재들일까? 인간 혹은 자연의 고통과 아픔을 보다 예감하게 감수(感受)하는 예술가의 생은 언제나 난세에 평탄하지 못했다.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는 예민함을 가진 시인이 폭력이 난무하고 악다구니가 넘쳐나는 시대를 헤쳐나가기 힘들기 때문일 것이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 하고, '시가 쉽게 쓰여지는 부끄'러워 하는 시인의 감수성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