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린터

중년의 착오

by seungmom

집을 넉 달 동안 비워뒀더니

내 집인데도 여러 개의 스위치를 눌러야 내가 원하는 곳이 환해졌다.

한 번에 길게 지내지 않으니 안 그래도 없는 암기력에 내 집이 낯설다.

친해지는데 또 한참 걸리게 되었다.


집을 비우면서 생기는 많은 부작용 중에 프린터가 있다.

석 달 이상 안 쓰고 놔두면 언제나 헤드 청소라는 것을 해야 하는데

거의 한 시간을 계속 헤드 청소 스위치를 누르면 글자가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된다.

물건을 조심스럽게 쓰는 편이라 아직 새것처럼 보이는 프린터가 단종품이라고 하는데

이번엔 헤드 청소를 하기도 전에 멀쩡하게 남아 있는 잉크가 없다고 갈아 끼우라고! 표시가...

새것을 갈아 끼워도 계속! 표시가 나타나 알아보니 접촉 부분이 건조되었나 보다고 한다.

이런 경우는 수리비가 아까워진다고 하는데...


이제 또 다른 이유로 종이와 멀어진다.

종이 수첩과 헤어지고

종이에 프린트해서 모아 두었던 서류도 pdf로 컴퓨터에 넣어 두게 되었다.


막 미국에 갔을 때만 해도 프린터는 절실했다.

아이들의 공부도 그렇고 나도 사전을 들고 번역을 해야 해서 언제나 여러 장이 더 필요했는데

자유롭지 않은 영어에 마음 놓고 끄적거릴 수 있는 복사라도 자유를 누리고 싶어서

엄청 프린트를 하고 그렇게 쓰다 보니 잉크도 엄청 많이 필요했었다.


프린터를 살 때 영어가 힘들어 일본에 살면서 썼던 같은 일본 제품을 샀었는데

그것의 잉크가 미국에서는 수입품이라서 그런지 일본보다 많이 비쌌다.

아이들은 무엇이든 도움이 되는 것이 있으면 우선 복사를 해 두려고 하는데

나도 그 심정을 이해하면서 잉크가 아까우니 하지 마라는 소리는 못하고 안달을 하다가

처음 방학 때 일본에 가서 듬~뿍 몇 년치의 잉크를 사들고 미국에 왔었다.


그리고 몇 년을 잉크 걱정 없이 잘 썼는데

그동안 아이들의 영어가 안정이 되니 복사를 해야 하는 일도 점점 줄어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프린터가 수명을 다했다고 꼼짝을 안 했다.

이미 단종된 제품이어서 수리도 힘들고 할 만큼 고급도 아니어서 다시 사라고 권했는데...


난 집에 와 땅을 치면서 울고 싶었다.

아직도 듬~뿍 사온 잉크가 반이상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잉크만 있으면 만사가 다 해결이 된다고 생각했었는데...


똑같은 상황으로 지금도 미리 사놓은 잉크가 색 대로 한벌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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