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의 자리
아버지의 장례는 아버지의 힘을 보여주는 마지막 장소인 듯했다.
나는 한국을 떠나면서 한국에서의 친지도 친구들과도 떠나게 되어
어떤 소속의 힘이라는 것을 누려 본 적도 없고 그래서 이런 걸 모르고 지냈다.
이런 속에서 살아가면 든든하겠구나 하는 것과 복잡해지겠구나 하는 것이
타국 살이에서는 주변의 울타리가 없어 기댈 생각조차 하지 못했는데
이제 겨우 알고 느낄 수 있게 되니 그 힘은 사라져 가고 있었다.
아버지와 두 동생 덕분에 온통 의사들이 와 주었는데
세명 모두가 서울대 출신으로 아버지의 후배가 동생의 교수로 연결되니
여기서 오랜만에 동창들을 만나는 사람도 제자와 선배를 만나는 사람도 있었다.
이틀간 이렇게 많은 의사를 본 적도 남자들을 본 적도 없어 신기했는데
남편의 친구라며 오는 사람마다 작은 소리로 자랑스럽게 떠드는 올케의 표정에
이 집안이 이랬구나 하며 전혀 몰랐던 것 같은 느낌으로 나에게는 생소했다.
이틀 동안 조문객을 받았는데 일을 도와주시던 아주머니들도
이렇게 젊잖은 조문객들은 처음이라고 정말 조용하다고 여러 번 이야기해
난 점점 살그머니 부러운 기분이 들어 괜히 심통이 나려고 했는데
이래서 아버지의 힘이 무엇이었는지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장례식을 진행하는 것에 대해서 사무실이라는 곳에 앉아
응급실에서 하루를 보내 정신이 나가 있는 듯한 멍한 머리로
어떤 식으로 할 건지를 묻는데 절차는 거의 지불하는 액수와 관련된 것으로
거액을 지불하면 거창 해져 그것이 자식의 도리처럼 느끼며 결정했다가
계속 진행되는 절차에 구분되는 것이 가격 때문인 것 같아 정신을 차렸다.
돈이 장례식을 치러주기는 하지만 액수의 크기가 정성은 아닌 것 같다고
장례식까지 마음을 돈으로 대신하는 것은 아니라고 확실하게 선을 그었다.
장례식이란 것을 처음 해 보는 입장에서는 뭐든 신기하고 의문 투성이로
왜 이렇게 해야 하는지 안 하면 안 되는 이유는 뭔지 알고 싶었지만
엄숙하고 진지해야 하는 자리라는 것에 진심으로 고개를 숙이고 절을 하면서
좋은 곳으로 편히 가시라고 절을 할 때마다 주문처럼 반복했다.
그런데 나는 이 장례식에서
절을 해도 올케들이 먼저이고 걸을 때도 올케들의 뒤에서 걸어야 했다.
이 장례식은 내 아버지의 장례식인데 자식인 내 자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