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의 색다른 체험
13일 오후 2시에 부산에 있는 나를 위한 공간에 들어왔는데
인천 공항에 내린 것이 새벽 5시니까 9시간 만인 것이다.
인천공항의 해외 입국자 검역에서는 열이 없으니 이대로 집으로 가서
3일 이내에 자발적으로 가까운 검역소에서 검사를 받아야 한다고 했는데
ktx가 부산역에 도착을 하니 다시 방역복을 입은 사람들이 줄을 세워서
부산역사 밖으로 데리고 갔는데 그곳에서 또 뭔가를 쓰라고 종이를 건네고
쓰인 주소와 본인 확인에 두 살이나 더 많은 내 한국 나이를 알려 주었다.
그대로 검사 약과 기다란 면봉을 쥐어 주면서 다음 장소로 가라고 하는데
검사라는 것을 생각도 마음의 준비도 못하고 손만 나와 있는 워킹 스루 앞에 서서
면봉을 달라고 해서 건네니 입을 벌리라고 하는데 난 지금 뭘 하고 있는 건지
난 엉덩이에 주사를 맞아도 각오할 짬을 달라고 하며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는데
아무 준비도 없는 상태에서 입은 자동으로 벌어지고 면봉은 순간 들어왔다.
놀래 침을 삼켜도 되는지 고민하는 중에 끝나더니 이번엔 머리를 고정하라고
콧속으로 면봉을 넣는데 조금만 참으면 될 거라고 나도 모르게 숨을 멈췄는지
빨리 끝나지 않고 면봉은 더 깊숙이 깊숙이 들어가 숨이 쉬어지지 않아서 컥컥거리며
이러다가 죽겠다는 생각까지 들게 했는데 코안은 핏줄이 터져 있는 기분으로 아팠다.
그 핑 도는 고통에 멍하데 시약을 주면서 가져다 놓으라고 해서 정신을 차려보니
검사라는 것이 끝났다고 인천공항에서는 자발적으로 검사를 하러 가라고 했지만
이것으로 검사는 더 안 해도 된다고 결과는 내일 알려 줄 거라고 했다.
얼떨떨하게 마치고 부산시에서 운영하는 방역 택시를 정해 줄 때까지 기다리는데
인천 공항에서부터 이런 예측이 안되었던 일들을 계속하고 있었다는 것에
내 인생에 아직도 내가 놀래면서 겁내야 하는 일들이 있는 거구나 했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난 거의 하루 이상을 쓰고 있던 마스크를 벗었다.
아무 생각이 없이 창문을 열고 환풍기를 틀어 놓고 가방을 풀어야 한다고 움직이는데
질병관리 본부에서 확인 전화를 하고 보건소에서는 담당자가 연락을 했다.
정말 엄청난 인력이 움직여서 이 전염병을 통제하고 있구나 하는 것이 느껴지니
나는 오늘 하루 종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는지 미안하고 고마웠다.
살 수 있게 하자고 가방의 물건을 꺼내고 여행 가방을 닦아 집어넣고
떠나면서 넣어 두었던 물건들을 꺼내어 늘어놓고 나니 살짝 결과에 걱정이 되었다.
만약 내가 양성이라면 아이들도 양성이라는 것인데 그럼 아이들은 어쩌나 하는
다른 아무런 증상 없이 그동안 체온이 36까지 오르지 않아 걱정한 적은 있지만
한 번도 37이 된 적이 없었고 맛도 냄새도 그대로 너무 잘 먹어서 고민을 했는데...
다음날 음성이라는 문자를 받고 당당하게 아이들에게 보여 줬더니
딸아이는 거창한 메일이 올 줄 알았는데 꼴랑 문자냐고 실망이라고 했다.
난 아이들에게 그동안 우리가 판단한 정보를 믿고 살아온 방식이 옳았다고
나가더라도 마스크를 하고 손을 씻을 때까지 절대로 얼굴을 만지지 않았던 것만으로
확실하게 음성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거라고 했더니 그러네 했다.
우린 비닐장갑도 투명 안면 보호대도 하지 않고 그저 마스크만을 꼭 썼는데
엘리베이터의 스위치도 마트의 카트도 만지면서 그 손이 얼굴로 못 가게 신경을 쓰고
집에 와서는 바로 그 손을 깨끗하게 소독하듯이 비누로 길게 씻어 내고는
그동안 밖에서 만졌던 휴대폰과 차 열쇠와 가방 손잡이 등을 소독했었다.
석 달간 미국에서 지내면서 밖으로 걸어서 나간 것은 두 번이고
차로 식료품을 사거나 주문한 것을 받으러 간 것은 10번 정도인데
아이들은 나온 김에 주문한 음식을 찾으러 가거나 차에서 기다리게 하고
나만 매장으로 들어가 몇 주일을 버틸 수 있게 듬뿍 식품을 사들였다.
그랬더니 매번 떠나기 전에 하는 영수증 정리가 엄청 간단하게 끝났는데
석 달간 얼마나 움직이지 않았는지 이러고도 살아지는구나 했더니
아이들이 우린 처음부터 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가능하다고 했다.
이렇게 꼼짝을 안 하고 살았던 것은 코로나가 더 보태기는 했지만
아이들과 나는 집안에서 지내도 답답함을 느끼지 않는 특성을 지니고 있어
일본에서도 미국에서도 관광지라는 곳을 일부러 찾아다닌 적도 없고
무슨 이벤트라고 하는 것도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에서 피하고
맛집이라고 하는 곳도 긴 기다림에 질려서 관두고 맛을 조금 포기하는 편이었다.
이러니 처음 딱 한 번의 경험이 다음이라는 것을 모두 관두게 만들어
셋이 20평도 안 되는 방 한 칸의 아파트에서 요가도 하고 기타 연주도 영화도 봤는데
나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도리어 집안에서 뒹굴어도 된다는 편안함을 만들어 줘
우린 우리들의 습관이 이럴 때 갇혀 있다는 기분 없이 지내게 해 준다며 잘 지냈었다.
그랬던 생활 습관으로 이 고립이 독거가 아닌 것으로 되어서 그런지 편하다.
떠날 때에 입었던 겨울 옷들을 빨아 넣어 두면서 며칠이 지나갔는데
그동안 고맙게도 보건소에서 체온계와 마스크 등 귀여운 소독 스프레이를 보내줬다.
매일 아침과 저녁에 체온을 재어서 웹에 기록을 하고 감시를 위해 올라오는 화면에
나는 또 또또 하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집에 잘 있습니다 하며 확인을 눌렀다.
이 화면의 방문은 나에게 외롭다거나 고독이라는 단어를 아예 모르게 해 주어
뭔가 답을 해야 하는 아이들의 메시지보단 마음이 편해 좋구나 했던 것이
새벽에도 삐꽁삐꽁하고 올라와 잠을 깨워서 3일째에는 담당자에게 상담을 했더니
그 부분을 수정하려고 노력 중이라고 자는 동안에는 반응 소리를 꺼도 된다고 했다.
난 매일 신선한 우유를 매콤한 비빔면을 지금 팍 꽂혀 먹어대는 냉동 핫도그를
배달로 부탁해서 먹으면서 살찌는 것에 신경을 쓸 만큼 여유를 가지고 살고 있다.
매일 뭐라도 사러 나가는 것도 운동이라고 생수 한병도 나가 사 들고 왔었는데
지금은 그래서는 안된다고 하니 미안하다는 생각을 안 해도 된다는 것에서
더 늙기 전에 웹으로 배달 신청을 하는 방법을 익혀야 한다던 것도 끝냈다.
차분하게 잘 갇혀 있으면 되는 일이라고 내가 너무 가볍게 생각하고 있는 건지
어떤 다큐에서 자가 격리라는 것에 엄청난 부담으로 식구 모두가 어려워하는 것을 보고
아이들에게 반성을 해야 한다고 좀 더 진지하게 이 상황을 생각하자고 아이들에게 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