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살면서
지금 아프가니스탄의 탈출 행렬을 보면서 내가 타국에 살면서 했던 준비가 생각났다.
사는 곳이 일본이어서 그랬는지 언제 어떻게 나도 저런 대열에 낄지 모른다고
여차하면 도망가자고 여권과 신분증과 비행기표 살 현금을 하나의 가방에 넣어뒀다.
이건 미국에 가서도 계속되었는데 그 가방에 아이들의 졸업장과 예방접종 증명서까지 넣어
아이들에게 소방벨이 울려서 급히 나가야 할 때도 이건 들고 나가라고 했었다.
이 습관은 일본에 살다가 생긴 것이다.
일본인들이 내 앞에서 웃으며 말을 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자고 했지만
언제 어떻게 한국인이라고 낙인이 찍혀버릴지 모르겠다는 생각에는 겁이 났었다.
생각 없이 결혼해서 일본에 왔는데 한국에서 의대 공부를 한 남편은 생각이 달랐다.
일본에서 자라고 일본 교육을 받은 남편은 이런 일본의 분위기를 전혀 느끼지 못하고
그저 내가 너무 민감하다고 유난을 떤다며 살다 보면 달라질 거라고 했었다.
처음엔 철저한 일본인까지는 아니더라도 남편의 사상 정도는 따라가 보려고 했지만
일본인 습성이 도저히 나와는 맞지 않았고 전생이 독립투사였던 것 같은 나는
비위가 상해서 애를 쓴다고 가능한 것이 아니란 것을 알았다.
이런 상황이 결국엔 내가 혼자서 이 일본을 상대하는 것 같이 느끼게 되었고
아이들을 보호할 사람은 나뿐이라는 생각이 들어 더 처절해졌다.
2010년 10년 만에 다시 일본에 돌아와 보니 찌질하게 변해버린 일본은
우울하다는 표정을 그대로 나타내며 그 화를 같이 살고 있는 외국인들에 풀고 있었다.
그렇다고 백인에게는 찍소리도 못하면서 재일 한국인에게는 식민지 시절을 떠올리며
그때의 일본은 좋았는데 하는 식으로 한국인을 깔보는 것으로 짜증을 대신했다.
우익들이 조센징하면서 시꺼먼 차에 달린 스피커로 떠들면 소름이 돋았는데
내가 나만의 살 집을 구하고 혼자 살면서 나는 나도 모르게 몸을 사리게 되었다.
주변에 아는 사람도 없지만 있다고 내 편을 들어줄 사람들이 아니고 해서
집 밖을 나가면 한국인 티가 나지 않게 하려고 들고 있는 물건에도 신경을 썼었다.
일본이 잘 살았던 80년대와 90년대엔 잘 살아서 마음의 여유가 있었는지
한국을 깔보고 무시하기는 했어도 해코지를 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잘살던 90년대에도 속 편하게 한국인이 살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처럼 혐한을 대놓고 떠들면서 우익들이 활보하지는 않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니까 일본에서 한국인은 가장 건드리기 쉬운 존재이고 그때나 지금이나
언제 무슨 일이 터져서 불똥이 한국인으로 튈 건지 모르는 일이었다.
어딘가 불이 나도 조선인이 범인... 누가 살해를 당해도 우선 조선인 일지도...
이런 분위기가 잘못 내 주변에서 일어나면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그냥 도망쳐야 한다고
일본에서 재판이라든지 언론을 통해 옳음을 증명하는 것은 기적에 가깝다는 것을
80년대부터 살면서 계속 봐 왔던 것에서 떠나는 것이 답이라고 결론을 내렸었다.
도망을 쳐야 한다면 뭐가 필요한지 거의 10년 이상을 고민하면서 발전시켰는데
서류 가방 하나로 완성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까지 하는데 많은 고통이 있었다.
내가 써 둔 그 많은 일기장보다 가장 아쉬운 것은 아이들의 사진이나 그림들로
그걸 하나씩 마음속에서 내려놓기까지는 왜 일본에 와서 살게 되었나부터
왜 일본에서 사는 사람과 결혼하도록 엄마는 나에게 부추겼나까지 생각하게 했다.
일본에서 산다고 한국인들이 다들 이렇게 탈출의 준비를 하고 사는 것은 아니다.
한국이 더 못살던 그때엔 한국보다 좋다고 어쩌다 비행기 안에서 만나는 한국인들은
다들 일본에서의 삶을 자랑스러워하며 선물을 잔뜩 사 갈 수 있어서 좋다고 했었다.
한국이 더 잘 사는 지금에는 어떤지 잘 모르지만 이 살벌한 일본을 계획대로 떠나
지금은 아이들이 미국에 있는데 미국도 일본만큼은 아니지만 타국인 것은 같다고
매번 아이들에게 주변을 조심하라며 서류가방에 대한 확인도 시킨다.
아프가니스탄의 탈출을 보면서 준비해둔 서류 가방의 가치를 다시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