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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파친코

재일 교포의 삶

by seungmom

이 드라마가 나에게 왜 일본을 싫어하는지 확실하게 알려 준다.


나의 일본 생활은 경제적으로나 지위로는 불편하지가 않았다.

그런데 딱 집어서 한마디 한 단어로 표현하기는 어려운 것이 있었는데

그걸 생각해 보려고 하면 그냥 가슴이 답답해지고 숨이 찬다.

화가 나면서 모든 것을 다 포기해도 좋으니 이 상태를 벗어나고 싶다고

그래서 칼을 들어 볼까 하는 생각까지 하고는 놀래기도 했는데

다른 면에서의 일본 생활은 그냥 지옥 같았고 그래서 도망을 쳤었다.


일본에서의 생활이 원해서 시작된 것이 아닌 것도 있었고

같이 살던 사람이나 그 사람의 가족들이 모두 나와 너무 달랐다.

이들은 일본에서 살아가기 유리하도록 생각을 편하게 했었는데

친 일본도 아니고 반 일본도 아니지만 유리하면 친 일본도 되었었다.


혼수에서도 한국의 냄새가 나는 그런 물건은 가지고 오지 말라고 했고

일본의 백화점이나 택시 안에서 내가 한국말만 하면 입을 다물라고 했었다.

택시에서 한국말을 했다가 급정거를 자꾸 해서 불안했다는 경험이

백화점에서 한국인이란 걸 알고는 급 불친절해져서 불쾌했다며

몇 달 같이 살면서 들었던 한국을 지우라는 말은 이게 감옥이구나 했었다.


한국인인 것도 감추고 한국말도 해서는 안 되는 상황을 알리고 싶었는데

내 부모는 내 성격을 탓했었고 내 친구들은 색다른 세상이라는 정도였다.

세 번이나 짐을 싸서 이혼을 하겠다고 했지만 동생의 결혼에 흠이 된다고

집으로 돌아와서 석 달이 되도록 집 밖을 나가지 못하고 살게 되니까

여기도 일종의 다른 감옥이구나 하는 것을 느끼고 다시 일본으로 가서는

일본에서 정당하게 권리도 누려가면서 탈출하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었다.


이게 내가 일본에서 산 시간의 목표였고 그래서 견딜 수 있었다.


시부모는 내 이름도 일본식으로 부르라고 그래야 일본에서 안전하다며

내가 부산에 가면 그 사이에 내 한자 이름에 일본식 부르는 이름을 바꾸고

난 한국식으로 내 성을 그대로 썼는데 그것도 시댁의 성으로 바꿔놨다.

그것을 다시 내가 고쳐두고 그럼 시댁에서 또 바꾸는 이런 일을 몇 년 하면서

시부모는 일본에서 살려면 더군다나 아이들을 키우려면 이렇게 해야 된다고

고집을 피우는 나에게 설득을 시키려고 했는데 얼마나 당했으면 이럴까 했다.


시부모가 2대 제일교포이고 1대의 시 할머니와 시 작은할아버지가 계셨는데

1대의 시 할머니와 시 작은할아버지는 확실하게 한국인으로 엄청 멋지셨다.

그 당시 92세의 시 할머니는 아직도 기억력이나 생활력 등 모든 게 완벽했는데

눈이 나쁘다면서 감각으로 손뜨개질을 하며 물건이 어디에 있는지도 기억하고

부엌도 냉장고도 너무 깨끗해서 놀래어 다시 할머니의 얼굴을 봤었다.


시 작은할아버지는 가장 어른이라며 시할머니가 인사를 시켜줬는데

열심히 사셨다고 하더니 재력도 있어 한국의 고향 친척을 위하는 일도 하시며

나의 아이가 태어나 인사를 갔을 때는 한국말로 꼭 아이는 한국으로 데려가라고

자신은 한국을 떠났지만 후손은 한국에서 살기를 바란다고 하셨다.

그 시 작은할아버지의 자손들은 이미 한국인이 아니라고 내가 한국에서 왔으니

이런 희망을 가져 본다고 하셨던 그 눈빛과 표정은 아직도 기억이 난다.

엄청 큰 응접실 소파에 앉아 계셨던 작은 체구의 그 시 작은할아버지는

나직한 목소리로 내 아이를 바라보면서 뭔가 꿈을 꾸듯이 말씀하셨었다.


3대인 같이 살던 사람은 그 경제력으로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 되었고

4대인 내 아이들은 한국에서 온 엄마를 만나서 일본을 떠나 살게 되었다.

거의 3대 재일교포는 한국말을 하지 못하고 이름도 일본식 이름을 쓰고 있는데

그러니까 4대가 되면 한국말을 들을 기회도 없고 배울 이유도 찾기 힘들다.

중학생이 된 딸아이가 같은 반에 자기처럼 한국 이름을 쓰고 있는 아이가 있다며

일본 이름을 가진 아이가 자기도 한국인이라고 고백했다며 신기해한 적이 있었다.

이 아이들의 가족은 한국말을 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음식은 한국식으로 만들어서

딸아이는 내가 해 주는 한국 음식보다 더 맛있게 만든다고 부러워했었다.


내가 일본에 간 80년대엔 한국 여권을 갱신하려면 교포 민단증이 필요하고

그 교포 민단증을 유지하려고 민단 회비를 내어야 했었다.

그렇게 민단은 활발하게 움직였는데 그래서 민단의 작은 모임도 많아서

아이들의 초등학교 주변의 엄마들 모임에 몇 번 참석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때마다 의견을 내면 한국 본국에서 오셨죠 하면서 말을 잘랐다.

3대냐 4대냐에서 달랐고 나처럼 본국에서 온 사람은 사정을 너무 모른다고

교포들이 일본에서 당하는 일에 그저 반항을 하면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고

그럼 그걸 그대로 아이들이 받게 된다면서 굽히거나 없던 것으로 하자는

거의 그런 식으로 마무리를 지어 10년도 안되었던 나는 매번 비겁하다고

이러니 이런 식으로 재일교포들이 무시를 당한다고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내 아이들이 커 가면서 나도 일본에서 사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이들의 삶이 어떠했는지 어떻게 그 아이들을 보호하고 살아왔는지 보여서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되었고 그리고 난 일본을 도망 나왔다.


이 드라마 파친코를 처음에는 어떻게 표현했을까 하면서 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너무 멋있게 아름답게 그래서 더 처절해 보이는 모든 것에서

그냥 코가 찡해지면서 답답해지더니 나는 울고 있었다.

내가 싫다고 발버둥 쳤던 것을 모두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냥 묻어 두었던 분노가 뭔지 알려 주는 이 드라마가 무서워 보는 걸 멈추고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궁금하기는 하지만 계속 볼 용기가 없어

더는 안 보기로 결정을 하고 불안해하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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