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 달을 비우는 집
부산으로 돌아와 여행 가방을 열었다.
기내에 들고 탈 수 있는 여행가방의 크기가 이제는 적당해졌는데
매번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물건을 줄여도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번에도 이런 가방을 열어 물건을 꺼내어 제자리에 넣어 두는데
물건의 부피는 적어졌는지 몰라도 종류는 그대로 여서 꽤나 많았다.
화장은 안 하지만 기본은 들고 다니며 머리숱이 많아서 고무줄에 핀도
정말 중요한 비상약으로 멀미약부터 파스에 비염약은 꼭 들고 다닌다.
액세서리는 없지만 대신 포켓몬을 하자고 휴대폰 두대에 태블릿에
노트북은 정말 나의 일부여서 그 부속품인 것들도 줄일 수 없는데
이런 것들이 가방의 무게를 담당하고 있어 들어 올리려면 버겁지만
노트북 없이 지내는 것은 무리여서 대신 옷가지를 줄여 들고 다닌다.
이런저런 것들을 모두 꺼내어 두고 가방을 닦아서 넣어 두고는
노트북은 책상에 설치를 하고 화장품도 약도 제자리에 넣고 나니
엄청 빨리 정리가 되어서 나이가 들어도 반복에는 학습 효과가 있다고
이 정도면 나는 멀쩡한 머리를 가지고 늙어가다가 죽겠지 했다.
그런 엄청난 기대를 품고 조금만 더 치우고 앉아 쉬자고
집을 나갈 때 들고 다니던 헝겊 가방에 필요한 것을 넣어 두는데
미국에 가지고 갔던 한국은행 카드를 보고는 잠시 멍했다가
이걸 그냥 헝겊 가방 포켓에 넣어 두고 썼다는 것을 생각해 냈다.
그러면서 내가 카드 한 장을 파스 봉투 사이에 넣어 다니는 것을
딸아이가 보더니 이게 뭐냐며 카드 지갑을 사 줄까 했던 기억이 났다.
멋진 카드 지갑은 아니지만 반 지갑이 있어 전에는 들고 다녔는데
그저 여행가방 속에 들어 있기만 한 것이 부피만 차지해 의미가 없었다.
은행 카드를 헝겊 가방 포켓에 넣어 두면서 뭔가 허전했는데
가까이에 있는 마트의 회원 카드가 항상 같이 있었다는 것이 기억났다.
그리고 그 회원카드는... 하면서 찾다가 어디에 있는지 가물거려
겨우 석 달만에 이렇게 잊어버렸다는 것에서 충격을 받았다.
그러니까 지갑이라는 것을 쓰지 않고 살아서 그런 것 같은데
부산에서 쓴 지갑의 색보다 고베에서 쓰는 지갑 색이 먼저 떠오르고
분명히 카드들은 지갑에 넣어 두었다는 것에서는 나를 믿었다.
그러니 지갑을 찾아야 한다고 이 좁은 집안에 내 물건이 있는 서랍을
모두 한 번씩 열어서 뒤졌는데 보이면 지갑 색도 떠오르겠지 했다가
지갑이라는 것이 나타나지 않아 머리를 쥐어짜면서 색을 기억해 내고
그렇게 다시 더 찬찬히 뒤져 봤는데도 지갑이 나오지 않았다.
혼자서 중얼거리면서 나는 꼼꼼하게 어딘가 잘 숨겨 뒀을 거야 하다가
아무튼 이 집안에 있을 거니 나올 때까지 쓰레기도 안 버리면 된다고 하다가
그 지갑에 뭐가 더 있는지 혹시 정말 잃어버리게 되면 뭘 해야 하는지
걱정이 커지니 지갑의 구조도 떠올랐는데 주민증이 그 속에 있었다.
주민증이 남의 손에 들어가면 무슨 일이 생기는지 불안해져서
이번엔 좀 더 더 꼼꼼하게 찾아보자고 서랍을 다시 뒤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많이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이런 일에 전처럼 초조하지는 않아
나이가 드니 좋은 점도 있다고 숨긴 곳을 적어 두지 않았다는 것은
내가 잘하는 그런 생각으로 두었다는 것이라고 나를 위로했다.
같은 곳을 물건도 별로 없는 이 좁은 공간을 또 뒤지려니 한심했는데
뭔가 놓치는 것이 없는지 아까와는 다르게 지갑의 색을 떠올리며
색을 찾자며 조금 전에도 봤던 곳을 또 보고 있는데 비슷한 색이 보이고
설마 하면서 자세히 보니 마스크 봉투 사이에 지갑이 끼워져 있었다.
정말 허탈한 기분으로 거의 한 시간을 뒤지면서 나를 원망하지 말자고
마음을 느긋하게 가지자며 용을 썼는데 분명히 보고 지나간 그곳에
지갑은 잘 감춰져 있었고 감춘 나도 감탄을 하면서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이렇게 비상하게 잘 숨기면서 왜 찾는 일에는 고생을 하는지
이것도 내 머리의 구조 탓일지도 모른다면서 다음에는 어쩔까 하는데
석 달을 비우는 집에 그냥 가져가도 된다고 놔 두기는 그렇지 않냐고
힘 빠진 나에게 나는 이게 내가 사는 방식이라고 타일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