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실패했을까?
나는 2년 동안 총 2번의 이직을 하였다. 물론 연봉 상승으로 봤을 때에는 성공이다. 4년 만에 240% 연봉 상승을 경험했다. 블라인드에 살짝의 연봉자랑(?)을 해봤다가, 거짓말하지 말라고 욕만 먹었다.
연봉 240% 상승의 비결은 딱히 없다. 그냥 나의 일을 가리지 않고 다 해보는 것이다. 그 자체가 결국 가장 가치 있는 경험이 된다는 부정할 수 없는 성장의 증거이기 때문에.
성공이라 정의하기에는 나 스스로도 선뜻 답을 내리지 못한다. 첫 번째 직장은 업계에서 차별화된 제품을 내놓지 못하는 바람에 이를 떠나게 되었고, 두 번째 직장은 유동성 위기에 직면했다. 입사 후 2개월 뒤 80% 이상 동료들이 권고사직을 당했다.
첫 번째 이직은 굉장히 잘 나가고 있는 인공지능 스타트업의 PO 자리를 정리하고, 가상화폐 업계로 이직을 하였다. 빠른 부자가 되길 갈망하였다.
블록체인 세계에 발을 들이며, 나는 이미 거액을 벌어들인 동료들의 성공담에 마음이 들떴다. 그들의 이야기는 나에게 블록체인에 대한 깊은 연구와 공부를 자극했고, 이는 업무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투자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이러한 노력은 1년 만에 170%라는 놀라운 수익률로 결실을 맺었다. 비록 동료들의 성과에는 미치지 못했다.
매달 해외 출장을 다니며, 세계 각지의 다양한 문화와 인종을 만나며 화려한 삶을 즐겼다. 꿈만 같았다. 이때 운이 좋게 암스테르담에서 1978년도부터 SWIFT가 주최하는 SIBOS라는 국제 행사에서 한국 회사, 한국인 최초의 발표도 해봤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금융 시장의 급격한 변화 앞에 잠시 멈춰 섰다. 금리 인상의 물결은 스타트업의 겨울로 이어졌고, 투자 시장은 차갑게 식어갔다. 베어마켓임에도 불구하고 대단한 대표의 능력으로, 급여는 안정적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연봉 인상은 없었다.
블록체인 프로젝트만으로는 한계를 느낀 우리 회사는 GPT 시장에 뛰어들었다. 우리는 한국어 처리 능력이 뛰어난 챗GPT 서비스를 신속하게 출시하며 시장의 주목을 받았다. 초기 예상을 뛰어넘는 사용자 트래픽을 기록하며 성공적인 출발을 알렸다. 그러나 이는 내가 처음 회사에 합류했을 때의 목적과는 사뭇 달랐다. 결국 나는 가상화폐 투자자로서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가상화폐로 단기간에 부를 축적한 이들이 종종 돌아가는 곳, 그것은 바로 실체가 있고 훨씬 큰 규모의 부동산 시장이었다. 가상화폐보다 실체가 존재하며, 약 145배 큰 부동산에 관심이 갔다. 나는 부동산 업계로의 전환을 결심했고, 부동산 퀀트 분석을 전문으로 하는 회사에 몸담게 되었다.
가상화폐와 주식 시장의 변동성에 몸을 담글 수 있는 금융 공학의 천재들 사이에서도 부동산 퀀트 분석이 더욱 직관적으로 다가왔다.
회사가 개발한 제품은 진정으로 놀라웠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인생에서 가장 큰 구매인 주택을 선택할 때, 깊이 있는 데이터 분석을 활용하지 않는다. 나는 우리 제품이 시장을 혁신할 잠재력이 있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시장의 벽은 예상보다 높았고, 사람들의 구매 습관을 바꾸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끊임없이 도전하고 싶었다. 서비스의 돌파구를 찾기 위해 두 달 동안 밤낮으로 노력했고, 그 결과물을 임원진에게 발표했다. 그날의 무거운 공기와 임원진의 무표정한 얼굴을 나는 여전히 잊지 못한다. 발표 후, 임원진은 나를 따로 불러 더 이상 회사를 유지할 수 없다는 소식을 전했다.
최근에 신혼집을 마련한 터라, 이 소식은 마치 머리를 맞은 것 같은 충격이었다. 분노가 치밀었지만, 노동자로서 내가 상황을 어떻게 바꿀 수 있겠는가 하는 무력감에 휩싸였다.
결국, 모두가 갑작스럽게 짐을 싸서 회사를 떠났고, 나 역시 가장 마지막에 합류한 팀원으로서 이별을 고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무급이라도 회사에 남아 일하고 싶다고 애원했지만, 회사 측은 나의 제안을 거절했다. 토스와 같이 멋지게 회사를 살리고 싶은 꿈은 접어야 했다.
커리어는 마치 사색의 숲을 거닐며 길을 모색하는 여정과 같다. 그러나 이제는 행위의 충동적 진입에 잠시 멈추고 심오한 고찰이 필요한 것 같다.
나는 퇴근 후, 다양한 부업들을 하였다. 그중 하나가 기업 강연이었다. 권고사직 소식을 주변에 알리니 챗GPT, 데이터 리터러시, PO, UX/UI 디자인과 같은 주제들로부터 강연 요청이 쇄도하였다. 나는 이 모든 기회를 마다하지 않고 품에 안았다.
강연자로서의 내 평가는 항상 최고점을 유지해 왔다. 잠시나마 부업 소득이 본업의 몇 배 이상이 되었다. 이는 분명 기쁜 일이지만, 이러한 성취가 얼마나 오래 갈지는 불확실한 미래의 안갯속에 가려져 있다.
아직 30이라는 젊은 나이에 기업 강연가로서의 길을 전문적으로 걷기에는 탐험해 볼 만한 경로가 훨씬 더 많이 남아 있는 것 같다.
밥 먹고 살기 참... 어려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