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야 하는 건 물건뿐만이 아니다.
나는 미니멀리즘을 선망하는 맥시멀리스트(Maximalist)다. 또 다르게 말하자면, 맥시멀리스트인 나를 부정하는 미니멀리스트다. 이게 뭔 개소리지? 결론은 맥시멀리스트인 내가 싫다. 심플하게 살고 싶은데 머릿속에서 많은 생각들이 날 괴롭힌다. 수년 전, <나는 단순하게 살기로 했다>라는 책을 읽었다. 당시만 해도 저렇게까지 단순히 살 필요가 있나 싶었다. 그런데 지금은 저렇게 살고 싶다. 어차피 나는 저렇게 살지 못한다는 걸 잘 안다. 그래도 발 끝 정도 따라가면 지금보단 심플한 인생을 살고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
그런데 나도 미니멀(minimal)한 분야가 하나 있다. 그건 바로 인간관계다. 안 입는 옷, 언젠간 읽을지도 모를 책, 수많은 생각들을 정리하는 건 참 어렵지만 인간관계만큼은 쉽게 정리한다. 어렸을 땐 반대였다. 타인과 싸우고 관계가 틀어지면 며칠 동안 불안하고 신경 쓰였다. 어떻게 하면 깨진 관계를 다시 회복할 수 있을까, 하루빨리 화해하며 불편한 기류를 끝내고 싶었다. 어떤 고난과 역경이 와도 극복하려고 했다. 그러고 나면 더욱 깊은 관계가 된다고 믿었다.
저랬던 과거가 부질없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땐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으니까. 한 번 맺어진 인연은 무엇보다 소중했고 그 소중함을 잃기 싫었다. 맞지 않는 조각을 어떻게든 끼워 맞추려 노력했다. 왜냐하면, 우린 친구고 연인이고 가족이니까.
성인이 되고 시간이 지나면서 동그라미였던 나는 세모로 변해있었다. 내 뾰족함에 찔려 상처를 입는 사람들이 종종 생겼다. 상대가 아파하는 모습을 보이면 급하게 응급 처지를 해줬다. 그리고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외면하고 조용히 상대에게서 멀어졌다. 그게 서로를 위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사실 이러한 변화는 내 이기적인 성격도 한 몫한다. 가뜩이나 생각이 많아 머리가 아픈데 인간관계까지 힘들어지는 건 에너지 한도 초과다. 한때 좋은 관계였어도 미묘하게 달라진 감정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내 확인하고 싶지 않다. 이제는 안 맞는 조각을 억지로 끼워 맞추는 관계가 싫다.
그렇게 정리하다 보니 내 주변에는 몇 명 남지 않았다. 그중 한 친구가 "너 이러다가 나중에 결혼식 하객들은 누가 오냐?"며 걱정 섞인 농담을 했다. 그러게? 큰 일이다. 그 생각을 못했다.
정리 전문가 '곤도 마리에'는 설레지 않으면 버리라고 한다. 지금까지 나는 미니멀해진 인간관계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내용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사람을 정리한다는 말도 좀 이상하다. 음... 제목을 다시 써야 하나?
집안 곳곳에 숨겨진 입을지 말지 고민 중인 티셔츠, 나중에 쓸지도 몰라 처박아둔 잡동사니들은 더 이상 설레지 않는다. 지금 당장 버려도 아무 일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래도 쉽게 버리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쌓여가는 물건마저도 내 인간관계처럼 대하면 되니까. 그냥 외면한 채 시야에서 멀어지면 괜찮아진다. 결국 사람이든 물건이든 지랄 맞은 내 성격과 맞지 않다면 본능적으로 피했던 거였다. 맥시멀리스트인 내가 인간관계만큼은 미니멀하다는 말, 취소다. 그저 내 행동을 합리화하려 했을 뿐.
내가 이러는 건 유전인가 보다. 우리 엄마도 (아마) 맥시멀리스트다. 옷장 깊숙이 쌓인 옷, 찬장 구석에 놓여있는 그릇들은 언젠간 입고 쓸 거라며 버리질 않는다. 타지 생활 8년 차, 명절을 맞아 고향에 내려갈 때마다 그 짐들은 먼지만 쌓여간 채 그 자리를 지켰다.
엄마, 혹시 엄마도 외면하고 멀어지는 중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