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드 코로나 이후 어쩌다 보니 여섯 번 해외여행과 열여섯 도시를 방문했다. 그중 가장 좋았던 여행지를 묻는다면 단언컨대 뉴질랜드 남섬이다. 이제 계란 한 판 넘긴 인생에서 손꼽는 추억으로 남았다. 이런 벅찬 기억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써야 느꼈던 감정 그대로 표현할 수 있을지 부담이 컸다. 그래서 지금까지 쓰지 못했었다(는 핑계로 들리지만). 더불어 최근 현생은 지난 여행을 회상할 여유조차 없었다고 바쁜 척해본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기록해두지 않으면 그때 기억은 서서히 잊힐 것 같았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은 작성해보려 한다.
뉴질랜드를 여행하기 전까지는 ‘대도시 여행‘을 좋아했다. 고층 빌딩이 즐비하고 수많은 인파가 몰리는 번화가를 보면 가슴이 뛰었다. 그래서 일본 도쿄를 최고의 여행지로 꼽았다. 그런데 뉴질랜드 남섬에서 경험한 대자연은 훨씬 강렬했다.
여행 첫날 묵었던 퀸즈타운 숙소 뒷 산 정상에서 찍은 사진이다. 아침 먹고 산책 겸 올라갔던 뒷 산인데 이렇게 광활할 줄이야. 올라가는 동안 만났던 외국인들은 매번 나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처음엔 ‘모르는 나에게 왜 인사를 건네지?‘ 싶었다. 생각해 보니 편의점에서도 생수 한 병 사러 간 건데 종업원이 “How are you?”하고 안부를 물었다. 그들의 나이스한 문화는 점차 적응됐다. 그동안 얼마나 한국적으로(?) 살아왔으면 인사조차 부담스러워했나 싶었다. 이렇게 낯선 문화에 스며드는 것이 여행의 묘미인가 보다.
뉴질랜드 남섬은 경이로운 대자연이 가득하다. 어딜 가든 윈도우 바탕화면에서나 볼 법한 경관을 보여줬다. 단순히 멋있을 거란 기대만 있었는데 그 앞에 서면 한 없이 작아지는 내 모습이 오묘했다. 나라는 존재는 기뻤다, 슬펐다 요동치는 감정을 가진 불안정한 사람인데 자연이란 존재는 어떻게 그 자리에 가만히, 무던히 있을 수 있는 건지 궁금하고 부러웠다.
이런 경관을 매일 볼 수 있는 뉴질랜드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이런 대자연을 매일 보고 산다는 건 그저 집 앞이고 뒷 산일 뿐인지, 혹시 자연 앞에서 억지로 명상의 시간을 가지려고 해 본 적 있는지.
나는 평소 술을 즐겨하지 않는다. 맛도 없고 쓰기만 한 소주와 배부르고 살찌는 맥주가 싫다. 그런데 시드니 여행 가이드 말에 의하면 뉴질랜드가 와인 맛집이라고 추천했다. 특히, 맛이 매우 풍부하고 산도가 강한 편인 소비뇽 블랑이 유명하다. 더불어 현지에서 저렴한 가격은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매일 밤 마트에서 와인을 사 마셨다.
와인은 생각보다 나와 잘 맞았다. 평소 단 맛을 좋아해서 그런가? 또한 천천히 달아오르는 취기도 한몫했다. 보통 한국에서 소주를 마실 때 시끄러운 분위기와 빠른 템포가 함께했는데 그런 분위기는 나와 맞지 않았다. 그에 비해 와인은 차분한 분위기에서 천천히 마실 수 있어서 좋았다. 평소 내 성향과 잘 맞다고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뉴질랜드에서 와인을 맛본 뒤론 한국에서도 특별한 날에 와인을 종종 마시곤 한다. 아직까지 와인에 대한 지식은 없다. 단순히 ‘뉴질랜드 와인’이라고 하면 믿고 마신다. 뉴질랜드에서 겪었던 추억을 잠시나마 떠올릴 수 있는 뉴질랜드산 와인이 그저 좋으니까.
시드니 여행을 마치고 뉴질랜드 퀸스타운행 비행기를 탔다. 대략 3시간 정도 걸리는 단거리 비행이다. 나는 간단히 기내식을 먹고 음악을 들으며 한숨 자려고 했다. 아주 당연했던 행동들이 지루해질 때쯤 주변 사람들은 뭐 하고 있는지 궁금해졌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이 책을 읽고 있었다. 나는 놀랐다. 많은 사람들이 책 읽는 모습에도 놀랐지만, 항상 책을 들고 다닌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다.
스마트폰 하나 덜렁 쥔 내 손이 유독 초라해 보였다.
이후 가방을 가지고 나갈 때는 무조건 책 한 권 넣고 다니게 됐다. 출퇴근 시간에 잠깐 읽거나 점심시간을 활용해 읽을 수도 있으니까. 한 장도 읽지 못하고 그저 들고만 다닌 날도 많다. 그러나 중요한 건 내가 당시 느낀 (놀랐던) 감정이 행동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이다. 언제 어디서든 책 읽을 준비가 되어있는 자세를 배웠으니까. 그동안 자투리 시간을 어떻게 흘려보냈는지 생각에 잠겼다.
뉴질랜드 남섬은 인적 드문 곳이 많아 고요했다. 해가 지면 주변 상점들은 일찍 문을 닫았고 그로 인해 꼼짝없이 숙소에서 휴식을 취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기만 하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줄 알았다. 그런데 자꾸만 나태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에 계속 구글맵을 들여다봤다.
지각을 면하려고 빠르게 씻고 출근하는 아침. 밀린 업무와 마감기한을 지키기 위한 집중의 시간들. 1분이라도 일찍 집에 가기 위해 실시간 교통 정보를 확인하던 퇴근길. 한국에서의 시계추를 뉴질랜드에서까지 적용시키려 했나 보다.
그 당시 누군가가 곁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아'라고 말해줬으면 어땠을까? 하지만 그 말도 쉽게 받아들이진 못했을 것 같다. 1년이나 지난 지금, 내가 나 자신에게 말해줘야겠다.
괜찮아, 잘하고 있어.
그대로만 있어도 정말 괜찮아.
여행 5일 동안 사계절을 경험했다. 그래서 더욱 뉴질랜드 남섬을 잊지 못한다. 이쯤 되면 내가 그토록 여행 날씨에 민감했던 이유를 공감해 줄거라 믿는다. 관련 기사를 끝으로 자연이 주는 선물 대잔치(?)였던 뉴질랜드 남섬 여행기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