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장님, 먼저 퇴근해 보겠습니다.

회사와 거리두기

by 승띵

부모님이 처음 컴퓨터를 사주셨던 그 시절, 우연찮게 클릭했던 그림판과 포토샵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게 좋았다. 내가 만든 걸 인터넷에 올리고 누군가 댓글을 남기면 그게 그렇게 기뻤다. 담임 선생님은 그런 일 하는 사람을 ‘웹디자이너(Web Designer)‘라고 알려주셨다. 그 뒤로 매년 형식적으로 제출하는 장래희망란에 웹디자이너를 적어냈다. 그리고 어느덧, 나는 7년 차 웹디자이너가 됐다.


첫 회사를 초록창이나 춘식이가 반겨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의 커다란 희망과 반대로 작은 디자인 회사에 입사했다. 비록 간판은 아쉬울지라도 그토록 하고 싶었던 디자인 업무를 하며 자부심 느끼곤 했다. 하지만 금방 싫증 내는 성격 탓에 맡은 업무가 질릴 때쯤 이직을 시도했다. 그럴 때마다 대부분 원하는 회사로 비교적 쉽게 이동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초년운을 다 써버렸던 건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 덕분에 디자인 포트폴리오만큼은 탄탄대로 쌓여가고 있었다.


경력을 쌓아 30대 중반쯤엔 과장 직급을 달고 안정적인 삶을 살아가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허망에 비웃기라도 하듯 서른 살이 되자마자 전세 사기를 겪었다. 그 순간 내가 세웠던 기준들이 모두 흐려지기 시작했다. 이직을 반복하며 월급은 조금씩 올랐지만 인생은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는 걸 알았다. 내가 지금까지 쏟았던 노력과 열정은 내 삶의 불행을 막아주지 못했다.




한동안 출근길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나는 지금 어디를 향해 걷고 있는 걸까, 앞으로 어디를 향해 걸어야 할까. 예전엔 회사라는 조직이 나를 증명하고 인정받을 수 있는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저 내 삶을 지탱하는 수단이 될 뿐이었다. 슬프게도 가장 불행한 상황이 되어야만 알 수 있었던 깨달음이었다.


앞으로는 내 삶을 위한 포트폴리오를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지금 당장 회사를 그만두더라도 내가 나로서 존재할 수 있는 프로젝트. 어떤 회사에 다니는 지보다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지를 고민한다. 더 이상 회사가 나를 증명해주지 않아도 괜찮다. 나는 나로서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가는 중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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