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od Goodbye
나이가 들수록 기록하지 않으면 나의 과거는 그저 휘발될 뿐이다. 2025년이라는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기 전, 내 안의 변화를 선명하게 새기기 위한 '마침표'를 시작한다.
올해 가장 인상 깊었던 순간은 내 생일을 맞아 방문했던 부산 여행이었다. 체감온도 40도를 웃도는 미친 더위였지만 그저 생일이라는 특별함 하나로 떠났다. 평소 음악 감상이 취미고 일상인 나에게 특별한 공간을 발견했다. 바로 청음샵이다. 아주 좋은 스피커로 듣고 싶은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곳이다. 이런 장소가 처음이라 낯설었다. 하지만 첫 곡으로 5 Seconds of Summer의 Teeth가 나오는 순간, 온몸으로 느껴지는 전율과 희열은 강렬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신청곡도 들으면서 새로운 취향을 접할 수 있어서 좋았다. 1시간이라는 시간이 10분처럼 느껴졌던 곳, 부산 청음샵에서의 순간은 아직도 선명하다.
올해의 음악을 딱 하나 꼽자면 이루리의 선인장꽃이다. 평소 즐겨 듣던 노래도 아니었고 원래 알고 있던 가수도 아니었다. 앞서 언급한 부산 청음샵에서 다른 손님의 신청곡으로 우연히 알게 된 곡이다. 처음에는 '참 독특한 노래구나' 정도로 생각하며 흘려들었지만, 어느새 나도 모르게 이 노래를 찾아 듣고 있었다.
강렬한 일렉 기타 사운드와 대비되는 몽환적인 목소리가 너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이 곡을 들으면 당시의 순간들이 영화 속 장면처럼 떠오른다. 부산의 미친 듯한 여름 더위, 에어컨 바람으로 서늘한 청음샵의 공기, 그리고 내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곁에 있던 귀인까지.
여름 내내 반복해서 듣는 바람에 지금은 잠시 귀를 돌렸지만(?) 다시 여름이 돌아오면 가장 먼저 꺼내 듣는 노래가 되지 않을까 싶다.
올해는 다양한 핑계를 대며 크고 작은 소비를 참 많이도 했다. 그중 가장 마음이 가는 물건을 꼽자면 단연 마샬 스피커다. 부산 청음샵에서의 강렬한 기억은 꽤 긴 후유증을 남겼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집에서도 온전히 누리고 싶다는 욕망으로 이어졌다.
스피커의 세계는 넓은 집과 비싼 장비가 필수였다. 나는 그 아득한 기준 대신 원룸에서 듣기에 적당한 출력과 인테리어 효과를 낼 수 있는 마샬 스피커를 선택했다. 이제는 음악을 틀어놓고 책을 읽거나, 라디오를 들으며 그림을 그릴 때마다 형용할 수 없는 행복을 느낀다. 대단할 것 없는 소박한 순간들이다. 이런 찰나들이 겹겹이 쌓여 나의 하루가 완성된다.
올해 하반기부터 미술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이곳은 조금 특별한 곳이다. 수강생의 99%가 우리 어머니와 비슷한 연배의 분들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30대 남자 수강생은 오직 나뿐이다. 일부러 이런 환경을 찾아간 것은 아니었다. 어쩌다 보니 마주하게 된 낯선 평화로움이 나는 꽤 마음에 든다.
처음 배운 건 소묘였다. 소묘의 매력은 정직함에 있다. 시작은 막연하지만 한 줄 한 줄 쌓여가는 연필 자국과 섬세한 지우개질을 거치다 보면 어느새 선명한 결과물이 나타난다. 그 과정을 지켜보는 매 순간이 무척 뿌듯하다.
본래는 업무에 필요한 역량을 기르고자 찾은 학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그리는 행위 자체에 푹 빠져 있다. 이제는 미술이 내 삶의 한 부분으로 단단히 자리 잡았으면 하는 욕심마저 생긴다. 앞으로 다양한 그림을 그리고 싶다. 내 마음속 깊은 생각들도 하얀 종이 위에 투영해보고 싶으니까.
올해 가장 인상 깊었던 장소는 9월 말 다녀온 중국 충칭이다. 충칭은 '사이버도시', '8D도시'같은 화려함과 다이내믹이 공존하는 곳이다. 평소 대도시 환상을 품고 있었기에 가기 전부터 기대가 컸다.
그런데 웬걸? 내 예상보다 훨씬 더 크고 거대한 도시였다. 아시아에서는 일본 도쿄가 대도시의 정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충칭을 보고 나니 여기도 비벼볼 법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또한 관광지마다 마주친 친절한 사람들, 그리고 저렴하면서도 중독성 있는 음식들은 충칭의 매력을 한층 더해주었다. 사실 여행 가기 전, 갑작스러운 귀국 항공편이 사라지는 바람에 충칭 여행을 아예 취소해야 하나 고민했었다. 그런데 어찌어찌 대체 편을 구해서 결국 다녀왔다. 난 이 선택을 정말 잘했다고 생각한다. 포기하지 않고 떠난 충칭은 나에게 올해 최고의 추억을 선물해 주었다.
올해는 후회와 반성할 일도 참 많았다. 그중 가장 개선이 필요한 부분은 단연 '쓸데없는 소비'다. 앞서 최고의 소비를 말해놓고 바로 반성을 하려니 조금 민망하다. 하지만 어찌 됐건 최근 들어 나의 씀씀이는 분명 커졌다. 특히 '나를 위한 선물'이라는 그럴듯한 명분을 붙여 의미 부여하는 물건들이 늘어났다.
최근 <우리의 행복은 당연하지 않습니다.>라는 책을 읽었다. 저자는 환경은 고려하지 않은 채 일단 갖고 싶으면 무조건 사고 보는 태도를 지적한다. 우리가 물건을 소비할수록 기업은 더 많은 물건을 만들어낸다.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결국 환경 파괴로 이어진다.
'지금 당장은 괜찮아, 내가 가지고 싶은 물건을 얻었으니까'라는 생각으로 끝내버리기엔 나의 소비가 미래 세대에게 너무 큰 짐을 주는 건 아닐까 하는 죄책감이 들었다. 무작정 결제 버튼을 누르던 나의 손가락을 멈추고 스스로 되돌아보게 된 계기였다.
새로 사지 말고 있는 걸 잘 쓰자. 끝까지 쓰고, 고장 날 때까지 쓰고, 고쳐 쓰자. 조금은 불편하더라도 일상에서 이 원칙을 지키는 것. 그것이 나의 2026년 목표다.
정리하고 보니 여전히 생생한 조각들이 머릿속을 유영한다. 이 기분 좋은 에너지를 발판 삼아, 다가올 2026년은 내 안의 창의력을 마음껏 발산하는 해로 만들고 싶다. 2025년에게는 미련 없이 안녕을, 다가올 날들에게는 설레는 마음으로 인사를 건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