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7. 로부체

2017.10.06 (금)

by 이승환

아침 여섯 시에 일어나 일찍 출발할 채비를 했다. 짐을 꾸리고 식당으로 갔는데 여섯 시 반에 주문한 아침이 일곱 시가 다 되어서 나왔다. 이 집 주방은 원래 아침잠이 많은데 우리가 눈치도 없이 밥을 일찍 주문했던 모양이다. 덕분에 아침 일찍 출발하려던 우리의 계획도 무산되었다. 그래도 밥은 맛있었다. 찐 감자, 볶은 감자, 튀긴 빵, 수프 등을 든든히 먹고 출발했다. 숙소를 출발한 시간은 대략 7시 50분경. 마당을 나서니 맞은편 집 마당에 야크들이 한 짐 잔뜩 짊어질 채비를 하고 있다. 아마 저 친구들도 우리와 같은 방향으로 가는 것이겠지.



역시 이미 구름이 잔뜩 차오르고 있다. 전날 오전에 올랐던 뒷산길을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언덕 하나를 오르면 어제 갔던 길과 분기하는 지점이 있다. 그곳을 지나면 완만한 내리막과 평지가 이어진다. 곧 나올 내리막 생각을 하면서 가쁜 숨을 몰아쉬며 힘겹게 뒷산을 올랐다. 오르는 길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채 30분이 되지 않아 분기점에 도착했다. 잠시 숨을 고른 후 이어지는 평평한 길을 걷다 뒤를 돌아보니, 구름에 둘러싸인 아마다 블람과 탐체르쿠가 보인다. 이젠 저들을 뒤로하고 에베레스트를 향해 간다.


구름에 뒤덮인 아마다 블람과 탐체르쿠


설산이 점점 가까이 그리고 많이 보인다. 내일이면 EBC에 도착한다는 사실이 새삼 실감난다.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다소 이색적이고 조금은 초현실적이었다. 한 켠으로 구름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고, 다른 한 켠으로는 맑은 햇살이 희망처럼 내리쬐고 있었다.



나는 전날 오전 산행에서 땀이 식어 급격히 체온이 떨어질 뻔했던지라, 이날부터는 옷을 한 겹 더 껴 입었다. 아랫동네에서는 기능성 반팔 티셔츠에 바람막이 하나만 입었는데, 조금 더 올라와서는 반팔 티셔츠 대신 히트텍 상의를 한 장 입고 있었다. 이날부터는 히트텍 위에 후리스를 입고 그 위에 바람막이를 입었다. 물론 조금만 힘을 쓰면 금방 더워져서 앞 지퍼를 다 열고, 체온이 식으려 하면 다시 잠그기를 계속 반복했다. 온도계는 약 16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10월 초의 히말라야는 한국의 가을과 비슷하다. 햇살은 따뜻한데 바람이 많이 분다. 바람은 높이 올라갈수록 차고 거세지기 때문에, 체온을 뺏기지 않도록 항상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한편으로는 공기가 건조한 탓에 바람에 먼지가 많이 섞여 날린다. 난 버프를 챙겨 오지 않은 탓에 KF94 마스크를 꺼내 썼다. 원래 카트만두 시내 관광용으로 가져왔던 것이라 고산지대에서 쓰게 될 줄은 몰랐지만, 챙겨온 덕을 톡톡이 봤다. 히말라야의 바람은 건조하고 먼지가 많아 버프나 마스크를 꼭 챙겨야 한다. 먼지와 태양광으로부터 눈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고글도 필수.


다행히 예상했던 것보다 길이 편했던 덕에 혜정이도 힘들어하지 않고 잘 따라와 줬다. 사진 찍어 달라며 먼저 포즈를 취하는걸 보니 아직 상태가 괜찮아 보인다. 혜정이가 포즈를 잡자 찬도 따라 포즈를 잡았다.


혜정
근데 늬들 없는게 젤 예쁘다


출발한 지 두 시간 반쯤 지나, 오전 10시 20분경 투클라(4,620m)에 도착했다. 점심 먹기엔 다소 이른 시간이지만 여기서 밥을 먹어야 한다. 이 다음은 급경사로 악명 높은 투클라 패스라는 구간이 기다리고 있고, 그 뒤로도 한 시간을 더 걸어야 오늘의 목적지인 로부체(4,930m)에 도착한다. 그리고 여기는 로부체 가기 전에 있는 마지막 롯지다. 볶음밥, 쉐르파 스튜, 프라이드 누들 등을 시켜서 든든하게 먹었다. 희한하게도 난 참 소화가 잘 되고 항상 밥맛이 좋았다. 게걸스럽게 먹고 나서 옆을 보니 내 배낭을 멘 포터 분이 찻잔을 들고 구석에 앉아 있었다.


시리에게 저분들은 식사를 하시는 것이냐고 물어봤더니 저쪽 한 켠에 포터들이 이용하는 식당이 있다고 한다. 전에 ABC 트레킹을 다녀온 율에 따르면, 안나 푸르나 지역에서는 트레커와 가이드와 포터가 다 같은 장소에서 밥을 먹는다고 한다. 그런데 이 지역은 안나 푸르나와는 관습이 다른 것 같았다. 여행 내내 어느 롯지를 가도 트레커는 트레커들끼리만 밥을 먹었다. 그들의 포터들은 같은 식당을 이용하지 않았다. 난 우리 포터들이 얼마나 무거운 짐을 지고 다니는지 알기에, 그분들이 행여나 제대로 처우를 받지 못하거나 끼니를 제대로 때우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계속 마음 한편이 편치 않았다. 지금 저쪽에 앉아서 한잔에 80루피 하는 마살라 티를 마시고 계신데, '저게 설마 점심은 아니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우리도 밥을 다 먹고 마살라 티를 미디움 팟으로 주문해 마시고 있던 터라, 티 팟을 들고 다가가 잔을 가득 채워 드렸다. 율은 에너지바 두 개를 꺼내 건네 드렸다. 그는 많이 고마워했다. 우리가 차를 다 마시고 식당을 나갈 때까지 옆에 앉아 계시다가, 우리가 식탁에 올려뒀던 휴지 같은 걸 대신 치워주셨다. 마치 집사나 비서가 의전해주는 듯한 느낌이라 익숙지 않은 우리로서는 많이 부담스러웠다. 그럴 필요 없다고 얘기했지만 미소를 지으며 괜찮다는 몸짓을 했다. 아마 그분 나름의 예의와 호의를 표현한 것이리라. 이후로도 나는 포터분들이 눈에 보일 때마다 내가 가지고 다니는 행동식을 챙겨드리며 고마움을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 분들이지만 과연 내 진심이 닿았을까. 전해졌길 바랄 따름이다.


점심을 먹고 롯지를 나서니 악명 높은 투클라 패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과연 이름값을 했다. 한국의 '악'자 들어가는 산들 마냥 돌투성이 비탈길이다. 오전에 가뿐한 발걸음으로 수다를 떨며 사진도 찍으며 투클라까지 왔던 우리 일행은 여기서 그만 체력이 탈탈 털려 버리고 말았다.


투클라 패스


투클라 패스의 끝에는 메모리얼 파크가 기다리고 있다. 일명 쉐르파 무덤이라고도 하는 이 곳은, 히말라야에서 유명을 달리한 각국의 산악인을 추도하는 장소다. 여러 나라 문자로 쓰인 비석들이 눈에 들어온다. 마침 지옥 같은 오르막을 뚫고 올라온 뒤라 한층 더 평화롭게 느껴졌다.


메모리얼 파크에 도착해 숨을 고르는 일행들
메모리얼 파크
삼가 고인의 명복을 기립니다.


따스한 햇살 아래 휴식을 취하고 사진도 찍으며 한참을 노닥거린 뒤, 다시 로부체를 향해 출발했다. 여기서부터는 평탄한 돌길과 흙길이 계속 이어졌다. 해발 오천 미터 근처에 오니 풍경이 점차 황량해져 간다. 흔히 에베레스트 지역을 거친 남성미에, 안나 푸르나를 풍만한 여성미에 비유한다고 한다. 이 즈음 눈에 들어온 풍경은 거친 남성미가 맞다. 안나 푸르나의 풍만함은 아마도 내년에 보러 갈 수 있겠지.


로부체 가는 길


약 한 시간 남짓을 걷자 오늘의 목적지인 로부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여긴 일년 내내 사람이 상주하지 않는 지역이라고 한다. 지금은 몬순(우기)이 막 끝나 날씨가 아주 좋을 때지만, 추운 겨울이 오면 사람이 살 수 없다는 얘기다. 오지 중에서도 오지로 들어왔다는 느낌이 확 드는 것이, 이 마을은 롯지들이 일종의 공동 사업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이전까지는 아무 롯지에나 들어가서 숙박료를 지불하고 묵으면 됐는데, 이 작은 마을은 숙박료를 결제하는 관리실이 마을 입구에 있었다. 여기서 비용을 지불한 뒤 빈 방이 있는 롯지를 찾아 들어가는 시스템이다. 이 어색한 중앙집권적 시스템은, 그만큼 이곳의 환경이 인간들이 버텨내기에 녹록치 않았음을 반영하는 것이 아닐까.



도착 시간은 오후 한 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점심을 먹어야 할 것 같은 시간인데 이미 투클라에서 먹고 왔다. 방에서 쉬다 두시쯤 식당에 내려와 간식을 먹었다. 여긴 백인들이 주로 오는 롯지라 서양식 메뉴가 많았는데 놀랍게도 햄버거가 있었다. 난 주저 없이 치즈버거를 주문했다. 일행들은 메뉴판을 들여다보며 종업원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더니 파코다라는 메뉴를 주문했다. 치즈버거는 실패, 파코다는 대성공이었다. 파코다는 밀가루, 야채, 약간의 고기를 넣고 튀긴 음식으로 한국에서 먹던 고로케와 흡사했다. 치즈버거는 햄버거 빵이 없었는지 볼품없는 식빵 사이에 패티를 끼워 내왔다. 비교의 여지없이 파코다가 월등히 훌륭했다.


파코다가 월등했다


그리고 식당에 죽치고 앉아 원카드를 했다. 카드를 돌리고 있자니 지난번 딩보체 롯지에서 말을 섞고 사진도 같이 찍었던 인도 여성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그녀의 이름은 니투(Netuu). 전통적인 인도 여성과는 한참 거리가 멀어 보이는 그녀는, 실리콘 밸리의 IT기업에 근무하는 지극히 서구적이고 외향적인 사람이었다. 자기도 카드 게임을 좋아한다며 스스럼없이 끼워달라고 말하는 그를 우리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리고 몇 시간을 둘러앉아 게임을 했다. 니투는 원카드가 처음이어서 우리가 가르쳐 주면서 시작했다. 니투의 서투른 모습을 옆에서 보고 있던 시리가 다가와 훈수를 두기 시작했다.


시리의 모습은 진정 반전이었다. 저만치에서 보고 있다 다가와 훈수를 두더니, 어느 순간 훈수를 넘어 순식간에 훅 들어와 게임을 주도하고 있었다. 언제 어떤 카드를 내야 유리하고 불리할지를 계산하며 훈수를 두는 그의 표정에서, 낮에 가이드를 할 때 '아 얘네들 또 사진 찍는구나, 그래서 언제 출발할 거니'하고 지루해하는 표정과는 전혀 다른 진지함이 엿보였다. 그는 가이드를 하기 전 한국에서 4년을 기러기 아빠로 일하다 네팔에 돌아왔다고 한다. 필시 무언가 사연이 있을 것이다.


한편 게임을 하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니투는 요가와 명상에 대한 얘기를 들려줬다. 그녀는 요가의 달인처럼 보였다. 사진 찍던 자세가 이미 범상치 않았다. 니투에 따르면 요가는 정신의 수행이며, 수련하고 집중하면 삼라만상을 다 느낄 수 있다고 했다. 심지어 자기 집 주방에서 요리를 하는 중에도 우주의 에너지를 느낄 수 있다고 했다.


다만 내가 그녀의 말뜻을 있는 그대로 명확히 이해했는지는 확신이 없다. 단지 내 영어가 짧아서는 아니고, 실내의 공기 또한 크게 한 몫을 했을 것이다. 식당 한가운데 놓인 재래식 난로는 일산화탄소를 맹렬히 내뿜고 있었다. 우린 원카드에 빠져 대략 세 시간 넘게 죽치고 앉아 있으면서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창밖이 어둑어둑해질 무렵에야 이 사실을 깨달은 우리는, 한 사람씩 차례로 자리를 일어나 바깥공기를 쐬고 돌아왔다. 원카드도 그렇게 어영부영 파장이 났다. 그대로 조금 더 식당에 앉아 있으니 곧 주문해둔 저녁이 나왔다. 저녁식사를 마친 시간은 대략 저녁 일곱 시. 다음날 일정 얘기를 잠깐 하고 바로 방으로 올라갔다.


이날 니투와 함께 원카드와 수다에 빠져 일산화탄소를 듬뿍 들이 마신 건 대단히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나를 제외한 나머지 셋은 다음날부터 본격적으로 고산증세가 도지고 말았으니까. 차라리 술을 마시고 기절하듯 잠에 드는 게 나았겠지 싶다. 이날 저녁은 나도 머리가 지끈거려 책을 오래 읽지 못하고 바로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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