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0.07 (토)
찬이 깨우는 소리에 일어나 짐을 꾸리고 식당으로 내려갔다. 밥을 먹으며 일행들의 안색을 보니 다들 피곤해 보인다. 혜정이는 한눈에 봐도 고산 증세가 더 심해졌다. 사실 간밤에는 나도 깊은 잠을 들지 못했다. 저녁에 잔뜩 들이마신 일산화탄소의 탓인지, 단지 산소가 부족해서였는지, 그저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는데도 숨쉬기가 어려웠다.
아마 산소가 부족한 탓이 컸을 것이다. 이미 해발 사천 구백 미터, 대기 중 산소량이 지상의 절반 수준이다. 뻐근한 몸을 이끌고 숙소를 나섰다. 오늘의 목적지는 고락셉(5,170m), 그리고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EBC. 5,380m). 긴 오르막의 끝이 머지않았다. 부디 모두 무사히 이 여정을 마칠 수 있기를.
로부체를 떠나자마자 곧 황량한 길이 이어진다. 땅 위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온통 돌과 이끼와 설산뿐이다. 척박하고 메말랐지만, 아름답고 생생했다. 걷기에 많이 험한 길은 아니었다. 걷기 시작하니 곧 몸이 가벼워진다. 침대에 누워 애써 잠을 청할 때보다 오히려 숨쉬기가 편했다.
평탄한 구릉지를 한 시간쯤 지났을까, 점차 풍경이 더 황폐해지는 게 느껴진다. 아니나 다를까, 곧이어 본격적으로 험한 길이 등장한다. 이제 걸어가는 길은 그냥 흙이나 돌로 된 길이 아니라, 흙과 얼음이 엉겨 붙은 위로 난 길이다. 군데군데 볕이 드는 부분은 얼음이 녹으며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내가 경치 구경을 한다고 끄트머리에 올라서자 저쪽에 있던 다른 일행의 가이드가 위험하니 물러서라고 주의를 준다. 시리에 따르면 이 동네는 한 달만 지나고 다시 와도 원래 있던 길이 없어진다고 한다. 이 대목에선 사진을 보는 게 이해가 쉬울 것 같다.
중간에 일행들을 기다리며 쉬는 사이 포터들과 사진을 찍었다. 가운데 누런 두건을 쓴 분이 내 가방을 들어주셨는데, 숙소에 도착해 가방을 넣어주고 나갈 때면 항상 하이파이브를 했다. 모두 순박하고 선한 사람들이었다.
정신없이 걷다 보니 어느덧 고락셉 초입이 보인다. 이번 여정의 잠잘 곳 중 가장 고도가 높은 동네다(5,170m). 내일은 여기보다 아랫동네에서 잘거라 생각하니 긴 여정의 클라이막스가 머지않았음이 느껴진다.
숙소에 짐을 푼 것은 대략 10시 15분경. 짐을 풀자마자 바로 점심을 주문해서 먹었다. 마냥 느긋하게 쉴 수 없는 것이, 밥을 먹고 바로 EBC를 향해 출발해야 했다. EBC까지는 적어도 왕복 네 시간. 여유 있게 귀환하려면 열두 시 전에는 출발해야 한다.
혜정이는 EBC를 포기하고 숙소에서 쉰다고 했다. 현명한 판단이었다. 이번 여정의 클라이막스는 오늘 다녀올 EBC 뿐 아니라, 내일 새벽의 에베레스트 일출도 있다. 혜정이는 EBC를 포기하고 일출을 선택했다. 사실 객관적인 상태를 봐도 지금 왕복 네 시간짜리 코스를 다녀오는 건 무리였다. 식당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니 이미 얼굴이 하얗게 질려 밥 한술도 못 뜨는 상태이지 않은가. 사실 나는 지금 당장이라도 포터 한 명을 붙여서 아랫동네로 내려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율에게 이 얘길 하니, 그렇지 않아도 자기가 혜정이 의사를 물어봤는데 내려갈 기력도 없어서 그냥 방에서 기절해 쉬겠다고 했단다. 정말 괜찮은 걸까, 불안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저 상태로는 내일 새벽 일출도 영 힘들 것이다. 고산증은 의지만 앞세운다고 극복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만약 내일 본인 상태를 생각하지 않고 애써 무리하려 한다면 뜯어말려야 할 것이다.
길을 나서려는데 롯지 마당에 눈가루가 휘날리고 있었다. 하늘엔 해가 쨍쨍한 게 눈이 내린 건 아니다. 눈가루는 바람을 타고 설산에서 날아 내려온 것이었다. '만년설이구나. 이제 다시 물로 돌아가겠군'. 속으로 중얼거리며 신발끈을 고쳐맸다. 자, 이제 베이스캠프를 향해 출발이다.
이젠 이끼도 살지 않는다. 온통 돌과 눈과 얼음과 구름뿐이다. 발이 자꾸 미끄러지는 험한 길이다. 율이 많이 힘들어해 자주 쉬며 천천히 걸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시간이 더 소요됐다. 두 시간쯤 걷자 구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 베이스캠프는 원래 이 자리에 있었는데 얼음이 녹으면서 무너져 내려 계곡 건너편으로 자리를 옮겼다고 한다.
온통 흙과 돌과 얼음 투성이라 계곡이라 하기도 뭐하지만, 여하튼 그걸 건너 돌길을 돌아가면 베이스캠프가 나온다. 그 이름도 거창한 Everest Base Camp, 이름값에 비해 참 구색이 없었다. 형형색색의 텐트촌, 세계 각국의 등반가들은 보이지 않았다. 여긴 그냥 상징적인 의미의 베이스캠프인 것 같다. 시리에게 물어보니 등반가들과 텐트촌은 저쪽 산 너머에 있다고 한다. 짐작컨대 그들은 트레커들로부터 방해를 받고 싶지 않은 것 같다. 우리 트레커들이야 그냥 관광객처럼 발치만 흝고 가는 것이지만, 그들에겐 여기가 시작점이다. 베이스캠프에서 출발해 에베레스트 정상을 등정하기까지는 여러 명으로 이뤄진 몇 개의 팀이 번갈아가며 공략해도 몇 달의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우리 같은 뜨내기들이 그들의 진짜 베이스캠프를 구경하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 같다.
그건 그거고 뭐 아무렴 어떤가, 여기가 공식적인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우린 관광객용 베이스캠프에서 열심히 기념사진을 찍어댔다. 주변의 다른 트레커들도 비슷한 생각인 것 같았다. '여기가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의 베이스캠프다, 우리가 진짜로 여길 왔다, 사진을 찍어야 한다, 저기 사진 좀 찍게 비켜 주세요, 저기 우리 사진 좀 찍어주세요'. 다들 사진 찍겠다고 설쳐대느라 아수라장이었다. 그 틈에 끼어 우리도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열심히 찍어온 사진들을 지금 다시 보니 멋지고 아름다운 것과는 거리가 좀 있다. 일단 이날이 트레킹 8일 차이고 씻지 못한지 4일 차였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 기압이 낮아서 얼굴이 호빵처럼 부풀어 올랐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이 사진의 의미는 인증샷이다. 발밑의 돌멩이에 적힌 숫자가 이곳이 EBC임을 증명하고 있다.
사진 찍으며 한 이삼십분 있자니 곧 땀이 식어 으슬으슬해졌다. 더 늦기 전에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돌렸다. 돌아가는 길은 올 때보다 더 지루하고 그래서인지 더 지쳤던 것 같다. 율이 계속 뒤처졌다. 나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원래 한국에서 산을 다닐 때면 폴짝폴짝 뛰어다닐 것 같은 길도, 여기서는 세 걸음만 걸으면 숨이 가빠온다. 숨이 가쁘니 몸이 점점 무거워진다. 거의 한 마디도 하지 않으면서 꾸역꾸역 걸어 한 시간 반 만에 고락셉에 도착했다.
고락셉 입구에는 EBC와 칼라파타르의 분기점을 알리는 팻말이 서 있다. 칼라파타르(5,550m), 다음 날 새벽 일출을 보기 위해 오를 산이다. 이번 여정에서 밟을 땅 중 가장 높은 곳이기도 하다. 드디어 내일이면 가장 높은 곳을 찍고 하산을 시작할 것이다.
율이 많이 힘들어했다. 지친 몸을 이끌고 롯지로 터벅터벅 걸어 들어가, 방으로 가지 않고 바로 식당으로 갔다. 몸을 덥히기 위해 레몬 진저 티를 스몰 팟으로 주문해 마셨다. 차를 마시고 방으로 들어가 몸을 닦고 좀 쉬다, 여섯 시쯤 저녁을 먹으러 다시 식당으로 나왔다.
우리가 베이스캠프에 다녀오는 사이 혜정이는 기절해서 잠만 잤다고 한다. 그런데 얼굴을 보니 별로 호전된 것 같지 않다. 엊그제 감기 기운이 있어서 코감기와 목감기약을 줬는데, 이젠 몸살 기운까지 있단다. 방으로 돌아가 몸살감기약을 가져다줬다. 이렇게 복합적으로 아파하는데 가지가지 약만 먹인다고 해결될 일인가, 지금 몸살약을 먹이는 게 과연 맞는 일일까,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별다른 수가 없었다. 이미 해가 졌고 오늘은 여기서 하루를 묵어야 한다. 낮에도 내려갈 힘이 없다고 했는데 밤에 무슨 수로 내려간단 말인가. 최악의 경우엔 헬기라도 불러야 하지만, 응급헬기 부르는 비용이 대략 한화로 삼사백만 원 정도 든다고 하니 그건 정말 최후의 수단으로 생각할 일이다. 일단은 약 먹고 푹 쉬게 하는 게 최선이었다.
저녁을 먹은 뒤 다음날 오전 일정을 논의했다. 우선 서로의 몸 상태를 물었다. 혜정이만 아픈 게 아니라 율과 찬도 두통과 메스꺼움을 느낀다고 했다. 나만 아무런 증상이 없다. 내일 일출을 보기 위해선 새벽 4시에 일어나 바로 출발해야 한다. 새벽에 일어나서 상태가 안 좋은 사람은 포기하고 갈 수 있는 사람만 가기로 했다. 밥 먹을 시간은 없으니 걷는 틈틈이 에너지바와 육포로 때워야 한다.
방으로 들어와 불 끄고 책을 읽자니 금방 숨쉬기가 힘들어진다. 어쩌면 책을 읽느라 뇌가 산소를 써서 더 숨이 찰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바로 책을 덮고 잠을 청했다. 그러나 쉽게 잠이 들진 못했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잠을 들기 위해 숨이 새근새근 잦아들 무렵이면 숨이 안 쉬어진다는 불안감이 엄습해오고, 잠이 깨 다시 숨을 거칠게 내쉬고, 그러다 일어나서 화장실에 다녀오기를 반복했다. 그러는 사이 새벽 네시는 금방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