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13. 루클라, 카트만두

2017.10.12 (목)

by 이승환

트레킹 마지막 날의 아침이 밝았다. 팍딩에서 아침을 먹고 출발해 부지런히 걸으면 점심께엔 루클라로 들어간다. 카트만두 발 15인승 경비행기가 우리를 내려준 곳, 우리가 EBC 트레킹을 시작했던 그곳으로. 이제 정말 거의 다 끝났다. 난 무려 나흘 째 이어지고 있는 이 지겨운 하산길을 어서 끝내 버리고픈 마음이 간절했다.


아침을 먹고 숙소를 나선 시간은 약 7시 40분경. 첫날 루클라에서 팍딩까지는 내리막이 많았으니, 이번엔 오르막이 많을 차례다. 이미 고도가 많이 낮아졌고 경사도 심하지 않아 그다지 힘든 길은 아니었다.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고 때때로 앉아 쉬기도 하며 쉬엄쉬엄 걸었다. 가는 길에 무려 수백 마리의 당나귀 무리를 마주쳤다. EBC 지역의 당나귀 모두를 동원한 듯한 대규모 수송단이었다. 이 정도 물량이면 아마 남체로 가는 것이겠지.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나귀 무리를 인솔하던 청년


볕 좋은 길을 따라 쉬엄쉬엄 걸었다. 길가의 마당에는 이따금씩 꽃밭이 있었다. 볕을 받으며 무리 지어 서 있는 꽃들 저 너머로 설산이 보인다. 이제 설산은 아주 멀다. 그만큼 속세와 가까워졌다는 뜻이다.



지루한 마음을 따스한 봄볕으로 위안하며 걷는 중, 루클라에서 탈 비행기 얘기를 했다. 원래 우리가 예매한 비행기는 다음 날이었지만, 만약 이날 카트만두로 들어가는 비행기가 있다면 바로 타고 들어가기로 했다. 루클라-카트만두 노선은 원체 연착이 잦고 변경이 많아서 이런 식의 유도리가 충분히 가능한가 보다. 물론 우린 만장일치로 동의했다. 지루한 하산길에 지쳐 있던 일정을 하루 일찍 마칠 수만 있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있을까.


네 시간쯤 걷자 드디어 루클라 마을 초입에 닿았다. 마침내 트레킹이 끝났다!!! 아마 며칠 전 칼라파타르에 올라 에베레스트 일출을 볼 때보다 이때가 더 감동적이었을 것이다.


히말라야에서의 첫 식사를 했던 롯지로 찾아가, 마지막 식사를 주문했다. 밥을 먹기 전 미리 포터 한분 한분에게 팁 봉투를 건네 드렸다. 이분들과는 여기서 작별해야 한다. 비록 말 한마디 안 통했지만, 이분들의 선량하고 따뜻한 마음씨는 언어와 문화의 벽을 넘어 여과 없이 전해져 왔다. 진심으로 고마움을 전하고 싶었다. 내 가방을 들어줬던 분에게는 마지막으로 헤어지기 전, 배낭을 뒤져 남은 행동식과 핫팩 등을 챙겨 드렸다. 돈네밧.


여정의 시작부터 끝까지를 함께 한 일행들과


이런저런 것들을 주문하고 술도 시켰다. 네팔 전통주를 한 잔씩 마시고 쉐르파 비어도 한 캔씩 먹었다. 덕분에 따뜻한 봄볕 아래 얼굴이 벌게진 채로 나른하게 늘어졌다. 밥을 먹는 중 저쪽에서 한국 남성이 다가와 말을 건다. 이제 막 도착해서 위로 올라가신다고 한다. 날씨는 어떻냐, 고산증 때문에 힘들지 않았냐 등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는데, 이분이 아세타졸(고산증 약)을 안 챙겨 오셨다는 얘기를 들었다. 비아그라만 챙겨 오셨다고 한다. 그래도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내 약병을 챙겨 드렸다. 이제 나한텐 필요가 없는 물건이니까.


한국에서 야무지게 챙겨온 약병들. 난 아세타졸 외엔 먹지 않았지만 다른 약들도 혜정이에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날 날씨는 더할 나위 없이 맑고 화창했지만, 바람이 많이 분 덕에 비행기가 좀처럼 들어오지 않았다. 낮술을 먹고 늘어진 채로 앉아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공항에 들어갔다. 공항에서도 한 시간을 넘게 기다린 끝에 마침내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하산을 했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지루함은 공항 대합실에서 최고조에 달했던 것 같다. 공항과 비행기 구경을 하며 무료함을 달랬다.


루클라 공항은 정말이지 구경거리가 된다. 한국 지방 소도시 시외버스터미널 만한 규모에 탑승장과 활주로가 다 들어가 있다. 마을버스만 한 비행기는 동시에 최대 네대까지 수용 가능하지만, 두대 이상 공항에 머무르는 걸 보지 못했다. 15인승 쌍발식 경비행기는 쉬지 않고 사람과 물자를 실어 나른다. 비행기가 도착하면 사람이 내리기도 전에 역무원들이 카트를 끌고 우르르 다가가 짐부터 빼낼 준비를 한다. 사람 열댓 명이 내리는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는다. 순식간에 사람과 물자를 내려놓은 비행기는 다시 카트만두로 가는 사람들을 태우고 프로펠러를 돌리기 시작한다. '애애앵' 하는 프로펠러 소리가 니트로 부스터를 먹인 것처럼 '구와아앙' 하고 폭발할 듯이 비명을 질러대면, 이륙할 준비가 끝난 것이다. 관제사가 수신호를 주면 조종사는 비행기를 아담한 활주로 위로 올려놓는다. 비행기는 활주로 끝을 향해 추락할 듯 돌진하다 가볍게 뛰어올라 하늘 위를 오른다.



카트만두 트리부반 공항까지는 약 사십여분 정도가 걸린다. 여긴 국제공항이라 루클라에 비할 바 없이 공항도 크고 큰 비행기도 많다. 비행기를 내리자마자 kf-94 황사마스크를 꺼내 썼다. 세계 최악일 것 같은 카트만두의 대기 질을 한 마디로 묘사하면, '지구에 있는 낡은 디젤차를 다 모아 놓은 듯한 고지대의 분지'다. 현대기아차, 인도의 타타모터스, 알 수 없는 중국차 등 세계 각국의 다양한 낡은 차들을 볼 수 있다. 이 차들은 약속이나 한 듯 모두 디젤이며, 유로-5(배기가스 제한 규약) 같은 건 안중에도 없이 시꺼먼 매연을 내뿜는다. 디젤차 무리 속에서 우릴 마중 나온 봉고차를 잡아 타고 숙소로 향했다. 오후 네시 반의 카트만두는 교통체증이 심해 숙소에 도착하기까지 거의 한 시간이 걸렸다.


숙소에 도착 후 짐만 던져놓고 나와 다시 봉고차를 타고 여행사를 향했다. 다음날 일정 확인, 경비 정산, 렌트한 장비 반납을 하기 위해서였다. 우린 다음날 카트만두 시내 관광을 할 예정이다. 율은 같은 여행사에서 시내 관광을 도와줄 차량과 운전기사를 부킹해놓았다. 시리는 시내 관광까지 우릴 가이드해줄 것이다.


여행사는 카트만두의 중심가 타멜 거리에 있다. 먼저 여행사 건너편의 장비 가게에 장비를 반납하고 여행사로 들어갔다. 사장님과 덕담을 나누고, 경비와 다음날 일정 얘기를 하고, 식당을 추천받아 다시 거리로 나왔다. 이미 저녁 여덟 시, 저녁 시간이 한참 지났다.


우린 문명 세계의 품격 있는 저녁을 먹고 싶었다. 조용한 실내, 스테이크, 와인 정도면 된다. 여행사 사장님이 추천해준 식당을 찾아 헤매던 중, '카트만두 스테이크 하우스'라는 간판을 보고 그대로 빨려 들어갔다. 매우 훌륭한 선택이었다. 조용했고, 최고급 스테이크를 매우 저렴한 가격으로 제공했으며, 물론 와인과 맥주도 있었다. 미디움 레어로 주문한 스테이크는 한국 기준 레어 정도의 익힘으로 피가 뚝뚝 떨어졌는데, 스테이크는 피를 촉촉이 머금은 상태가 가장 맛있다는 사실을 이때 깨달았다.


이 훌륭하고 푸짐한 스테이크 1인분 가격이 한화로 만원이 채 되지 않는다


아늑하고 포만감 넘치는 식사를 마친 뒤 거리로 나와 바로 앞 상점에서 맥주 몇 캔을 샀다. 타멜은 카트만두 중심가임에도 불구하고 히말라야에 비해 물가가 훨씬 저렴했다. 히말라야 위에서는 최소 100루피부터 시작했던 1리터 들이 생수 한 병이 25루피밖에 하지 않았다. 물론 맥주도 훨씬 저렴했다.


상점에서 나온 뒤엔 바로 택시를 잡아 타고 숙소로 들어갔다. 쉬지 않고 계속 돌아다닌 통에 매우 피곤했지만, 씻고 방에 모여 앉아 맥주와 육포를 들며 도란도란 얘기를 나눴다. 트레킹을 하면서 좋았던, 힘들었던, 아쉬웠던 등등의 얘기를 나즈막이 풀어 놓고 맞장구도 쳐가며 소박하게 뒷풀이를 했다.


밤이 늦고 몸도 피곤했던 터라 술자리는 늦게까지 이어지진 않았다. 맥주 두 캔씩을 비운 뒤 침대로 기어 들어가 잠을 청했다. 간만에 뽀송뽀송한 이불을 덮고 누우니 새삼 기분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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