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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환 Nov 26. 2017

사피엔스

인간에 대한 이해의 폭과 깊이를 더해줄 21세기 교양서



제법 오랜만에 서평을 쓴다. 본래 '책 소개'를 시작하던 당시엔 매주 한 권의 책을 읽고 쓰는 것을 목표로 하였으나, 히말라야 여행을 다녀오고 여행기를 쓰는 통에 한참을 쉬게 되었다.


이 책은 에베레스트 트레킹을 하는 중에 읽었다. 대부분의 분량을 하루 일과를 마치고 잠들기 전 침대에 누운 채로 읽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여행 중 읽기에 좋은 책은 아닌 것 같다. 일단 분량이 두껍고 배경지식이 방대하며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준다. 집중해서 읽어도 저자의 메시지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내 것으로 소화하기 쉽지 않을 판인데, 여독에 지쳐 잠들기 전 흐릿한 정신으로 읽으면 제대로 읽힐 리가 없다. 결국 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후에야 다 읽어 치울 수 있었다.


저자 유발 하라리는 예루살렘 대학 교수로 재직 중인 역사학자다. 그는 역사를 자연사의 연장선상에서 조망하는데, 사피엔스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세 가지 사건을 인지혁명(7만 년 전), 농업혁명(1만 2천 년 전), 과학혁명(5백 년 전)으로 규정한다.


서문에 등장하는 역사 연대표 (본문 발췌)




제1부 - 인지혁명


첫 번째 중요한 사건인 인지혁명은 사피엔스가 언어를 사용하게 된 것이다. 다른 종에 비해 특히 사피엔스의 언어가 특별했던 점은 '허구'의 이야기를 지어내고 공유할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사피엔스는 신과 정령이라는 개념을 발명하고 공유함으로써 수백 명의 사람들을 하나의 목표 아래 협업하게 할 수 있었으나, 사피엔스의 사촌 종인 네안데르탈인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인지혁명 이후 사피엔스는 압도적인 협업 능력을 바탕으로 다른 종들을 순식간에 제압하며 자연계를 장악해나간다. 저자가 역사의 시작을 사피엔스 종이 최초로 출현한 20만 년 전이 아닌,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한 7만 년 전으로 정의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제2부 - 농업혁명


두 번째 중요한 사건인 농업혁명은 수렵생활을 하던 사피엔스가 다른 종들을 길들이며 한 곳에 정착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접해온 상식적인 관점이 '농업혁명은 인류 문명을 잉태하고 번영하게 한 기념비적인 사건이다'와 같다면, 유발 하라리는 농업혁명을 '역사상 최대의 사기극'으로 규정한다. 농업혁명을 계기로 사피엔스가 더 큰 규모의 사회를 건설하고 발전시켜 나간 것은 맞지만, 구성원인 사피엔스 개개인의 삶의 질은 농업혁명 전에 비해 더 고통스럽고 불행해진 것으로 보는 것이 진실에 더 가깝다는 것이다. 농경생활을 택한 결과 대부분의 사피엔스는 수렵생활을 하던 시절에 비해 더 오래 일하고 부실하게 먹는 삶을 강요받았다. 극소수의 사피엔스만이 지배계층으로 군림하며 역사를 써 나갔다. 그러므로 농업혁명의 핵심은 '더욱 많은 사람들을 더욱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 있게 만드는 것'이다.


그럼 지금까지 알고 있던 상식과 달리 농업혁명은 인류에게 좋지 않은 것이었을까? 생물학적 관점에서 어떤 종이 성공적으로 진화했는지는 개체의 복지와 행복이 아닌, 얼마나 많은 개체가 DNA를 상속하는 데 성공했는지로 규정된다. 즉 농업혁명을 통해 비록 사피엔스 개개인의 삶은 불행해졌을지언정, 사피엔스 종은 성공적으로 진화한 것이다. 한편 사피엔스와 함께 공생하도록 진화한 동식물 종들의 경우는 어떠한가? 소, 닭, 밀, 쌀과 같은 동식물은 사피엔스와 공생하도록 진화했고, 그 결과 오늘날 이들의 개체 수는 사피엔스와 함께 엄청난 수로 불어났다. 사피엔스와 마찬가지로 이 종들은 진화적 관점에서는 성공했지만, 그 개체들의 복지는 비참하다.


농업혁명 이후 잉여생산물을 비축하는 능력을 발판 삼아 사피엔스는 점차 더 큰 규모의 사회를 건설해나갔다. 마을이 읍으로, 도시로, 왕국으로 커져 갔다. '허구의 이야기를 지어내고 공유하는 능력'은 수백만의 사피엔스가 왕국이라는 사회를 이루고 협업할 수 있게 해주었다. 한편 사피엔스 사회의 규모가 점차 커진 결과, 메모리 과부하라는 문제를 맞닥뜨리게 된다. 왕국의 존속에 핵심적 역할을 담당한 세금과 관료제 시스템은 방대한 양의 정보 저장, 처리 능력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사피엔스는 '쓰기'를 발명함으로써 메모리 과부하 문제를 해결했다.



제3부 - 인류의 통합


농업혁명 이후 사피엔스 종은 점차 전 지구적 공동체로 통합되어 갔다. 이 과정에서 돈, 제국, 종교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돈은 보편적 전환성과 신뢰라는 원리를 기반으로 생전 처음 보는 사피엔스들을 협업할 수 있게 했다. 제국은 이질적인 문화와 민족을 하나의 울타리 안으로 묶어내고 융합했다. 종교는 초인적 질서라는 허구의 이야기로 사피엔스 사회를 결속시켰다.





제국의 주기 (본문 발췌)



특히 종교에 대한 저자의 관점이 흥미로웠다. 저자는 종교를 '초인적 질서에 대한 믿음을 기반으로 한 인간의 규범과 가치 체계'로 정의한다. 그에 따르면 자유주의, 사회주의 등 이데올로기도 종교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아래 표에 저자의 관점이 잘 나타나 있다.


종교와 종교가 아닌 믿음 (본문 발췌)


인본주의적 종교들 (본문 발췌)



제4부 - 과학혁명


과거 5백 년간 인류의 발전은 그 이전에 비해 경이로운 속도로 진행되었다. 이러한 일이 가능했던 이유가 바로 과학혁명이었다. 과학은 인류의 생산성을 급속도로 증가시켰고, 시간이 갈수록 발전의 속도는 더욱 가파르게 증가했다. 그 결과 사피엔스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를 살게 되었다. 아래 본문 내용을 읽으면 무슨 말인지 확 와 닿을 것이다.


14장 - 무지의 발견 서문 (본문 발췌)



저자는 과학혁명이 인류에게 가져온 영향을 다양한 관점에서 조망한다. 그중 일부만 간추려 적어본다.


과학은 제국의 식민지 개척 과정에서 권력, 자본과 결탁해 공생관계로 발전했다. 오늘날에도 정치, 경제, 종교와 밀접한 영향을 주고받는다. 주요 전쟁의 판도를 바꿨으며 종국에는 절대적으로 강력한 힘(수소폭탄)을 개발하여 전쟁 자체를 억제하는 결과를 낳았다. 산업혁명과 함께 등장한 자본주의 경제는 청교도 윤리를 소비지상주의 윤리로 대체했다. 산업혁명 이후 시장과 국가는 가족과 지역 공동체의 역할을 대체했다. 마침내는 과거 신의 영역이었던 죽음마저 극복하려는 중이다.


저자는 말미에서 과학혁명이 불러일으킨 가장 중요한 변화를 언급한다. 바로 호모 사피엔스가 스스로를 자연법칙의 굴레에서 분리시키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 사피엔스의 역사에서 전례가 없던 일이다. 길가메시 프로젝트는 죽음을 기술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로 정의하고 실제로 해결해나가는 중이다. 생명공학, 사이보그공학, 비유기물공학은 사피엔스의 생물학적 한계를 허물고 더 이상 인간이 아닌 그 무언가로 변이 시킬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은 이제 스스로 신이 되려 하고 있. 그 결과는 호모 사피엔스의 종말로 이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사피엔스는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거듭날 수 있는 가능성을 점점 더 구체화 해나가고 있으며, 불과 수십년 내에 현실로 구현해낼 것만 같다. 저자에 따르면 정말로 위험한 것은 그 가능성이 현실에서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이 아니라, 전대미문의 힘을 손에 넣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피엔스 스스로가 어디로 가야할지 방향을 잡지 못한 채 헤매고 있다는 사실이다. 초월적인 힘을 손에 넣고도 어떻게 써야할지 모른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참으로 위험하고 무책임하다는 얘기가 된다. 이런 맥락에서, 책의 말미에서 저자는 묵직한 화두를 던진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진정한 질문은 "우리는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가?"가 아니라, "우리는 무엇을 원하고 싶은가?"일 것이다. 이 질문이 섬뜩하게 느껴지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이 문제를 깊이 고민해보지 않은 사람일 것이다.


(본문 20장. 호모 사피엔스의 종말, 마지막 단락에서 발췌)



새로운 지식, 생각할 거리를 많이 얻은 책이다. 분량도 많고 배경지식이 방대해서 요약하기가 쉽지 않았다. 정독으로 한 번 더 읽어야 충실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보다는 이 후속작으로 출간된 호모 데우스를 읽는 편이 나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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