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심 탈렙, 블랙 스완, 칼 포퍼, 반증 가능성, 회의론
이 책은 2001년 초판이 발행되었으나 당시에는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7년 뒤 2008년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로 전 세계 금융시장이 붕괴하자, 세상은 탈렙을 월가의 새로운 현자로 주목한다. 그 대중적 명성에 힘입어 2010년, 출간된 지 9년 뒤에야 이 책의 한국어 번역본 초판이 발행되었다.
탈렙은 블랙 스완이라는 유행어로 더 유명하다. 블랙 스완의 개념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발생 가능성이 지극히 낮은 희귀 사건이 일어날 때, 전대미문의 파급효과를 동반할 수 있다"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 일본 후쿠시마 원전 붕괴와 같은 사건이 이에 해당한다. 2008년 당시 월가 투자 은행들은 서브프라임 디폴트의 가능성을 지극히 낮게 계산해 위험한 금융상품을 판매했고, 모기지 시장에 신용경색이 오며 파국을 맞는다.
동일본 대지진으로 인해 일어난 후쿠시마 원전 붕괴 사태도 같은 원리로 이해할 수 있다. 일본은 내진 설계에 가장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는 국가로, 원전에도 세계 최고 수준의 엄격한 기준을 적용했다. 그러나 동일본 대지진의 위력은 내진 설계에 적용한 내구도를 한참 넘어서는 수준이었으며, 후쿠시마 원전은 체르노빌 이후 가장 끔찍한 원전 사고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위의 두 사건은 모두 발생 가능성이 극도로 낮은 희귀 사건이 극도로 파국적인 결과를 초래한 사례다.
탈렙은 공부를 참 많이 한 사람이다. 방대한 지식을 탐미해 그 자신의 생각과 경험으로 맛있게 숙성해냈다. 철학, 통계학, 문학, 투자, 사회과학을 자유로이 넘나들며 똑똑한 척하는 바보들을 신랄하게 조롱한다. 관련 분야에 기본 지식이 있는 독자라면 더 많은 내용을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심리학을 전공한 데이터 분석가인 덕에 그의 생각에 많이 공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배경 지식이 없는 사람이라도 읽기 어려운 책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저자의 생각에 군더더기가 없으며, 번역 또한 매우 훌륭하기 때문이다. 편집자의 조언 따윈 한 귀로 흘려버리며 제멋대로 글을 쓰는 괴짜 사상가의 책을 이 정도 수준으로 번역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전문 번역가라는 타이틀은 이런 번역가에게 주어져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목차만 보고 내용을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책을 경멸한다고 한다. 이 책을 목차에 따라 요약하는건 예의가 아닐 것이다. 나도 내 생각대로 적어본다.
탈렙의 생각은 포퍼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
굳이 그 사실을 숨기지 않으려 함을 본문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칼 포퍼에 따르면 모든 이론은 다음의 두 가지에 속한다.
1. 검증 과정에서 오류가 드러나 기각된 이론
2. 아직 오류가 발견되지 않았지만, 언제든지 오류가 발견되어 기각될 가능성이 있는 이론
포퍼는 귀납법을 거부한 데이비드 흄에 동의했다. 경험적 증거를 아무리 많이 확보해 일반 원리(이론)를 만들어낸들, 단 하나의 반증 사례만 나와도 무너지기 때문이다. '내가 살아오면서 본 백조가 모두 흰색이었다. 그러므로 모든 백조는 희다'라는 주장이 단 한 마리 검은 백조의 등장으로 무너지는 것처럼. 경험적 증거는 연역적 추론을 그저 보조할 따름이다. 언제든 틀릴 가능성을 열어 놓아야 한다. 현대 과학 연구방법론의 기본인 반증 가능성과 영가설 기각의 논리는 여기서 유래했다. p-value 5%는 과학계의 관례적 합의다.
모든 이론은 불완전하다. 모든 지식은 새로운 지식으로 대체되기 전까지만 참이다. 그러므로 모든 이론은 '입증'할 수 없으며, '반증'을 통해 제한적으로만 긍정할 수 있다. 이러한 과학철학의 관점은 불확실성과 운이 지배하는 투자 시장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하나, 불행히도 세상에는 똑똑한 척하는 멍청이들이 너무 많고, 언론은 대중을 선동하며, 자칭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들조차 운과 실력을 착각하는 일이 너무 많다는 게 문제다. 책 내용 요약은 위 한 문장으로 갈음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가 지식, 필연, 실력이라고 믿는 것들의 많은 부분은 그저 운(randomness)에 불과하다. 단지 인간의 심리 기제가 우연을 필연으로, 무작위 사건 속에서도 패턴 비슷한 것들을 인식하도록 적응해 왔을 뿐이다. 그러니 거짓 상식, 똑똑한 척하는 멍청이들, 지식인인 척 하는 연예인들에 현혹되지 말지어다.
마무리하며
오래 숙성시킨 생각은 그저 지식이 아니다. 현명한 생각은 그 자체로 두고두고 음미할 가치가 있다. 탈렙의 회의론이 그렇다. 난 이 책을 한 번 읽고 서평을 쓰며 한 번을 더 읽었다. 덕분에 쓰는데만 반나절이 걸렸지만 여전히 음미하고 곱씹을 점이 많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몇 번은 다시 찾아 읽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