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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환 Feb 25. 2018

벤저민 그레이엄의 현명한 투자자

안전 마진, RIM,  채권, P2P 투자, PF 대출

요즘 최대의 관심사는 주식 투자다. 투자 관련서 읽는 것도 너무 재미있다. 이왕 공부하는거 제대로 할 생각으로 켄 피셔의 조언을 따라 고전을 읽기로 마음 먹었고, 첫 순서로 벤저민 그레이엄의 현명한 투자자를 읽었다.



이 책은 원전의 영어 요약본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한 버전이다. 투자 분야 전문 번역가인 이건 님이 번역을 맡았다. 요약본의 번역본이니만큼 쉽게 읽을 수 있다는 장점과, 저자의 생각을 온전히 흡수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단점이 있다. 장점이 단점을 훨씬 압도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책 소개 글을 쓸 때 내용 요약을 한 뒤 내 해석을 곁들이는 형식을 선호한다. 그러나 이 책에는 맞지 않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요약본의 번역본을 다시 요약하는 일은 부질없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요약은 생략하고, 내가 생각하고 느낀 바를 정리해보는데 충실하고자 한다. 책 내용 중 이 글에 담을 정보는 매우 제한적이다. 만약 그레이엄의 생각을 이해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최소한 이 요약본 정도는 직접 읽는 것을 권한다.


글쓰기에 앞서 책을 세 번 정도 읽었다. 한 번은 정독했고, 생각을 곱씹고 책장을 뒤적이며 두 번 정도 더 읽었다. 책을 읽으며 스스로 계속해서 질문을 떠올렸는데, 한 마디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그레이엄의 투자 철학은 오늘날 한국 투자자에게도 100% 적용되는 불변의 진리인가?


그레이엄이 활동했던 20세기 초 미국과 현재 한국의 투자 환경은 많이 다르다. 기축통화국 미국과 신흥국 한국의 통화 가치가 다르고, 한 세기 전과 금리가 다르고, 기술 혁신은 눈부신 속도로 산업구조를 재편해나가고 있다. 그레이엄이 개인투자자에게 이상적인 투자 상품으로 제안한 미국 저축채권 같은 상품은 2018년 현재 한국에는 없다. 이런 배경을 고려했을 때, 그의 격언이 현재 한국 투자자에게 얼마나 유효한지를 곱씹느라 생각이 길어졌다. 그레이엄의 격언 중 대표적인 것들은 다음과 같다.


안전마진이 확보되는 주식을 사라

자주 매매하지 말고 오래 보유하라

주식과 채권의 비중을 25~75%로 유지하라

한 종목에 올인하지 말고 분산 포트폴리오를 꾸려라


'위의 격언들이 지금의 나에게 얼마나 유효할까?'라는 의문을 품고 3회독을 하며 고민했던 내용들을 정리해 글로 적어 본다. 아래 내용은 책의 목차와는 무관하다.



1. 안전 마진


안전 마진은 그레이엄 투자 철학의 정수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 장인 20장의 제목이 '가장 중요한 개념은 안전마진'이며, 그레이엄의 수제자인 워런 버핏도 특히 8장과 더불어 20장을 강조했다. 안전 마진의 개념을 한 마디로 풀어서 쓰면 '원금 손실의 가능성을 최소화하면서 얻을 수 있는 수익'이다.


사실 별로 특별할 것 없는 얘기처럼 들린다. '원금 손실 없이 은행이자보다 많은 수익을 낼 수 있다'는 말에는 모든 사람이 귀를 솔깃한다. 어떤 사람들은 '저위험 고수익'이라는 미끼에 낚여 불량한 금융상품에 돈을 투자하고 손실을 본다. 혹자들이 얘기하는 '저위험 중수익', '원금 손실 없는 수익'과 그레이엄의 안전마진은 다른 개념일까? 그렇다면 그레이엄의 안전 마진은 정확히 어떤 의미이며, 또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 것일까? 2018년의 한국 개인 투자자가 그레이엄의 안전 마진을 배우고 응용하면 원금 손실 가능성 없이 돈을 벌 수 있을까?


질문의 답은 책 속에서 찾을 수 있었다. 안전 마진의 추상적 개념이 '원금 손실 가능성을 최소화한 수익'이라면, 그레이엄은 그 구체적 개념으로 '기업의 수익력이 채권 수익률을 크게 초과하는 것'을 예시로 든다. 한편으로 '자산과 수익력을 근거로 무리 없이 발행할 수 있는 채권액보다 주식의 시가총액이 작다면, 이 주식에는 상당한 안전 마진이 들어있다'고도 서술했다.


핵심을 정리하면 '기업의 자산 가치와 수익력이 충분히 우량한가? 그에 비해 주가가 고평가 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매수했을 때 안전 마진을 확보할 수 있다'는 얘기다. 다시 말해 자산과 수익력을 이용해 산정한 기업의 내재가치에 비해 가격이 싼 주식을 사면, 원금 손실 가능성을 줄이면서 수익을 낼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이 책의 감수를 맡은 신진오 님에 따르면, 그레이엄의 안전마진 원리에 가장 근접한 가치평가법은 RIM이다. 나도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다. 난 사경인 님의 책에서 이 방법을 배운 뒤 주식 매매에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오면, 과연 그레이엄의 안전 마진은 현재의 한국 투자 시장에서도 충분히 유효한 개념일까? 내 결론은 '그렇다'이다. 안전 마진의 논리를 구현하는 RIM으로 가치평가를 해서 사들인 주식은 돈을 잃을 가능성이 적다고 생각한다. 논리적 추론뿐 아니라 개인적 경험으로 확인한 바이기도 하다. 지난 반년 간 주식 매매에서 이 원칙을 지켰을 때는 모두 돈을 벌었고, 지키지 않았을 때 돈을 크게 잃었다. 책에서 배운 원칙을 어기기까지는 아주 잠깐의 망설임이 있었을 뿐이지만, 그 원칙의 소중함은 비싼 수업료를 지불하고 난 뒤에야 깨달을 수 있었다. 삼백만원은 적은 돈이 아니다.



2. 채권


그레이엄은 주식과 채권의 비중을 25~75% 비율 내에서 적절히 배분하는 것을 권했다. 강세장 고점에서 주식 비중을 25%까지 줄이고, 약세장 저점이 오면 주식 비중을 75%까지 늘리라는 것이다.


그레이엄의 채권에 대한 생각으로부터 몇 가지 생각할 거리를 얻어 정리해 본다.


먼저 채권이라는 상품의 본질이다. 채권의 본질은 '안정성 + 은행 정기예금보다 높은 수익'이다. 그중에서도 핵심은 안정성, 즉 '원금 손실 가능성이 거의 제로'라는 점이다. 그레이엄이 개인 투자자에게 권했던 채권은 미국 저축채권 시리즈로, 정부 지불보증의 안정성과 함께 연 5%의 확정수익을 내는 상품이다. 그레이엄은 방어적 투자자에게 미국 저축채권과 같은 우량 채권에 한해서만 투자하고, 공격적 투자자일지라도 비우량 채권은 아주 싼 가격이 아니면 투자하지 말 것을 권했다. 그레이엄이 저렇게 말한 이유가 무엇일까?


채권의 미덕은 안정성이다


채권 수익률이 높다는 것은 곧 채무자의 신용도가 낮다는 의미이며, 다시 말해 시장 상황이 안 좋아지면 원리금 지급이 연기되거나 채무 불이행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이런 상황이 되면 채권의 시장 가격은 발행 가격 대비 형편없는 수준으로 폭락한다. 그레이엄 생전과 사후에 이런 상황은 수차례 재현되었다. 그레이엄의 책에 소개된 사례로, 1947년 미국 철도 회사채는 102에서 68로 폭락했다. 국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레이엄이 이 책의 초판을 쓴 시점은 1949년인데, 그는 '두 차례 세계대전과 대공황을 거치고도 외국 국채에 대한 평판은 개선되지 않았다... 미국인이라면 외국 국채 대신 미국 국채에 투자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라고 적었다. 나심 탈렙의 책에 소개된 사례 하나를 예로 들면, 98년 러시아 루블화 폭락 사태 당시 러시아 국채에 투자했던 투자 은행들은 천문학적인 손실을 입었다.


채권에 대한 그레이엄의 생각이 오늘날 한국 투자가에게 주는 시사점은 무엇일까? 최근 유행하는 P2P 대출에 대해 생각해봤다. P2P 대출은 금융기관을 거치지 않고 온라인 플랫폼에서 개인 간에 필요 자금을 지원하고 대출하는 서비스다. 최근 지속된 저금리에 갈 곳을 잃은 개인 투자 자금이 몰려들고 있으며, 특히 인터넷에 친숙한 2~30대를 중심으로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다(17년 기준 연 285% 성장, 총 대출금 2조 3천억. 기사 링크).


나도 이미 적지 않은 금액을 투자했다. 총 투자 자산의 30%가량을 상위 3개 업체인 테라펀딩, 루프펀딩, 피플펀드의 상품 약 10여개에 나눠 투자했다. 주로 PF 대출 상품에 투자했는데 대출 기간이 평균 1년 전후이며 수익률은 최고 연 18%, 세후 약 13% 에 달한다. 세후 13%는 평범한 개인 투자자에게 매력적인 고수익이 분명하다. 나의 PF 대출 상품 투자를 그레이엄은 뭐라고 평가할까?


채권의 미덕은 안정성이다. 그레이엄은 P2P 채권을 비우량 채권으로 정의할 것이다. 연리 18%를 주고 돈을 빌려야 하는 기업(혹은 개인)의 신용도가 좋을 수준일리 없다. 시중 은행으로 가면 그보다 높은 이율을 주고 돈을 빌려야 한다는 얘기인데, 채권 시장의 신용등급 기준으로는 최저 등급에 해당한다(채권 스프레드 시트 참고). 고위험 고수익, 다시 말하면 매우 위험하다는 얘기다. 원리금 지급 연기나 채무 불이행이 발생해도 중개업체는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다. 실제로 모든 P2P금융업체의 상품 설명서는 중개업체가 원금 보장 책임을 지지 않음을 명시하고 있다.


최근 한 P2P 중개업체가 투자자들로부터 집단소송을 당했다(기사 링크). 홈쇼핑 납품 기업들에게 대출을 해주는 상품에서 연체가 발생했는데, 연체율이 무려 90%였다고 한다. 최근 P2P 금융이 돈이 된다고 하자 기본적인 신용평가와 리스크 관리 능력도 갖추지 못한 부실업체들이 우후죽순 난립하는 상황이 되었을 것이라고 짐작하면, 이번 사건은 '군소 부실업체의 역량 미달과 무리한 사업 추진으로 일어난 사고'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메이저 업체들이라면 이 정도 실수는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다.


이 사건을 P2P 대출업 전체의 부실에 대한 논의로 이어가고 싶은 생각은 없으나,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고 싶다. '채무불이행이 발생할 경우, 법적으로 원금상환 책임을 누구도 지지 않는 매우 위험한 상품이다'라고. 투자 의향이 있는 사람이라면 상품 설명서에 기재된 '투자활동은 고객 본인의 판단에 의해 이루어지며, 당사는 원금 및 수익률을 보장하지 않으므로 투자 시 신중한 결정이 필요합니다'라는 문장의 의미를 분명히 이해하고 투자 결정을 내려야 할 것이다.


나는 이러한 본질적 위험성에 두려움을 느낀 뒤로 더 이상 투자금을 넣지 않았다. 마지막 투자는 17년 10월 경으로, 이 상품의 만기일은 18년 6월이다. 이외에도 만기가 18년 8월인 두 개의 상품이 남아 있다. 내가 P2P 상품에 더 이상 투자하지 않기로 결정한 시점은 17년 12월이었다. 만기가 긴 상품에 투자 결정을 내린 것은 온전히 나의 책임이지만, 투자금 회수를 결정하고 실제로 현금을 회수하기까지 무려 8개월이 걸린다는 점은 복기해볼 만하다.


채권 시장에서 거래되는 국채나 회사채는 언제든지 시장 가격으로 내다 팔아 현금을 회수할 수 있다. P2P 대출은 거래할 수 있는 시장이 없다. 만약 채권의 미래 가치가 하락한다고 판단했을 때, 손절하고 빠져나올 수가 없다는 의미다.


손절이 불가능하다는 관점으로 보면,
이건 정말 많이 위험한 상품이다.


주식 시장을 예로 들어보자. 지난 2월 5일 미국 주식 시장이 폭락하며 전 세계 증시가 동반 폭락했다. 2월 5일 하루 사이 다우존스 지수가 4.6% 하락했고, 코스피는 1주일 간 고점 대비 10% 하락한 2360선까지 밀렸다. 2월 23일 기준 코스피는 2450선으로, 아직 낙폭의 절반도 회복하지 못했다.


난 2월 6일 아침 장이 열리자마자 우량주를 제외한 보유 주식을 모두 내다 팔았다. 이날 내가 인정한 평가 손실은 -10.3%다. 큰 손실을 보기도 했지만, 당시 나를 지배한 공포의 본질은 가격 손실이 아니었다. 시장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는 상황, 즉 '매물을 받아줄 사람이 없는 상황'이 진정으로 두려웠다. 다행히 그 걱정은 기우였고, 매물을 다 처분하기까지는 불과 몇 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위의 사례에서 내가 강조하고 싶은 점은, 주식시장에서는 발생한 손실을 인정하면 언제든지 빠져나올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내가 우려했던 것과 같은 극도의 패닉 장세가 벌어지거나, 내가 보유한 주식의 유통물량이 너무 적거나, 전체 유통물량 중 내가 가진 물량이 너무 많다면 처분하기가 어렵겠지만,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주식시장에서는 언제든지 빠져나올 수 있다. 이에 비해 P2P채권은 개인 투자자와 채무자 간의 채무 계약이며 이 채권을 유통할 수 있는 시장이 없다. 내 생각에 P2P 대출 상품의 가장 위험한 요소는 바로 이 점이다. 유통 시장이 없고, 손절이 불가능하다는 것.


이런 이유에서 난 더 이상 P2P 대출에 투자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남은 투자금을 회수하면 모두 주식을 살 것이다.


한편 채권과 분산 포트폴리오에 대한 그레이엄의 생각과 관련해서, 좀 더 교과서적이고 많이 알려진 시사점도 있어 짤막하게 언급하고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한국 주식에 투자하는 투자자라면 그레이엄의 권고대로 주식과 채권의 비율을 적정 수준으로 유지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리고 한국 국채보다는 미 국채를 환헷지 하지 않고 사는 것이 좋을 것이다(한국 주식과 미 국채로 포트폴리오를 조합하는 아이디어에 대해서는 마법의 돈 굴리기를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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